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22, 2016

부활에 관심이 없는 이유

뉴질랜드에서 부활절은 초콜릿 에그를 먹는 날이자 4일간의 연휴를 즐기는 날이다. 비기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그로 인해 주어진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기간이라기보다는 연휴를 즐기는 날인 것처럼 보인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부활에 관심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한가지 이유가 이웃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기독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부활은 고문이나 처형같은 실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을 가져도 아무런 박해가 없는 뉴질랜드인들을 비롯한 서구 복지국가 사람들에게 부활은 그다지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 보인다. 

지금의 삶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있어봐야 약간의 금전문제, 건강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다인 사람들에게 부활은 그냥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내 삶에 별다른 영향을 못 미치는 개념에 불과한 것 같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존재양식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하나님의 새창조와 관련된 실재이다. 즉 우리가 부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서 현재 자연과 인간세상을 억압하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사라진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개인의 삶의 바운더리에서 그러한 악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고 안락함 속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과 인권유린과 각종 체제의 억압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상태를 고대하는 정도가 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상태를 고대하려면 나라는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서 학대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그들이 나의 형제요 이웃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예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다가 도달한 결과가 십자가였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사람은 모두가 다 차별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데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돌이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었고 그 화해의 장을 마련해 준 사람이 예수님이었으며 그를 위해 예수님이 치러야 했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그로 인한 나의 부활도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Wednesday, March 16, 2016

하나님 나라

나는 하나님 나라(천국)가 좋다.
그 형식이 부활이든, 영혼불멸이든, 전천년이든, 후천년이든, 무천년이든, 새창조든, 저 천국이든, 황금이든, 보석이든, 뭐든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가 좋다.
그냥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만해도 좋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좋다.
이 땅에서, 이 세속의 가치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으며 산다는 그 자체가 좋다.
물론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기에 슬프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적 삶을 살때 마주하게 되는 좌절과 고통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이 주는 힘이 그런 모든 부정적인 현실들보다도 훨씬 크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걸 내 생애 보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나라의 일원으로
선취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Tuesday, March 8, 2016

무능한 목사?

어느 목사 아들이 쓴 무능한 목사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글을 읽었다. 무능하다는 표현은 세속과 교회의 일반적인 관점을 따라서 자신의 아버지를 평가한 말이었다. 설교도 평범하고, 교회도 크지 않고, 지명도도 높지 않은 목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말은 아버지가 묵묵히 성실하게 낮은 자리에서 교회를 30년 가까이 섬겼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여기에서 글이 끝났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런데 글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버지가 무능한(?) 목회자였기에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병원도 제대로 못가고 먹을 것도 맘껏 먹을 수 없는 형편에서 살았지만, 나중에 보니 자기는 전문의, 형은 모 전자 책임 연구원, 동생은 한의사가 되어있었고 이는 아버지의 희생과 기도 덕택이었으니 사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복을 자식들에게로 유도한 유능한(?) 목회자였던 것처럼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 글을 꼼꼼히 읽지는 않아서 내 독해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글을 쓴 분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만하다.
삼형제가 모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지는 말자고 다짐했었던 걸 보니 그 환경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류의 글이 인터넷에서 유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경험했던 그렇게 어려웠던 목회 환경을 바꿔보자는 글을 써주면 좋지 않을까?

이런 글들은 목회자가 참고 희생하고 기도하면 자식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쪽으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나는 저 글을 쓴 필자의 아버지와 비슷한 목회를 하신 분들의 자식들이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봤다. 굳이 목회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신약성경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신실한 신앙으로 인해 초기 300년동안 핍박과 궁핍 속에 살았던 걸 보면 신앙이 자식들의 세속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교회에도 부자교회 가난한 교회가 있다는 이 참담한 현실을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실하게 목회하는 목사가 돈이 없어서 자식들 병원에도 못보내고 가족들에게 삼겹살도 한번 못사줄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개탄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쓴이는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졌으니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감사는 아직도 성실하게 목회하면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목사들의 삶을 돕는 쪽으로, 잘못된 교회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표현되면 안될까.

Friday, March 4, 2016

구별됨에 관하여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자신과 주님의 백성이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 33:15-16)

가나안 땅에 들어갈 즈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더는 같이 안간다. 같이 갔다가는 내가 그들을 다 진멸할지도 모른다 (출 33:3)"는 말을 했고 모세는 위와 같은 말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을 진멸할지도 모르는 하나님인데도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모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매여있는 분임을 모세가 확실히 경험했기에 가능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경배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진멸하려 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언급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그래서 통제불가능한 무서운 분일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말씀에 스스로 매인 분이셨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분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분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었기에 복된 약속이었고, 그 약속을 지키는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유익한 일일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고 했다. 흔히 우리는 이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별된 사람들. 나중에는 분리가 되겠지만 지금은 이땅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는 구별된 삶의 모습들을 정형화하고 그 삶의 모습들을 강요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정형화된 모습들만 넘쳐난다. 

그런데 모세의 기도에서 그 구별됨의 근거는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함께 계심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계셔야 우리는 우리의 구별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구별됨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만 우리에게 보여져야 한다. 어떤 환경에 이끌리어 그냥 남들 하는대로 행하는 구별됨이 아니라 실제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인해 보여지는 행동들로 구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실상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보다는 우리 눈에 좋아보이거나 다른 사람들 눈에 좋아보이는 곳 또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구별되어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구별되어 보이는 곳에서 구별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우리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구별되는 것이다. 모세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