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30, 2011

일자리 찾기의 어려움

일자리 찾기가 영 쉽지 않은데, 두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나는 낮에 아이를 돌봐야하기 때문에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저녁/밤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녁에 일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닌데,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이유는 이곳 가게들이 대부분 이른 저녁에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시내에 있는 제일 큰 쇼핑몰이 5시 반에 문을 닫을 정도니... 그나마 늦게 문을 닫는 부문이 리테일 쪽이라 그쪽으로 이력서를 돌렸는데,  연락이 없다.
왜 그럴까.. 짐작되는 이유는 내 학력이 내가 찾는 일에 비해 overqualified 되어있다는 점이다. 단순 노동에 이제껏 그런 일을 업으로 삼아본 적이 없는 석사 학위자를 쓰려고 하겠는가...
기타 이곳의 침체된 경기, 실업 문제, 보이지 않는 인종적 차별 등의 변수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최소 일주일에 20시간은 일을 해야 되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
어디 좋은 방법이 없을까..

Saturday, November 26, 2011

삶의 자리


2007년 8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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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싸이에 글을 하나 남겼다.
그 글 중에 이런 문장이 하나 있었다.
"Crew 4 동료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아내가 이 글을 읽고 왜 동료가 두 명인데 네 명이라고 썼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난 네 명의 동료들이라는 생각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저 글을 썼다.
내가 염두에 둔 내용은 우리 크루가 "Crew 4"라는 것이었다.
한국 말로 하면 "4조"라는 말이다.
난 "Crew 4"를 염두에 두고 저 글을 썼는데 읽는 이는 네 명의 동료로 읽었다.
물론 글을 쓴 내가 따옴표를 Crew 4의 앞뒤로 찍지 않은 데에 일차적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Crew 4"는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말이기 때문에
별 다른 생각이 없이 그냥 Crew 4라고 적은 것이다.

아마 성서 기자들도 나와 같은 실수를 했을 지도 모른다.
글을 적다가 자기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데에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글을 쓰는 경우 말이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말인데 후대의 독자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기록된 문자를 그대로, 정말 그 문자 수준에서만, 해석을 한다면 누구라도
내 아내가 행했던 바와 같은 실수를 할 수 있을 거다.
삶의 자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자리에 대한 연구는 기록된 문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Crew 4가 어떤 말인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내 삶의 자리를 추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근거없이 맘대로 그 의미를 해석해낸다.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 그 문장의 해석의 근거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한다.
성서 기자의 삶의 자리에 대한 연구 없이 성서를 해석한다는 것은 내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Crew 4를 해석해 내는 것과 다름 아니다.
성서 기자와 텍스트에 대한 정말 무서운 폭력이 아닌가?
삶의 자리를 떠난 성서 이해는 성서 기자에 대한 무시요 더 나아가서는 성서 기자에게 영감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시이다.

내 관심사


2007년 9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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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사람들이 신경 쓰는 많은 일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걸까?
교리를 가지고 치고 박고 싸우는 사람들의 일에 관심이 없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든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 있는 것?
인간은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인간은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은 있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다.
왜?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는 일방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해본 기억은 없다.
어떤 뜨거운 감정 같은 것은 느껴본 적은 있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눠본 것 같은 기억은 없다.
성경을 읽을 때도 성경의 내용에 의해서 내가 감동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나에게 말을 한 적은 없다.

하나님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인간들은 보인다.
인간들이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상황들이 보인다.
인간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애썼던 상황들은 보인다.
인간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기위해 애썼던 예수라는 사람도 보인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했던 사람들도 보인다.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그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라 믿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모든 억압에서 풀어주기 위해 애썼던 예수.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살아갈 수 있다는
예를 보여준 예수.
예수의 삶이 구원의 삶이었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삶인 것이다.
구원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다른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교리, 성경, 교단별 특징.. 다 관심 없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 주변의 인간들을 사랑하는 것
이것 말고 내 관심사는 없다.
그런데 이것만도 너무 어렵다..

사역자의 기본


2007년 12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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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는 성도인가 아닌가..
사역자도 성도이지 않은가..
성도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그 분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면
사역자 역시 성도이다.
성도 중에서 교회에서 행해지는 특정한 일들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그러니까 성도로서의 삶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추가로 부여받은 사람이 사역자이지 않은가?
성도들이 하는 일들을 사역자들이 한다고 해서 사역자 스스로 그것을 모멸로 여기거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거나 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목사나 전도사를 그만 두더라도 성도의 역할은 남는다.
성도의 역할이 가장 기본이다.
성도들이 하는 일들을 감당하면서 추가로 사역자로서의 일까지 감당해야하니까 사역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고, 그 것 때문에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닌가..
돈 주는 대로 딱 그만큼만 일하겠다면 사역자가 일반 근로자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
의자 나르고 음향 장비 설치하는 일을 전도사, 목사가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그 일들은 성도들만이 해야되는 일인가?
대접받기 좋아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종이 되겠는가..
주님의 종은 주님의 자녀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주님의 자녀의 신분에서 주님의 종의 신분으로 한단계 신분 하락을 감행한 사람들이 사역자들이 아닌가..
그 자발적인 낮춤에 성도들이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만 주의 종이라 하고 행동은 그렇지 않다면, 대접받기만 좋아하고, 몸으로 봉사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면 누가 그 종을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자기 잘못은 보지도 못하고 다른 종의 흉만 보고 다닌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 종을 좋아하겠는가..
어떤 교회가 그 사람을 데려다 쓰겠는가..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역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정말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목숨 바칠 수 있는가,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40일 금식


2008년 11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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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간다.
금식 기도는 남들을 따라서 또는 자기 수련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하는 것이다.

마귀는 여기서도 유혹하는 자로 등장한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여기까지 마귀는 줄곧 유혹하는 자이다.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유혹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 성서까지 인용하기도 한다.

둘째 아담인 예수도 유혹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받는 존재라는 점을 보여준다.
실로 마귀는 모든 사람에게 접근하여 그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기 위해 애쓴다.

예수를 유혹했던 세 가지 방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그 세가지 방법이 다 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세가지 마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면 우리는 감히 예수의 제자라 불릴만 할 것이다.

돌이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말해도 안된다.
돌이 빵이 되라고 말해봐야 안된다.
예수는 이 순간 인간이다. 마귀는 인간을 유혹한다. 마귀가 하나님을 유혹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라. 하나님이 되어라.

너의 하나님 됨을 보여라. 이러한 능력만 있으면 너는 수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가 아니고 그렇게 "말"해 보아라.
말을 하면 그대로 되는 것이 하나님이다.
마귀의 유혹은 대단한 수준이다. 정곡을 찌르고 있다.
마귀는 허투루 유혹하지 않는다. 중심을 흔든다. 최고의 유혹자이다.
마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육화된 하나님임을.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마귀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하나님됨을 드러내 보이면 예수는 하나님일 뿐이다. 인간은 아니다.
돌이 빵이 되라고 말을 해서 그것을 가능케 할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
예수는 안다. 문제는 빵이 아니라는 것을.
돌을 빵으로 만들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만나를 생각해보라.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방점은 하나님의 말씀에 찍혀있다.

빵으로만 물질로만 산다면 그건 동물이다.
사람도 동물로 살 수 있다.
피조물로 살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다른 동물들처럼 살 수 있다.
자기 가족들을 위해서 평생 수고하고 자식들 먹이고
자기 먹고 살기 위해 애쓰고.. 전부 동물 수준이다.
동물도 그 정도는 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게 안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귀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있다고.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는 성서의 말씀을 이용해서 마귀의 유혹을 벗어난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진정 사람으로 살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동물, 물질 수준의 삶 밖에 살 수 없다.

마귀는 모방의 천재다.
즉시 예수를 모방한다.
말씀으로 예수를 유혹한다.

말씀으로 사람을 유혹할 수 있는 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일 수 있다.
목사, 장로, 집사일 수 있다. 신학 교수일 수 있다.
모두가 유혹자가 될 수 있다.
말씀이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에 의해
그 말씀은 사람을 유혹하는 도구로 오용될 수 있다.

예수는 말씀에 대한 문자적 수용을 거부한다.
말씀이니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순종하지 않는다.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전체 성경과의 조화 속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 말씀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요 잘못된 적용임을 알고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조건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 많다.
왜 하나님을 시험하는가?
사람을 시험할 권리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할 권리도 그럴 수도 없다.

세번째 유혹은 가장 강력한 유혹이다.
그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다.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들이 할 수 있는 유혹이다.
정치가, 권력자들이 할 수 있는 유혹이다.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사람을 유혹할 수 있다.

돈을 가진 자는 돈으로, 정치 권력을 가진 자는 정치 권력으로 사람을 유혹할 수 있다.
그들의 조건은 단 한가지.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내 말을 들어라. 그러면 내가 가진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 유혹자들을 섬기고 있는 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그들이 가진 영광이 더욱 현실적이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다.

신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들에게 영광을 가져다 줄 자들에게 가서 경배하고 그들을 섬긴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교묘하게 성도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을 섬기게 한다.

사람들을 부리고 싶어하는 욕망은 마귀에 속해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명령이라도 우리는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야 한다.

악마는 떠나간다.
악마는 떠나가야 할 존재다.
함께 살아갈 대상은 아니다. 악마는 언제나 우리 곁에 가까이 올 수 있다.
세상의 악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를 통해서도 우리를 유혹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악마가 우리 곁에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마와 같이 살아갈 수는 없다.
악마와 우리는 가야할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악마를 물리쳐야 하지 악마와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
세상의 지배 가치와 함께 동거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때로 이러한 삶이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 가치관대로 살고 그에 속한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러한 삶이 더 옳고 좋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잊지 말라. 사탄은 물러가야 한다.
사탄이 물러가면 그 때서야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돕는 천사들이 많이 있음을..
나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Tuesday, November 15, 2011

부자들의 기부

부자들이 기부를 하면 칭송을 받는다. 비록 그 기부가 그들 재산의 10퍼센트 또는 1퍼센트 밖에 안되어도, 그 액수는 서민이 평생 일해도 벌수 없는 양의 금액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부자가 얼마나 나쁜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부자의 기부를 칭송하기만 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너희들도 돈많이 벌어라, 돈이 많아야 기부라도 하지."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 사회에 몇백억 몇천억씩 기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만큼의 부를 얻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몫을 가로챈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반 서민들이 보기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기부해도 여전히 부자로 살아가며, 여전히 자신들의 삶의 행태를 바꾸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기부는 그들의 추한 얼굴을 숨기기 위한 화장일 뿐이다.
부자들이 기부하는 것은 칭송받아야 할 행위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노력 이상으로(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만큼 일하지 않는가?) 많은 돈을 벌었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사회와 이웃들에게 그 돈을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부 행위를 칭송하고 싶다면 오히려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닢을 더 칭송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기부조차도 돈의 액수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는 이 썩어빠진 세상..

Monday, November 14, 2011

어머니의 한마디

생각보다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서 두 달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정식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한지는 아직 한 달이 채 안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형편상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할 상황이다. 이번 일자리 문제는 우리 가정의 생존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내 마음도 그리 느긋한 편이 아니다. 그래도 이제껏 어려웠던 순간들을 잘 넘겨왔던 일들을 기억하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며 마음을 컨트롤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 어머니와 통화하는 중에 어머니께서 내 생각을 환기시키는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어머니 역시 우리 형편을 뻔히 알고 계시고, 아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에 자식 걱정을 안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하나님이 더 급하시지.."
하나님도 우리 사정을 다 알고 계시기에 나나 아이를 굶기지 않으시려고 우리보다 더 급한 마음으로 일자리를 알아보고 계실거라는 뜻이다.

예전에 우리가 이사를 갔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집이 안좋아서 내가 며칠을 고생하며 집을 고치고, '이제 다 됐구나'라고 생각한 며칠 후 비가 왔었는데, 천장에서 비가 새는 것이었다. 낙심하여 집에 전화를 했을 때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우울한 마음을 단번에 날려보냈다.  "비가 어디서 새는지 알았으니 잘 됐네. 거기만 막으면 되겠구나."

부모님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내가 내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왜 내 걱정이 안되시겠는가.. 그런데 내 부모님은 당신들의 걱정을 나에게 전가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내 시야를 넓게 해줌으로서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면서도 모른체'하고 우리의 시선을 살짝 돌려놓는 방법. 나는 그래서 어머니와 통화할 때면 마음이 편하다.

Saturday, November 12, 2011

언어폭력

사람의 가장 깊은 속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말이다.
신체를 사람의 외부, 영혼을 사람의 내면이라고 한다면, 말은 사람의 내면 곧 영혼에 닿는 도구이다. 손이 사람의 신체를 만질 수 있듯이 말은 사람의 영혼을 만진다. 마찬가지로 손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듯이, 말도 사람의 내면을 공격할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보호하지 못한다. 손의 공격/폭력을 잘 막는 사람들도 말의 공격/폭력으로부터는 자신을 잘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폭력적인 말을 하면 그들의 영혼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왜 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을 방어하지 못할까? 말 자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모든 말이 다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다. 어떤 말은 단지 화자의 감정 상태를 표현할 수도 있고, 어떤 말은 틀린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고, 어떤 말은 그저 형식에 불과한 말이기도 하다. 모든 말이 다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어떤 말은 그냥 소리에 불과하다. 그런 말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된다.

어떤 말이 의미가 있는 말인지 없는 말인지에 대한 선택은 말을 듣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이 나쁜 말을 안하면 좋겠지만, 인간 세상이 어디 그렇게 좋은 사람들만 가득하던가. 나쁜 말을 들었을 때는 말로부터도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호신술을 익혀 몸을 보호하듯 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기술도 익혀야 할 것이다.

자비량 목회

나는 예전부터 작은 교회 공동체를 꿈꿔왔고 그를 위해 Bi-vocational/Tent-making/자비량 목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아니 오히려 자비량 목회를 더 적극적으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Bi-vocational이라는 용어는 미국 침례교, Tent-making은 미국장로교, 자비량은 한국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다).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한데, 무슨 직업으로 자비량을 할 것인지를 정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은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고, 사람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유는 내가 천성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어서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목회는 필연적으로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나처럼 내향적인 사람은 사람을 상대하며 소진된 에너지를 혼자 있는 시간에 충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자비량 직업까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면 에너지 소진이 너무 심해서 목회까지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내가  큰 무리없이 바로 배울 수 있는 기술은 페인트칠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파트타임으로 꽤 오랫동안 페인트를 칠해보았고,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다,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곳에서 페인터로 취직할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페인터 구인이 많지 않은데다 아이 때문에 저녁에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인터 다음으로 생각해본 직업은 수의사이다. 이 직업 역시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고, 사람이 아닌 동물을 상대하는 일이기에 내 기준에 부합하는 직업이다.
물론 이 생각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부하는데 5년이나 걸리고, 공부가 어려워서 졸업을 장담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학비도 비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실현된다면 안정적으로 목회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긴 하다.

대개의 작은 교회는 전임 목회자를 먹여 살리는데 재정을 거의 다 소비하고 있다.
교회가 목회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내가 중, 대형 교회 목회를 꿈꾸는 목사라면 자비량 목회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만난 예수, 내가 깨달은 목회와 목사정신에 충실하고자 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자비량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 부분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나도 아직 내가 어떤 목사가 되어갈지 장담할 수 없다.
자비량 목회를 과연 할 수 있을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나에게 확실한 것은 최소한 내가 그 길을 가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후는 내 삶으로 확인해 나갈 뿐이다.

Thursday, November 10, 2011

최저임금도 안주다니..

이곳에도 최저임금에 못미치는 임금을 주는 한국인 사장들이 있나보다.
그 돈받고 일할 뉴질랜더들은 당연히  없을테니, 그 돈이라도 필요한 한국 사람들만 그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다. 뉴질랜더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한푼이라도 더 주면 좋을텐데, 오히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임금을 한국인 직원에게 주면서 일을 시키는 한국인 사장이 있다는 소식에 참 마음이 아프다. 최저임금은 법이 정한 최소한의 임금이다. 그걸 깍으면 되겠는가.. 그것도 같은 동포에게 말이다.

Wednesday, November 9, 2011

자식 사랑이란..

아이가 요즘 감기에 걸려서 몸이 좀 안좋았다.
보통 저녁 먹고 잠자기 전에 우유를 마시고 자는데, 어제 그제 두번 연속으로 우유 먹은 것을 토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이가 토한 시점이 두번 다 내가 안고 있던 때여서, 그 시큼한 토사물을 전부 내가 뒤집어쓰고 말았다.
일단 뱃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음식물은 아무리 어린 아이의 것이라도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나는 것을 얼굴부터(하필 얼굴에 토해서..) 온통 뒤집어 쓰고 있으면서도, 우스웠던 것은 내 옷과 몸에 묻은 그 토사물로 인한 불편함이 아니라, '얘 괜찮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였다.
만약 다른 사람의 토사물이 나에게 묻었다면 얼마나 찝찝하고 짜증났겠는가.
그런데 그 토사물의 주인이 내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냄새와 젖은 옷과 몸에서 느껴지는 찝찝함을 잊고, 아들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부모의 심정이란 이런게 아닐까 싶다.
자식을 낳고 나서야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어제의 그 일로 나는 내 부모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 아픔에 나보다 더 아파해 하는 분들이 내 아버지, 어머니 아니겠는가..

Tuesday, November 1, 2011

짐바브웨

아는 분이 짐바브웨에서 사역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다.
나와 아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분이어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당연히 생각이 있다고 얘기 했다.
물론 현재 내가 뉴질랜드에 와있고 1년동안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갈 수는 없는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만약 그쪽에서 일년 후에도 우리를 필요로 하면 당연히 갈 생각이다.
어디든 나와 아내가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못 갈 곳이 없다.
한국은, 나는 일을 할 수 있지만 아내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뉴질랜드는 나와 아내 둘다 일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우리가 머물 수 있는 나라이다.
그렇지만 뉴질랜드보다 더 못사는 나라에서 우리를 부르면 우리는 그 곳으로 갈 것이다.
약한자, 고통받는 자들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않고 어떻게 예수의 제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