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25, 2016

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눅 18:17).
그런데 어린아이라고 하나님 나라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였다면 그 아이는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받은 아이이다.
아이들에게는 신 개념이 없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 잘 이해를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시키려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교육을 시켜야 한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어린 아이들은 유대교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앙 교육을 꾸준히 받은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그리 쉽지 않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질문이 꽤 많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내 아이의 경우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엉뚱한 이야기를 해댄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내 아이를 예수님 곁에 데리고 갔다해도 예수님은 내 아이를 가까이 부르셔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아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아이를 안키워보셔서 잘 모르시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예수님에게도 어린 동생들이 많이 있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예수님도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잘 모르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을 예수님이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순전한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하면서 천천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비꼬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대하면서 알려고 노력하고, 모르면 모르는체로 지내다가 또 다시 어느 틈엔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렇게 서서히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Monday, May 23, 2016

최소주의 목회

어렸을 때부터 나는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좋아했다.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남의 이목을 끄는 것도 싫어했다. 주위에 겉멋이 든 친구들이 있었을 때도 그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만큼 단순 소박함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 성향은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대로이다. 그래서 아마도 나에게 가장 적합한 목회 방식은 최소주의 목회일 것이다. 성도들의 삶에도 최소한으로 개입하고, 교회일도 필수적인 것만 최소한으로 하고, 설교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본문에만 집중하고...

신앙생활도 목회도 최소한으로 할 때 여유 공간이 생긴다. 그런 여유 공간들이 있어야 삶에 바람이 통한다. 나에게는 그 바람이 나를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생명(성령)의 바람으로 느껴진다. 그 힘이 있어야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빈 공간을 될 수 있는대로 채우려하지 않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공간을 채우려고 한다. 채우려 하지 않는 나와 채우려는 사람들.. 비워둬야 바람이 통할텐데.. 나는 언제까지 바람을 맞을 수 있을까..  

Tuesday, May 17, 2016

화산 폭발 가능성

집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높이 2800미터짜리 화산이 있는데 지난 2007년 마지막으로 폭발한 이후 지금 또 폭발의 조짐이 보인다고 한다. 요근래 있었던 몇번의 지진이 그 산의 밑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쳤나보다. 산 정상에 있는 화구호의 물 온도가 40도를 넘어섰고 가스 분출량도 많아졌다고 한다. 화산 경보는 폭발 전단계인 레벨 2로 올라갔다. 근처에서 괜찮은 크기의 지진이 한번만 더 있으면 폭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맨눈으로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3년전쯤인가 강도 6.6의 지진도 경험했었는데 이번에는 잘하면 화산폭발까지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 뉴질랜드 자연이 확실히 다이나믹하다.

Tuesday, May 10, 2016

데라와 아브라함

데라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아브람, 나홀, 하란.
하란은 어린 자녀 롯과 밀가, 이스가를 남겨두고 일찍 죽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했지만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조카 롯을 아들처럼 챙겼을 것이다.
또 다른 질녀 중 하나인 밀가는 아브람의 동생(또는 형) 나홀과 결혼을 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죽은 아들 하란의 자식인 손자 롯과 함께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가나안으로 가던 중 하란이라는 지역에 이르렀을때 여정을 멈추고 그곳에 거류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백오 세가 될 때까지 살다가 죽는다.
데라는 왜 가나안까지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렀을까.
왜 다른 지역이 아니고 하란인가.
여기서부터는 상상의 영역이긴 하지만 혹시 데라가 하란에 머물렀다는 표현은 데라가 아들 하란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 아닐까..
자기의 삶의 터전을 떠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아들까지 떠나지는 못한.. 과거에 붙잡힌.. 그래서 새로운 땅으로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의 결정을 존중해 준다.
이제 그만 가나안으로 가시자고 재촉하지 않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거한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슬픔과 외로움에 잠겨 있을 아브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아브람은 새로운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데라와 아브람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아브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란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되면 아브람이 형제 나홀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길을 떠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창세기 28장 10절에 보면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는데 그곳이 하란이었다. 29장에서는 야곱이 어느 우물가에서 하란에서 온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냐고 묻고 그들이 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람은 하란을 떠났지만 나홀과 그의 자손들은 하란에 계속 머물러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아브람은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난다(창 12:4).
먼저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가나안까지 가지 못한 데라와 달리 아브람은 가나안까지 갔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나중에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까지 한다. 아브람은 데라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확실히 데라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Wednesday, May 4, 2016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 약 115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 church로 번역되어있다. 처치는 kirche라는 독일어에서 유래했고 좀더 거슬러가면 Kuriakos라는 그리스어에 닿는다. Kuriakos의 어근이 kurios이기 때문에 처치는 주님께 속한, 주님의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교회로 번역되어 있는 원어는 kuriakos가 아니라 ecclesia이다.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소집된 민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는 일년에 몇차례씩 나라일을 결정할 때마다 소집되는 최고 민회였다. 제정 로마 시대에는 그 역할이 아테네 때만큼 크지는 않았겠지만 로마시대에도 각도시의 제반 사항들을 결정하는 민회인 에클레시아가 있었을 것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썼을 때 확실히 그들은 건물로서의 교회를 머리 속에 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말에 로마나 유대 시스템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요즘은 많이 약해진 것 같지만 아직도 건물 중심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쯤이나 사람들이 교회와 건물을 등치시키지 않을까..

신학: 해석과 번역

다른 학자들도 그렇겠지만, 신학자들도 시대적 한계 속에서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신학자의 경우 그것은 신학적 해석일 것이다. 일부 신앙인들에게는 해석없이 주님의 뜻을 가급적 문자적으로 추구하며 사는 방식도 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인간 이성의 지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니, 신앙의 지적인 부분에 도움이 되는 해석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사는 삶에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무조건 믿어라 보다는 '이러이러하니 믿어라'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사건 역시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다. 유대교의 해석을 따르자면 메시아는 이교도에 의해 사형당해서는 안되는 존재이고 역사의 중간에 부활이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해졌을 것이고 부활을 경험했던 제자들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진행되었다. 그 중 바울의 해석이 가장 정교했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 해석에 설득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유대교 신앙에서 벗어났다.

요즘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까? 그렇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천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천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필요하다. 특히나 과학적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관이 과학이라면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관은 구약적 세계관이었고 바울과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면 과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는 해석과 함께 신학과 타 학문간의 해석적 번역(단순한 언어 번역이 아닌 학제간 번역)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수준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 언어를 신학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하고 신학 언어를 과학 언어로 번역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과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심리학, 문학, 예술 등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각 분과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고 각 분과적 언어를 신학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막무가내식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수준으로 말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학제간 고급 번역요원들을 양성해 내는 사업을 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이일에 지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