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고 다니는 임금님에게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중압감.
그러나 그 중압감을 이겨내고,
그 중압감을 주는 체제와 불화하며,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여전히 그 말을 하길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그 잘못된 면을 말로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하거나
임금에게 옷을 입히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벌거벗고 다니는 임금님에게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중압감.
그러나 그 중압감을 이겨내고,
그 중압감을 주는 체제와 불화하며,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여전히 그 말을 하길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그 잘못된 면을 말로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하거나
임금에게 옷을 입히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리더의 모습 중 하나는
책임을 져야하는 때가 왔을 때 그 책임을 남에게 또는 부하직원에게 떠넘기지 않고
진심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명예와 업적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숨김없이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백의종군하는 자세를 갖는 사람말이다.
이미 너무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았고
너무 많은 명예를 얻어서,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내가 바라던 리더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 리더를 따르고 싶지도 않고..
"나는 이 지평을 이른바 ‘외부성의 사회’ 속에서 찾는다. 그것은 전체를 통제·규율하는 구실로서 선택된 일부를 관용하는 ‘관용성의 사회’도 아니며, 결국 상품 자유주의에 함몰된 ‘다양성의 사회’도 아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의 이념에서 그 정의의 잣대를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의 자리와 시선에 두는 태도와 실천을 말한다. 부자와 강자의 스펙트럼에서 빠져 나온 여광(餘光)으로 빈자와 약자를 돌본다는 헛소리를 뭉개고, 국민전체를 잘 살게 하겠다는 헛소리를 잠재우고, 무조건, 제일 못 사는 극소수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한다." - 김영민 http://www.jk.ne.kr/main-01.htm
교회가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돈을 벌어서 나누겠다는 헛소리를 집어치우고
돈이 없을 때나 돈을 버는 과정에서부터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자세와
바람없는 나눔의 실천을 잃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건가?
여기서 일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본다.
자기가 가진 많은 것들 중 극히 일부를 주면서 생색내는 사람들,
우리의 필요가 아닌 자기의 필요(이를테면, 새것을 샀는데 헌것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헌것을 치워야 되는), 에 의해 "주(실제로는 버리)는"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필요가 없어서 받지 않으려하면 배가 불렀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런 '척'하는 사람들 정말 혐오스럽다.
예수님이 위선자들을 싫어한 이유를 몸소 느끼고 있다.
반면, 몇 억을 기부하면서도
한사코 자기의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어렵게 모아온 돈을 기부하면서
더 기부하지 못해 죄송스러워 하는 분들,
이런 분들에게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I am not in this world to live up to your expectations,
And you are not in this world to live up to mine.
You are you, and I am I, and if by chance we find each other, it's beautiful.
If not, it can't be helped.
(Fritz Perls, 1969)
내가 목표로 하는 기도 시간의 양은 2시간 반이다.
하루가 24시간이니 그 십분의 일인 2시간 반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아버지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나 역시 그 정도는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기도를 강요하시는 분은 아니다.
나도 강요한다고 할 사람도 아니고..
기도는 양화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바울 사도의 권고대로 기도는 쉬지 않고 하는 것이라 하면,
그것은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리라.
크리스천에게 기도는 호흡과 마찬가지이며 늘상 함께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나는 기도를 양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2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정했는가.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냥 뭔가 분주한 삶 속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아내를 떠나 집 바깥에서 일할 때도 늘상 아내를 생각하지만
집에 들어와서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 역시 중요한 것처럼,
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산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겨우 2시간 반이냐, 더 오래 할수록 더 좋은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물음에는, 음.. 할 말이 없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냥 나는 2시간 반에 끌린다.
지금은 그만큼 못하고 있지만 점차 2시간 반에 가까이 갈 거라 믿는다.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다.
부모님을 만나 뵈었고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환대를 받았다.
내가 부모님을 초대하고 환대를 베풀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아직 나에겐 사치이며 꿈이다.
늘 변함없으신 부모님.
두 분이서 참 행복하게 살고 계셨다.
비록 세상 관점으로는 가진 것이 없는 분들이시지만
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얻는 분들이시다.
내 신앙의 사표가 되시는 분.
신학적 정치적으로 나와 많은 부분이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목회하는 30여년간 한결같이 유지해오고 있는
모습은 나에게 한마디로 경이이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저렇게 겉과 속이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환경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굴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는 저 모습,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평안함을 잃지 않는 저 모습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
수십년 후 내가 노 목회자가 되었을 때
내 모습이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늘 아버지를 보면서 했다.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