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22, 2015

나와 하나님

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다가오셨는가.
가장 먼저 하나님은 자살하려던 아버지를 살리신 분으로 내 삶에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독실한 불교도였는데 사업의 실패로 투신 자살을 하려던 찰나에
어떤 연유였는지 부처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음성을 듣지 못했기에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다'고 했고,
그것을 통해 자살을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문자 그대로 구원의 하나님이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랐을 것이고
내 막내 동생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우리 삼남매는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아주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앙이었을
아버지의 죽음을 막아주시고 우리 가정을 살려주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이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에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자 가치를 셈할 수 없는 은혜이다.
따라서 나는 성경이 없었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어야 할 사람이다.

그 이후에 경험된 하나님은 부도로 인해 가난해진 우리 가족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셨다.
광야에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셨던 하나님,
이스라엘이 고백했던 그 하나님이 어릴 적 내가 경험했던 우리 가족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아버지를 선택하신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믿는다.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사람중에 유독 아버지를 택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자살을 택하는 모든 사람에게 외치셨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버지에게 뭔가 특별한 믿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의 음성이 아버지에게 들렸다는 사실.
그래서 불교도였던 아버지가 하나님을 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만남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하나님을
내 아들에게도 반드시 전해야 하는 사명감 같은 걸로 다가온다.
물론 하나님이 이 일도 주도적으로 하시겠지만
그 과정 중에 내가 해야할 일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생각이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에게는 어떠한 큰 요구도 없이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보여주셨다.
어쩌면 모리아 산 사건 이후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삭에게
하나님이 미안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의 하나님 경험은 아브라함의 그것보다는 이삭의 그것에 더 가깝기 때문에
나는 아브라함보다는 이삭에 좀더 동질감을 느낀다.

물론 내 아버지는 아브라함의 신앙처럼 광신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모리아 산 사건 이후 사라와 이삭에게 버림받았던 말년의 아브라함처럼
아버지도 나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것이다.
다행히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아버지가 강한 영적 체험을 했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여러가지 오류에 깊이 빠지지 않도록 해주셨다.
물론 그 과정이 아버지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었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십자가 신앙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무사히 잘 감당하셨고 이제 공은 나에게 넘어왔다.
나는 이 공을 내 아들에게 잘 넘겨야 한다.
다행히 나는 아들이 하나여서 이삭처럼 두 아들의 시기와 경쟁 때문에 괴로워할 일은 없다.
나는 신앙의 유산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내가 아들에게 넘겨줄 수 있는 신앙의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된 구체적인 신앙의 발자국들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Tuesday, November 24, 2015

크리스천의 소망과 기쁨

대림절이다.
대림절을 통해 교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희망하며 새해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바라는 것들이 많다.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바라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기를 바라고, 좋은 차에, 좋은 집에, 건강한 아이를 갖기를 바란다.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것들을 바라지 않는 성도들이 있겠는가.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바람들이 우리 소망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인의 소망의 중심에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한다.
그 외의 소망들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기쁨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질 때만 가능하겠지만,
크리스천의 기쁨은 내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졌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사실로 가능한 것이다.

내가 기쁘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나에게 절대적인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그 외의 소망들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이루어지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바라던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희망 만으로 나는 기쁜 것이다.

내가 좋은 집에 산다고 그것이 기쁜 일이겠는가.
아직도 집이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돈을 좀 번다고 그것이 기쁜 일이겠는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죽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들을 바라면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슬퍼하고 마음 상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이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크리스천이 다를 게 뭐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나를 매개로 내 가정에 임하고, 직장에 임하고,
각계 각층에 나와 같이 예수님의 몸의 일부가 된 사람들을 통해
더 넓은 사회적 영역에 임하고,
나라에 임하고 온 세상에 임하게 될 날을 고대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Thursday, November 5, 2015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은 누구?

오늘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라 했을 때 그 양들은 누구였을까..
요한복음 기자에게 예수님의 양은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초기 교회의 성도들로 읽혔을 것이다.
하지만 공생애 당시의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까..

공관복음서를 좀 찾아봤다. 예수님이 양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이 있는지..
몇 군데 있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마12:11),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마 15:2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막 6:34),
백 마리 양 중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마 18:12, 눅 15:4).

더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찾은 부분은 이 정도다.

예수님의 마음 속의 양은 로마나 유대 성전 체제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 땅을 잃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죄인들, 거지들, 노예들, 병자들, 빚진 자들...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겠는가..

마음이 아프다..
이 양들은 지금 교회에 있을까..
이 양들은 교회에 다닐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하고 뭘하고 있는걸까...

Saturday, October 31, 2015

어둠은 빛으로 이긴다

어둠은 빛으로 이겨내는 법.
빛을 얼마나 끊임없이 공급하느냐가 관건이다.
실낱같은 빛이라도 끊임없이 공급되기만 하면 어둠은 뚫린다.
그러나 아무리 폭포수와 같은 빛이라도,
그로인해 모든 어두움이 사라진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빛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어둠은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는 빛의 양보다는 지속적인 공급이 더 중요하다.
어둠은 어둠으로 이길 수 있는게 아니다.
어둠은 빛으로 이긴다.
문제는 얼마나 오랫동안 빛을 비출 수 있는가에 있다.

- 2007년에 썼던 글

삶의 하나님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이 생명은 단순히 목숨만을 뜻하지 않고
삶 전체를 의미한다.
호흡과 동시에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 살아감을 삶이라 한다면
생명은 삶과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대립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죽으면 할 수 없는 모든 일들,
즉  살아있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내 삶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을 생명(삶)의 하나님이라 할 때,
하나님은 내 개인의 소망을
우선적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생명(삶)을 먼저 고려하시는 분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주장하시고
그것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그 분의 뜻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 소망이
내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우주적 삶의 균형에 위해를 가하는 류의 것이라면
하나님은 내 소망을 이루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럴 경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것이 아니라
내 기도가
우주 전체의 생명(삶)의 조화를 깨뜨리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내 생명 내 삶이 귀하다면
다른 사람의 삶 역시 귀한 법이다.
생명에 대해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잘아는 존재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생명들이 이루어가는 삶에 대해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있겠는가?

생명과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생명의 하나님은 삶의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도 되시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삶의 주인도 되신다.

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내 삶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의 뜻에 일치하는 삶이 되길 바라실 것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인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죽었을 때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 뜻, 내 욕심만 추구하고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주시겠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살아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삶의 하나님이시다.

- 2008년 10월에 썼던 글

Friday, October 16, 2015

주님의 것

노인들을 돌보며 나는 내 노년을 당겨살아 볼 기회를 얻었었다.
가끔 머리 속으로만 그려보았던 노년을 직접 눈으로 손으로 경험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고, 외롭고, 갑자기 죽고 하는 모습들을 2년간 보았다.
원래 욕심이 없던 나지만 노인들과 지내다 보니 더 욕심이 없어졌다.

내 눈에 노인들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던지 돈이 얼마나 있던지간에 다 같아 보였다.
아기들이 다 같아 보이듯, 노인들도 다 같아 보였다.
나도 40년 후엔 저렇게 될 것이었다.

바닷가 저택에 살든 시내의 정부 아파트에 살든 달라 보이지 않았다.
박사 학위자건 고졸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집이 네 채건 한 채도 없건 다들 같아 보였다.
심지어 자식이 있건 없건 배우자가 있건 없건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차이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한 사람의 노인으로서 그들은 다 같은 존재였다.
오랜 세월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은채 살아온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노인이 되면 모든게 없어진다.
건강도 가족도 친구도 다 없어진다.
생각해보면 원래 없던 것들이다.
잠깐 내 곁에 있었을 뿐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건강이든 돈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내 곁에 머물러 있었을 때 잘 지내고
떠날 때 잘 보내주면 된다.
그리고 그냥 주님 만날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원래 내 것은 없지만 나는 본래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Thursday, October 15, 2015

신앙 언어

고민이 많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어서 왔다.
그런데 이들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맞나하는 생각이 든다.

강도 만난 유대인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
자기가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나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왜 하필 꾸띰(사마리아인을 이르는 경멸적 표현)이 나를 도왔어.. 재수없게..'
이러지 않았을까?

나는 그들과 다른 크리스천이다.
나는 지금 그들의 '신앙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
내 말을 하고 싶지만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기에 나는 내 말을 못하고 있다.
내 언어를 가르칠까하는 생각도 있지만,
그들의 언어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내 언어를 억지로 가르치고 싶지는 않다.
나야 스스로 그 언어가 불편해져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되었고
이제는 옛 언어가 불편해졌지만,
그들은 아직 그들의 언어에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을 모셔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들 중에
이 곳에 오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여, 사마리아인인 나는 유대인인 저들과 동거를 해야 할 상황이다.
내가 다시 유대인이 될 수는 없으니 저들을 사마리아인으로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렇게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며 지내야 하나..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 8:48 - 49)"

Wednesday, October 14, 2015

차원

예수님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차원'이다.

세상성

모세가 싸우기 어려웠던 대상은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아니라 자기 동족들이었다.
더 정확히는 자기 동족들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집트성'이었다.
자유를 얻었음에도 그 자유에 감사하지 못하고,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던 히브리인들.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그들에게서 '이집트성'을 벗겨내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노력하셨던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세상성'은 또 어떤가..
서로 나누기보다는 더 많이 가지려는 자세, 나/내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태도, 나 중심성,
끝없는 소유 지향성...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도 모르고
아직도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님이 살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윗 같은 왕을 원했다.
주변 민족들을 다 없애고 자기들 만의 나라를 완성시켜줄 왕을 원했다.
예수님은 그런 왕이 되길 거부했다.
하나님의 마음은 유대인들의 바람과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세력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근원부터 위협하는 예수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예수를,
결국 죽이고 만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오늘도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아닌
예수를 죽인 세상 권세와 그들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이보다 아이러니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Friday, July 10, 2015

성경이 말하는 시험

성경은 우리 삶에 닥친 어려움들을 하나의 시험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냥 힘들고 어렵고 짜증나는 일이 아닌
하나의 시험으로 받아들이라고..
그 시험의 의미는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이 아니라
오히려 "도전"에 더 가깝다.
나를 한계상황까지 밀어붙여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하는,
'내가 40 Kg을 들 수 있을까?'
도전하고 시험해 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시험은 때로는 인생의 시련으로 때로는 유혹으로
그리고 많은 경우 둘 다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련은 견디면 되고,
유혹은 물리치면 된다.
그것이 시험인 한 언젠간 끝날 것이다.
그리고 시험을 마치면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다시 기초부터 다져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훈련을 해야할 지를..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참 하나님의 모습을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도전의 목적이다.

Tuesday, June 30, 2015

청빙을 수락하다

4년만에 다시 목사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무 연결고리가 없을 것 같았던 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선으로 연결이 되더니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작은 도시의 작은 교회다.
그 그림 속에 이미 내가 들어있었다.
하나님은 역시나 나를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주도면밀.
하나님께 붙여드리고 싶은 수식어다.

Thursday, June 25, 2015

바울사도에게 배우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있는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신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고전 8: 9 - 13)."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고전 9: 19 - 23)."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어 눈높이를 맞춰주는 것,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들은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그 약한 신도들을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 분의 종이라는 사람이 눈높이를 맞춰주는 것도 못하겠다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Thursday, June 11, 2015

이상과 현실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을 돌파해나갈 자신이 있는가?

지금 나에게 이상은 창인가? 방패인가?

지금은
이상을 창 삼아
현실이라는 방패를 뚫어낼 때인가,
이상을 방패삼아
현실이라는 창을 막아낼 때인가..

타협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어디까지가 마지노선인가..

천생 목회자

요즘 이곳에서 차로 세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시골 도시를 주일마다 방문하고 있다.
그곳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설교 부탁을 받은 덕이다.
프로그래밍 공부는 그래서 다시 뒤로 밀려났다.
프로그래밍 공부와 설교 준비가 겹치면 나는 완전히 설교 준비쪽으로 기울어버리고 만다.
천생 목회자다.
자바와 C# 공부에 탄력이 붙을 즈음이었는데, 내 마음 속에서 그녀석들은 이미 골방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는 가끔 문을 열어서 대면을 하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올초에 한번 홍역을 치렀던 탓에 이번 기회가 또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약 그 교회에서 나를 부른다면 가야하지 않을까 한다.
좀 크고 기반이 잡힌 교회라면 내가 갈 필요가 없겠지만, 이제 막 시작하는 교회고 성도수가 얼마되지 않는 교회이기에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 같다.
목회자의 삶에 정착이 어디 있겠는가.
작고 약한 교회가 부른다면 언제든 가야할 것이다.

Friday, May 29, 2015

나는 희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라는 가게는
가게 주인의 아버지가 돌아오실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만 존재 근거를 갖는다.
그 희망이 있는 한 가게 주인인 아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가게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이 사라지면,
아버지가 돌아오실 것이라는 믿음이 꺽이면,
'꽃분이네'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 희망은 주인공이 현재의 어려움들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고,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이기도 하고,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희망이 현재를 지배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
신앙의 존재 근거도 사라지고, 믿음도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여전히 오고 있는가.

Thursday, May 14, 2015

미국 교회도 교인 감소 추세

최근 발표된 퓨리서치의 연구 결과를 보면 미국도 점점 교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미국의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교인 숫자의 감소 이유를 이혼으로 인해 온전한 기독교 가정의 수가 줄어드는데서 찾기도 한다. 신앙인 부모의 이혼을 일찍 경험한 아이들은 부모와 부모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들도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곳 뉴질랜드 목사들이나 예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독일 목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서양 사람들의 경우 기독교 전통이 대를 이어 계속되다보니 기독교 가정의 감소나 아니면 전체적인 출산율 저하로 인해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볼때 그들의 이야기는 전혀 생뚱맞게 들린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 세대의 크리스천들은 대개가 전도에 의해 크리스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도 다들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서 유대인으로 자라다가 기독교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는가. 내가 볼때 크리스천의 숫자가 줄어드는 이유는 예전처럼 전도가 안되기 때문이고, 전도가 안되는 이유는 교회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더이상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데 있다. 이천년전 유대인들에게 복음이었던 그 소식이 현대인들에게는 복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라면 그 소식을 듣고 기뻐야 하는데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 기쁜 소식이 현대의 상황에 맞추어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그래서 그 소식을 듣는 현대인들도 그 소식을 말 그대로 "굿뉴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Sunday, May 10, 2015

무너지는 교회들

집 근처에 세 개의 교회가 있다: 구세군, 앵글리칸, 침례교. 
구세군 교회는 예전에 방문했었고, 오늘 다른 두 교회를 방문했다. 
원래 계획은 집에서 더 가까운 앵글리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지만, 
막상 그 교회에 가 보니 영어 예배는 없었고 사모안(Samoan) 예배만 있었다.

사모안은 전혀 모르는 언어라서 어쩔 수 없이 그 교회를 나와 근처에 있는 침례교회까지 걸어갔다.
그런데 침례교회에는 아예 오전 예배가 없었고, 오후에만 사모안 예배가 있다고 교회 게시판에 써 있었다.
일전에 방문했던 구세군 교회도 거의 다 사모안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동네에 키위들이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없다는 말이 된다.

한 해 전쯤인가 근처에 있는 장로교회가 문을 닫았는데, 실은 앵글리칸이나 침례교회도 문을 닫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 교회를 소수의 사모안 사람들이 대체하고 있었다.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수많은 키위들 중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뉴질랜드에서 교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오늘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가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현상, 교회 재정이 투명하게 관리되고, 소외된 이웃을 돕고, 바른 설교를 해도 비어가는 교회당을 보면 도대체 이 흐름을 어떻게 뒤집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도미노처럼 교회가 무너져 가는데 무엇으로 이걸 막을 수 있을까.

이민자 그룹 교회들이 어느 정도 속도를 늦춰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민자 교회에 키위들이 가지는 않으니.. 키위들을 교회로 다시 불러들일 방법이 있을까..
내 아들이 이 나라에서 살게 된다면, 아이에게 크리스천 친구들이 얼마나 될까..

Tuesday, April 28, 2015

파란 트럭

처음 이 집으로 이사왔을때 만났던 이웃집 아이 엄마가 있었다.
바로 옆집은 아니고 몇집 건너 사는 분이었는데, 첫인상이 좋았었다.
처음보는 우리에게 전화번호도 주고 아이들도 같이 놀게하자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 후로도 가끔 오가며 안부도 묻고 그렇게 좋은 이웃으로 지냈다.
둘째를 가져서 배가 불러오는 모습까지 보았고 곧 아이를 낳을 거라 했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이웃에게서 그 아이 엄마가 둘째를 낳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는 살았지만 엄마는 죽었단다.
남편에게 세살짜리 딸 그리고 갓난아기를 남기고 말이다...
아이 아빠에게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며칠째 그 친구의 파란 트럭이 길가에 그대로 서있다...

Saturday, April 18, 2015

갑작스런 부고

A는 내가 돌봐드리는 분들 중 가장 젊은 남자였다.
55년생이었으니 올해 만 60세가 될 참이었다.
한때 유능한 프로그래머였던 A는 프로그래밍 공부를 해볼까 말까 망설이던 나에게 적극적으로 공부하기를 권유하곤 했었다.
A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는데, 젊었을 때 이미 파킨슨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후로 서서히 증세가 악화되어 점점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들어졌고 말도 어눌해졌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혼자서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을 수 있는 정도였고,
같이 사는 친구와 함께 여행도 다닐 정도의 움직임은 가능한 분이었다.
어제 아침에 만났을 때도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월요일에 보자는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그런데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되었다.
좀 전에 A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1년간 매주 세 번씩 보던 분을 다음 주부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주엔 호주에 사는 A의 누나가 와서 집안 청소도 해주고 새로 살 소파도 알아봐 주고 했었는데, 그 누나도 그 방문이 마지막 방문이 되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의 갑작스런 이별이 반복되니 죽음이 정말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목숨, 숨이 붙어있는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돕고, 더 많이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곧 사라지고 말 목숨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말이다.

Thursday, April 9, 2015

부활

누에는 나비가 될 수 있지만 모든 누에가 나비가 되지는 않는다.
고치를 만든 누에만이 나비가 된다.
누에는 고치 속으로 들어가 그 어둠 속에서 누에의 삶을 끝내야 한다.
누에라는 삶의 형태와 단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비라는 변화, 나비라는 새생명, 나비라는 부활은 그때서야 가능해지는 법이다.


소명

소명을 시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벌이와 상관없이 그 일을 하고 싶은가이다. 돈을 못벌어도 그 일을 하는 것이 좋다면,  그 일이 소명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그 일로 부르신 것이다. 소명이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한다. 가령 연극 배우가 소명인 사람은 연극을 계속하기 위해 다른 일로 생계를 해결한다. 물론 소명으로 생계가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목회가 소명이다. 지금은 목회사역을 거의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그 쪽에 가있다. 목회를 통해 생계가 해결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할 상황에서 나는 목회를 계속하기 위해 돈을 벌 수 밖에 없다. 생계 유지라는 가장으로서의 의무 역시 무시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교회나 가서 목회를 하고 싶지는 않다. 목회는 내 소명이고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생계 해결을 위해 신앙 양심을 팔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십자가를 내려 놓고 있는 느낌이다. 그 길을 여전히 걷고는 있지만 십자가를 직접 지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동안 잠시 십자가의 무게에서 벗어나 있었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편하지는 않다. 신앙의 동지들이 내 십자가까지 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내 십자가를 돌려받아야 한다. 언제,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때까지 몸은 편하다해도 마음까지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Wednesday, April 1, 2015

컴퓨터 공부

소프트웨어 개발과정을 공부하다 보니 이제까지 공부해왔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내가 해왔던 공부는 주로 신학과 인문학이었고 거기에 사회과학을 어느 정도 거쳐 본 정도였다. 지금하고 있는 컴퓨터 공부는 인문학과 상당히 다른데,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아마도 '해석'의 유무일 것이다. 컴퓨터는 해석이 발 붙일 틈이 없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서도 안된다. 그냥 논리대로 절차대로 가장 단순하게 풀어나가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할까, 저런 방식으로 할까'는 고민해도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인문학 공부할때 단어 하나의 의미를 곱씹고 또 곱씹어보던 그런 시간은 필요치 않다. 깊이가 사라지고 평평함만 남았다고 할까.. 영혼이 사라지고 몸만 남았다고 할까..  왠지 삶이 메마르고 건조해지는 느낌이다.

Saturday, March 14, 2015

뉴질랜드 여행

약 2 주일간 한국에서 놀러온 친구와 함께 북섬의 카이타이아와 남섬의 넬슨 지역을 여행했다.






북섬 북단의 깨끗하고 푸른 바다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40센티, 60센티 크기의 싱싱한 자연산 도미를 잡았다.


뉴질랜드 최북단 땅끝인 Cape Reinga에 가서 등대도 보고 태평양과 타즈만해가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하얀 와류도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90 마일 해변에서는 모래 밑으로 밟히는 것이 조개였다. 저 드넓은 해변에 가득찬 조개들이라니..
바닷가 바위에는 싱싱한 그린 홍합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홍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였다.
남섬의 아벨 타즈만 국립공원 내에 있는 토타라누이 해변.

Monday, February 23, 2015

신비체험

국민학교(초등학교) 5 학년 때였다.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고 저녁 예배 후 통성 기도 시간에 갑자기 말이 꼬이기 시작하는 경험을 했다. 그 당시 내가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에서는 딱히 특별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던 방언이라는 은사를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난생 처음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단절적으로 나오던 이상한 말이 계속 기도를 하는 중에 일종의 언어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희열이 있었다. 나도 방언을 받았구나 하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내게 잊을 수 없는 신비체험은 방언이 아니고 정작 그 이후에 경험했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학교까지 약 2 km, 왕복 4 km를 걸어다녔다. 집에서 출발하여 논두렁 길을 거치고 강가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학교까지 걸었는데, 매일 보던 그 길, 그 산, 나무, 풀, 꽃, 염소, 개구리, 벌, 나비 등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생함이 느껴졌고, 세상이 너무너무 아름다워보였다. 그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감이 나를 휘감았고, 그 상태가 며칠간 계속 되었었다. 방언도 좋았지만 그 이후 내가 경험했던 그 새로운 세상과 행복한 상태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이었다. 벌써 30년이나 지난 일이라 더 세밀하게 묘사를 할 수 없기도 하지만, 설령 지금 그 체험을 다시 한다해도 그 체험을 글이나 말로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내가 했던 신비체험이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 계열의 책들을 읽어보면 나와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꽤 많다. 나보다 훨씬 강렬한 체험을 하신 분들도 많이 있고.. 신비체험은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해준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 내가 세상을 경험해 오던 방식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나와 자연, 나와 타자를 가로막고 있던 그 무언가가 사라진 세상, 질적으로 전혀 다른 변화된 세상이 가능한 것이다. 나와 네가 남이 아니고 나와 자연이 충만한 생명으로 하나가 된 그런 세상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세상이 하나님 나라의 한 측면일 것이다. 지금은 순간으로 밖에 경험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언젠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우리는 내가 잠시 체험했던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답답한 이 세상에서 그런 세상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Friday, February 6, 2015

다시 제자리로

일이 있다고 이른 새벽에 전화가 와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아침밥 먹고 나가려는 순간
일이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기분이랄까..
약간 허탈하면서 오히려 잘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다시 본래 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휴식 기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쉬는 시간을 쪼개서 설교 준비하느라 쉴틈이 없었는데, 이제 다시 여유를 찾게 되었다.
교회를 개척해 본적이 없는 성도들은 그게 쉬울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교회는 조직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찌 됐든 자원봉사 모임이기에 조직원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요인들이 없다.
물론 제도권 교회에 그런 통제의 기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술들을 사용한다면 그건 교회의 바른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런 기술들을 사용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자유로운 만큼 성도들도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런 자유가 싫다면 나도 어쩔 수 없고..
몇 주간 교회 모임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번 일이 겸손과 헌신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기도해본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Tuesday, January 20, 2015

자기 신앙의 절대화

신앙이 하나님과의 주관적 관계라면 신학은 이러한 관계를 객관화시키는 작업이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자기 신앙이라는 주관적 영역에서 벗어나 공적이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신학의 영역에서 자기 신앙은 상대화된다.
예를 들면 내 애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믿던 한 남자가 미인대회에 출전한 그 애인을 지켜보는 경우라 할 수 있는데, 객관적인 미의 기준으로 봤을 때 자기 애인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커녕 순위에도 못드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격이다.
자기 신앙이라는 작은 영역에서 경험한 하나님 체험이나 성경 이해가 자기에게는 절대적일 수 있겠지만 신학의 장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지난 2천년간의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 객관화 작업을 거치는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잃거나 아니면 신학을 거부하고 자기 체험을 절대화 시키는 쪽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지금 목사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어려운 신학 작업을 통해 자기 신앙이 해체되고 재확립되는 과정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물론 모든 목사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많은 좋은 목사들이 이 과정을 치열하게 겪어내었다고 믿고 있다.
이 과정을 겪어낸 목사들은 성경에 관한 '신앙적' 질문에 '신학적' 답을 요구하는 성도에게 쉽게 답을 주지 못한다.
해는 산에서만 뜬다고 믿는 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도 뜬다고, 아니 더 정확히는 해가 뜨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신학 공부를 하는데 시간을 투자하려 하지 않고 쉽게 답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쉽게 답만을 주면 안색이 변한다. "내 애인이 안예쁘다고요?"
그래서 목사는 쉽게 답을 주지 못하고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함께 고민해보자고 하지만 대개의 성도들은 또 그런 목사도 못마땅해 한다.
자기 신앙은 소중하지만 그것을 절대화시켜서 자기 신앙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교회 모임을 시작하다

조용히 내 할일만 하고 있던 나를 인터넷으로 찾아낸 분이 있었다.

그분의 요청으로 이곳 한인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몇몇 분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어느 가정집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1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 모임이 전개될지, 좀 더 사람들이 많아져서 공식적인 교회 모임이 될지 아니면 이렇게 비공식적인 교회로 계속 가게될지 두고 볼 일이다.

이곳에 있는 세 곳의 한인 교회에서 사람들을 잘 섬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처럼 별 볼일 없는 목사를 찾아낸 걸 보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이 이곳에도 있었던 모양이고, 하나님도 이제 나에게 일 좀 시켜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성도의 요청이 있으면 가던 길을 멈추고 말씀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게 목사의 숙명이다. 내 계획이 틀어질 때 그 때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순간 아니겠는가. 나에게 맡겨주실 양이 있다면 하나든 둘이든 맡아야 할 것이다. 매일 틈틈이 설교 준비하느라 바쁘다. 오랜만에 설교 준비를 했는데, 생각보다는 녹이 많이 슨 것 같지는 않았다. 감사한 일이다.

Monday, January 12, 2015

상처 많은 사람들

이곳에도 역시나 목사나 교회로 인해 상처받은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그분들을 만나보니 나도 참 힘들었다. 목사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내가 할 말이 무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를 부른다면 그들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는 법. 그것이 목사의 운명아니겠는가. 때로는 의도와 상관없이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주님의 양을 돌보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

상처의 관점에서 인간관계를 본다면 인간 관계는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이다. 대개의 경우 의도치 않게 상처가 발생하는데, 이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상처에도 꽤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는 사람도 있고 사고 이후로 운전대를 잡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면의 상처에 민감한 사람들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고, 행동 하나에도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

아내는 선천적으로 혈소판 수치가 낮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충격에도 멍이 쉽게 들곤 한다. 그것 때문에 아이를 낳을때 고생을 좀 하기도 했다. 이 증상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냥 남들보다 조심하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 반면 조금 조심하며 살면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는 증상이기도 하다. 문제는 멍이 잘 드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멍이 잘 드냐며 타박하는 사람이다. 멍이 들고 싶어서 드는 게 아니라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데 말이다.

상처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조건 지워졌을 수도 있다. 그 조건을 바꿀 수 있으면 바꾸면 좋지만, 못 바꾸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별거 아닌 일에도 상처를 받느냐고 타박하면 안된다. 그냥 좀 조심스럽게 대해주면 되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했는데도 상처가 나면 그런 부분은 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이라고 아예 만나지도 않으려고 하면 그 사람은 어찌 살아가란 말인가..

돌이켜보면 내 주변에도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분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었고 거기에 오해까지 덧붙여져 일어난 일이었지만 인간 삶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 할 것이다. 의도하셨던 그렇지 않으셨던지 간에 예수님의 말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았겠는가(바리새인, 서기관,부자 청년, 가나안 여인..).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이 무서워서 무슨 일을 안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혜롭게 상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 나가는 게 내가 선택해야할 삶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Friday, January 2, 2015

2015년

2015년 1월 2일이다.
새해 첫날은 가깝게 지내는 한인 친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보냈다.
여름에 맞는 새해가 올해로 네번째인데, 아직도 새해 기분이 그리 많이 들지는 않는다.

작년 한해는 아무런 계획없이 시작했던 해였다.
그래도 일 년간 할아버지 할머니들 섬기고 프로그래밍 공부도 시작하고 아이도 보며 바쁘게 지낸 것 같다.
안타까운 일로 한국을 한번 방문하기도 했고..

올해는 한가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다.
연말까지 프로그래밍 과정을 끝내는 것이다.
현재 속도를 계속 유지한다면 올 해 안에 이 과정을 마치는데 어려움은 없을 듯 싶다.
그 외에 노인들 돌보는 일도 계속 할 것이고
교회일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긴 하지만 계속 할 것 같다.

아들은 올 8월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거고..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기어다니던 아이가 벌써 만 다섯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이렇게 크는 동안 난 뭘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쨌든 올 한해도 조용히 시작되었다.
날씨는 좋고, 집 앞 바닷가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느긋하다.
길 건너면 바다인데도 아직 바다에 한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다.
이번 여름에는 한번 들어가 볼까?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