Wednesday, May 10, 2017

스데반의 죽음

스데반의 죽음.
세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스데반이다.
스데반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당당하게 죽어야 한다.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고 그렇게 죽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에게 돌을 던지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그렇게 죽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
아마 많은 크리스천들은 스데반보다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이 될 확률이 더 크다.
지금은 물리적으로 돌을 던지지는 않겠지만
마음으로 말로 태도로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의 폭력에는 맞서 싸워 스데반 같은 사람들을 구해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막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양의 우리를 벗어났던 사람들이 도착한 곳은 순교의 현장이었다.
예수님은 어디로 그들을 인도했는가..
내가 믿어야 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계실 뿐 순교의 현장에 직접 개입해서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막지는 않으시는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십자가를 예상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 옆 자리에 서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실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나는 너희를 모른다" 일 것이다.
고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면
나를 향해 날아드는 돌들을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 우편에 일어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길만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다.

Friday, May 5, 2017

목자의 음성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목자와 양의 비유가 나온다.
우리 안에 양들이 모여 있다.
그 우리 안에는 한 목자의 양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네의 다른 목자의 양들도 섞여 있다.
여러 양들이 섞여 있는 그곳에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들의 무리를 떠나 목자 앞으로 나아온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목소리에 반응하는 자기 양들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문맥상 양 우리를 유대교라 한다면 유대교인들 중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바로 앞장인 9장에서 나오는 시각장애인의 경우처럼 예수님을 믿고 유대교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들은 무리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양들에게는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목자가 부르면 양들은 그 무리를 떠난다.
목자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병을 치료해 주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고, 포식자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는 분이 목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10장의 예수님은 양을 우리로 넣기 위해 양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신다.
양의 우리에서 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양의 이름을 부르신다.
예수님은 양의 우리(유대교, 율법, 세상…) 바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양의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 바깥에 풍성한 생명이 있다.
양의 우리가 안전할 것 같아도 그곳은 도둑이나 강도들이 언제든 담을 넘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먹을 것이라고 해 봐야 주인이 던져 주는 마른 풀밖에 없는 곳이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목자를 따라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이 문 앞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를 떠날 것인가..
험한 골짝 빈들이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는가..
아니면 그냥 우리 안에 남아 있을 것인가..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