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25, 2010

복음서의 생성 과정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 신앙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는 마지막 날에 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세상의 악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복음서 기자들은 보았다. 악은 지금껏 의례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폭력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죽인다. 그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의 방식이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가 등장할 때마다 세상은 그들을 죽임으로, 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와 반면 세상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과시하였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종료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다른 선포자들에게는 없는, 세상이 간파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을 것이다: 1) 많은 선포자들 중에서 왜 하나님은 예수님만을 부활시켰는가? 2) 예수님의 그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다시 살려내게 했는가? 3) 전시대 선포자들과 예수님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복음서 기자들은 이 질문에 답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시대 선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특징을 예수님에게서 찾아낸다.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이다.

선지자들 중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정도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빠였다.또한 예수님은 말 뿐이 아닌 그의 행동과 가르침을 통해서 아빠이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드러내었다. 그전의 선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만 했었지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는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아빠 - 아들의 관계를 형성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했다고 보았다. 그들은 본래 사회의 약자와 소외 계층을 특별히 사랑했던 하나님이 수많은 선포자들 중에서도 갈릴리 시골, 목수 출신이면서 약자와 소외 계층을 사랑했던 예수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가르침과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고 보았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한 자라 믿었기에 복음서 기자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으며,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셨던 분으로 묘사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인간에게 드러내보이길 원했던 것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보았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에게 가장 확실했던 기억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그들의 공통된 해석의 고갱이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 때까지, 즉 예수님의 죽음 후 30년 정도까지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먼저 쓰인 바울 서신과 몇몇 일반서신 외에 기록된 문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온 구전들이 있을 뿐이다.  이미 신앙의 눈으로 해석되어진 다양한 구전들이 신앙 공동체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글로 남기는 일이 복음서 기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그들에게 자료란 대부분 구전일 뿐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무장한 그들은 예수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나 제자들의 친필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녹음기도 비디오도 없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바울 서신, 그것이 전부였다.

복음서 기자들의 의식 속에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임에 틀림없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복음서 기자들은 가능한 모든 소스를 동원해야 했다. 당시 구약 성경이 그들에게는 좋은 소스가 되었다. 그들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내용 중에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모든 구절들을 찾아내었다. 먼저 글을 쓴 바울이 그랬으며 복음서 저자들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일단 동족인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복음서 기자들은 이방으로 사역의 범위를 넓혀간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알고 싶었던 사람들은 점점 1)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궁금해 했고, 2)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궁금해 했으며, 3)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궁금해 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사람들의 궁금증에 답해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료를 수집했다.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수집되었다. 관련 구약 성경 구절도 찾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미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전해진 이야기들이기에 엄밀한 의미로 팩트는 아니다. 아니 사실 팩트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의 자료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자료들이 거짓은 아니다. 수십년의 시간을 거쳐서 생성되고 변형되면서 전달되어져 내려온, 그 당시 사람들의 양심에 비추어 보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개연성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진정성이 들어있기에 거짓은 아닌 것이다.

그 이야기들이 사실이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미 그렇다 아니다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수십년이 흘러버린 상황이고 기억 외에는 그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동체 속에서 그 이야기는 의미가 있었으며 그들의 사회 속에서 이 이야기는 유효했다. 그렇기에 복음서가 계속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Thursday, January 21, 2010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말은 단순히 공간적으로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자리 잡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 나라의 가치와 존재 양식이 이 세상 나라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다른가?

1.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통치가 아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지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2.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따라서 그 나라에서는 지배 피지배의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3.

그 나라의 구성원들은 모두 평등하며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끼며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서로 사랑하기에 욕심이 없으며 욕심이 없기에 전쟁도 갈등도 없는 나라이다.

4.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죽음이 없는 생명의 나라이기에 질병과 아픔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자연적 아픔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피조물의 무상함 때문에 일어나는데 영원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단절이 없기에 단절의 결과인 늙고 병듦 또한 없게 될 것이다.

5.

하나님 나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나라이다.

따라서 그 나라의 실체가 어떠한가에 대한 설명들은 그 어떤 것도 완벽할 수 없다.

스데반과 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스데반이 쓰러져 죽기 전까지

수많은 돌들이 스데반을 때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돌,

스데반의 목숨을 끊은 그 돌,

그 돌을 던진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갑자기 이게 왜 궁금할까...

 

Friday, January 15, 2010

왜 예수만이 나의 구원자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자를,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내줄 사람을 원한다.
병자는 자기를 치료해 줄 사람을,
가난한 자는 부요하게 해 줄 사람을,
억눌린 자는 자유롭게 해 줄 사람을,
죄인은 죄를 사해줄 사람을 원한다.
물론 간혹 자기가 자신의 그리스도(구원자)가 될 수 있음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스스로 자기가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때까지 도와주고 기다릴 뿐이다.

반면 어떤 연유로든 자기가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 내가 있다.
나는 다른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러하듯 2000년 전 유대지역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한 인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선포한다.
나는 왜 예수님을 내 구원자로 고백하는가?
왜 다른 사람은 안되고 예수님인가?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내 구원자인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땅과 성전을 돌려줄 구원자를 원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들에게 땅과 성전을 돌려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로마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했기에 그들의 메시아/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전통적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가, 로마에 의해 당대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그가, 구원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전부 미친 사람들이었는가?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 그분이 메시아라는 희망을 포기했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부활이라는,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최후의 날에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리라 믿었던, 종말론적 현상이 예수라는 개인에게 일어났음을 경험하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 부활 사건 이후로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보았으며,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보았다.
또한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왔던 정형화된 독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그들의 경전(구약)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유대 민족주의를 벗어난 구속사가 전개되었다. 이방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제 삶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차별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랬다.
나는 어떤가?
나에게도 부활이 의미가 있는가?

부활은 필연적으로 새창조를 요구한다.
부활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존재 양식이라면 그러한 존재 양식이 살아야 할 시공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계시록이 그리는 새하늘과 새땅은 그러므로 새창조의 관점에서 옳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는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먼 훗날의 이야기가 현재의 나에게 실제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활은 개인의 의식 차원에서 본다면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순간까지 내가 의식하는 실제 시간은 순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신마취 후 깨어나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한다.
당사자에게는 전신마취 전과 깨어난 후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죽고 내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간 경험을 할 것이기에
역시 내 의식 속에서 부활까지의 시간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은 먼 미래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죽음과 관련이 있다.
내 죽음은 40년 후가 될수도, 10년 후가 될수도, 아니면 오늘이 될수도 있다.
마지막 눈을 감고 뜨면 부활인 것이다.

부활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 해도
이 일을 개인이 영생을 얻는 수준으로만 이해한다면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부활을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 진입 사건으로 본다면 상당한 의미로 다가온다.
부활을 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만 나에게 의미가 있다.
내가 부활을 소망한다는 것은 내 개인의 영생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는 말이다.
나 혼자만 살아나는 것이 아닌 온 세상이 하나님의 새창조로 말미암아
배고픔과 아픔과 미움과 전쟁과... 죄악이 없는 새로운 세상이 되어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 꿈을 내 마음에, 내 몸에, 이 땅에 실현시키며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이 끝이 아니다. 부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눈을 감고 눈을 뜨면 새 세상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 앞당겨져서 예수님에게서 먼저 일어났다.
나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에게서 새 생명의 비전을 본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셨다.
저항 세력은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에게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아니 죽임을 당한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죽음을 최고의 무기로 사용했던 권세자들에게 이는 심판의 메시지이다.
죽여도 다시 살아난다. 죽일테면 죽여봐라.

부활 신앙 앞에서 어떤 자가 악을 행할 수 있겠는가?
부활 앞에 악은 이미 죽은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생명의 나라가 이 죽음의 나라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과감하게 부활을 외쳐라.

부활을 통해서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
그렇다.
예수님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치권력과 유대의 종교 권력에 의해 찢기고 피흘린 예수님이
부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최고의 무기인 죽음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보다 기쁜 승전보가 어디있는가?
이 분외에 그 어느 누가 나의 구원자/그리스도가 될 수 있겠는가?

Wednesday, January 13, 2010

귀국

한국에 돌아온지 12일이 지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 몸은 한국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가스렌지의 불을 끄면서 나는 별다른 의식없이 가스밸브를 잠궜다.

가스밸브없는 미국에서 7년간 살았던 내가 자연스럽게 가스밸브를 잠근것이다.

내 몸은 내 의식보다 빠르게 한국에 적응했다.

마치 내 몸이 7년 간의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듯했다.

내 혀는 정확히 한국 음식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고

내 눈은 눈 덮인 논을 보면서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미국에 처음 도착할 당시 시차 적응에 힘들어 했었던 내 몸이

한국에서는 잘도 시차에 적응했다.

오늘 산길을 걸었을 때 내 발은 전혀 어색함 없이 그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어내었다.

내가 언제 미국에 살았었던가..

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면

내가 미국에 7년을 살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너무도 빠르게 한국에 적응하는 내 몸을 보면서

무서움을 느꼈다.

나는 과연 내 몸을 내 의지에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인가..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