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9, 2014

하나님의 뜻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을 보면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예루살렘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예루살렘을 차지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건물을 크게 짓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당을 크게 짓는 것과도 상관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돈, 권세, 명예를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과도 상관이 없다.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치셨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다이다. 이웃은 진정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고 사랑은 그들을 위해 내가 가진 것(그것이 돈이든, 재능이든, 힘이든, 목숨이든..)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 외의 것들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 그냥 내 뜻이고 네 뜻이다.
그러니 그 외의 것들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걱정하지 말라.
자신의 소신을 따라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해라.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만 지면 된다.
선교지를 어디로 정할까요? 가고 싶은 대로 가라.
대학을 어디로 갈까요? 성적과 적성에 맞춰서 가라.
하나님은 당신이 어느 선교지로 가든지, 어느 대학으로 가든지 신경쓰지 않는다.
단, 그곳이 어디든 거기에서 이웃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지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다.

Saturday, December 27, 2014

2014 크리스마스 묵상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회 근처 양로원과 노인들 가정을 방문해 캐롤과 찬양을 불러드리는 교회 행사에 참여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80대 후반의 할머니에게 이 교회에서 이런 행사를 몇 년간 해오고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근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20년간 꾸준히 이런 봉사활동을 해오다니.. 외국에 그래도 10년넘게 살고 있어서 이런 일에 익숙할 만도 됐건만, 아직도 이렇게 꾸준히 좋은 일을 해오는 사람들을 만나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아들도 이 행사에 같이 참여시켰는데, 성탄절이 산타나 선물이 다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 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분의 가르침과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실천에 옮기는 날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이라기 보다는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 기념의 방식은 서양식의 생일 파티보다는 한국식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생일에 서양 문화권에서는 생일자에게 케잌과 선물을 주며 축하하는 전통이 있다. 반면, 내가 어릴 적 우리나라에서는 생일이 되면 아침에 어머니가 끓여 주신 미역국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어릴 때는 그 미역국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왁자지껄한 서양의 생일 파티보다는 생일 아침 어머니가 차려 주신 아침 밥상이 훨씬 그립다. 그날은 어머니와 나에게 가장 의미있는 날이 아니겠는가. 어머니가 드셨던 미역국을 내가 먹으며 어머니를 기억하고 나를 낳느라 애쓰신 어머니께 감사하고 효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선물과 파티에 우선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 난 그 분의 어머니도 아니고 동시대의 형제나 친구도 아닌 2천년 후의 제자에 불과하지만 그 분의 생일을 기념한다면 난 한국식으로 조금은 차분하게 그 분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 분의 삶을 기리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방식으로 기념하고 싶다. 이 교회가 하고 있는 노인 방문이 단지 일회성일지라도 그것이 20년간 지속된 일회성이라면 이미 그것은 일회적이지 않은 것이다. 일년에 한번인 크리스마스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때 마다 예수의 정신이 나눔을 통해 새롭게 일깨워질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하나의 이벤트라기 보다 하나의 이정표로서 우리 인생길에 꼭 필요한 표지판이 될 거라 믿는다.

Saturday, December 20, 2014

40대도 좋은 나이다

삶이 아주 단순하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올 한해도 다 지나가고 있고 또 다른 한 해가 오고 있는데,
별 다른 감흥이 없다.
오전에는 노인들을 돕는 일을 계속 하고 있고,
오후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우고 있다.
잘되면 나중에 IT쪽에 일자리를 잡을 수 있을거고,
안되면 그냥 컴퓨터에 관련된 지식을 얻는 것으로 끝날테고..

노인들과 자주 만나다 보니 삶에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다.
그들의 관점으로 내 삶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나보다 40살은 더 많은 분들의 각양각색의 인생 이야기를 듣다보니
지금 내 나이가 마치 어린아이의 나이처럼 느껴진다.
나보다 40살 어린 아이를 보면 얼마나 즐겁고 편안해 보이는가..

80대 노인분들의 눈에는 나도 얼마나 어리게 보이겠는가.
그 분들에게는 내 나이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젊은 나이인 것이다.
나 자신을 그 분들의 위치에 두고 지금의 나를 보니,
또는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니,
지금 내 나이가 너무도 좋은 나이인 것이다.
60세에 수영을 배우고, 82세에 컴퓨터를 배우신 분이 있는데,
나에게 늦은게 뭐가 있겠는가..

Saturday, December 6, 2014

"미생"을 보며

요즘 드라마 "미생"을 보고 있다.
드라마를 보니 예전 직장 생활을 했을 때가 생각난다.
신학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나는 총 네 군데 회사에서 일을 했었다.
두 곳은 대기업이었고, 한 곳은 중견기업, 또 한 곳은 벤처기업이었다.
원래 회사 생활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정형편상 어쩔 수 없이 직장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형편이 괜찮았으면 아마도 대학 졸업 후 바로 신대원으로 갔을 것이다.
본래 조직 생활과 경쟁을 싫어했던 내게 회사는 참 힘든 곳이었다.
군대 같은 조직문화에 내/외부 경쟁까지 했어야 했으니 말이다.
회식 문화도 맞지 않았고..
그래도 그 때의 경험이 성도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성도들에게 나는 소위 말이 통하는 목사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신대원에서 공부할 때 직장경험이 전혀 없었던 동기들과 얘기할 때면
나 조차도 답답함을 느꼈는데, 일반 성도들이야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네, 네 하고 말지... 딱히 할 말이 있겠는가...
직장생활에 대해서 모르면 잘 듣고 공감하며 그들에게 배우면 되지 않겠는가.
잘 들어주는게 간섭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때가 많은데,
그게 잘 안되는 목사들이 꽤 있지 싶다.
직장 생활도 힘든데 신앙 생활까지 힘들게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힘내시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Wednesday, November 12, 2014

영어로 즉시 말하지 못하는 이유

오늘 상당히 구체적인 주제를 가지고 키위들과 갑자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영어로 말을 능수능란하게 잘 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떠오르는 생각들을 즉시 영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버벅거리던 와중에 문득 드는 생각이 
내 영어가 아직도 너무 추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영어 단어와 표현들이 대부분 일상에서 습득된 것이 아니라, 
책이나 사전을 통해, 구체적인 물건과 상황을 통과하지 않고 
직접 내 머리 속으로 입력되어졌기 때문에, 
어떠한 실제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영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마치 영어가 내 몸이나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알고 있는 영어는 모두 현실이 아닌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얻은 영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어를 일상의 상황에서 얘기하려면, 
내 머리 속 추상의 세계에서 단어들을 찾아서 일상으로 끌고 내려와야 한다. 
당연히 시간이 걸리고, 즉각적일 수 없다. 

감각을 통해서 말을 배우지 않으면 말의 토대가 없는 것과 같다. 
내 몸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을 영어와 밀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어를 즉각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영어를 바로바로 말 할 수 있으려면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영단어와 표현들을 
구체적인 사물과 환경에 확고히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렌 켈러가 말을 배우듯, 아이들이 말을 배우듯 말이다.

Thursday, November 6, 2014

내가 할 수 있는 효도

노인들은 갑자기 돌아가신다.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노인들이 일곱 분인데 벌써 두 분이 돌아가셨다.
헤어질 때는 그 날이 마지막인 줄 몰랐었는데 다음 주에는 뵐 수가 없었다.

지난 번에 돌아가신 분은 혼자 사시는 할머니였다.
그 날도 평상시처럼 방문을 했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뜬금없이 단골 빵집의 빵이 드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에게서 그 빵집의 위치가 어딘지 듣고,
그 곳까지 찾아가서 빵을 사다 드렸었다.
그 날이 그 할머니와의 마지막이 될 줄 그 때는 짐작도 못했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호주에 사는 할머니 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께서 내가 빵을 사다준 일을 여러번 얘기하며 고마워 하셨다고 했다.

오늘 돌아가신 분은 할아버지와 함께 사시는 할머니였다.
지난 주에 방문했을 때 할머니가 안계시길래 어디 가셨냐고 할아버지께 여쭸더니,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병원에 실려가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년전에 사고로 다리를 다치셔서 의족을 하고 계신데,
할머니가 병원에 계신 동안 집안에서 넘어지셨단다.
''아, 글쎄, 거실에서 넘어졌다가, 일어나는데만 2시간이 걸렸지 뭔가''라며
헛웃음 속에 말씀하셨다.
이제 정말 할머니도 안계신데, 어떻게 살아가실까 걱정이다.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해야 한다.
이제는 나도 될 수 있는대로 한국 방문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 나이 또래의 분들이 저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찾아뵙는 것이,
지금 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이지 싶다.
비행기표 사는데 돈을 다 써서, 막상 한국에 가서는 부모님 집에서 뒹굴다 온다고만 해도,
그 편이 돈 몇 푼 모은다고 얼굴도 못보며 사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Tuesday, October 28, 2014

크리스천에게 행복이란

글쎄..
행복이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주관적인 내면의 상태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특히나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행복은 한번도 우리 삶의 목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예수를 따르거나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안에 있으면 이미 행복한데 무슨 행복을 찾는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행복은 내가 추구하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happiness)이라는 말보다는
복을 받았다(blessed)는 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노력해서 행복하다기 보다 하나님의 노력에 의해서 복을 받았기에 행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초대받았다면,
그런 복을 받았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고 제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것이다.
그런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으로 작동할 때만이,
우리는 행복이 삶의 목적인양 부추기는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내가 치매에 걸리면

아내가 나중에 자기가 치매에 걸려서 남편도 못알아보면 어떡할거냐고 한다.

"어떡하긴... 다시 꼬셔야지" 했다.

Saturday, October 18, 2014

하나님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말은 물고기가 속에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
물고기는 속에서 살고 물과 분리될 없지만 물은 물고기보다 크다
하나님은 우주와 없는 관계에 있지만 우주보다 실재이다
물이 사라지면 수중 생태계는 멸망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라지면, 일을 멈추면, 창조를 그치면, 우주는 멸망할 것이다
우주는 순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언어로 표현 것인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나는 나다'라고 이해했을
이해는 하나님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언어로 부를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일 , 외의 어떤 설명도 적확할 없다."

Marcus Borg, Speaking Christian: Recovering the lost meaning of Christian words, 2011

Thursday, October 2, 2014

신장결석

출근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오른쪽 하복부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과 함께 점점 통증이 심해져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계속 심해지길래 아내에게 구급차를 부르라고 했다. 구급차 내에서 진통제를 맞았는데도 통증이 가시지 않다가 응급실에 도착해 몰핀을 맞고서야 통증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맹장이 아닌가 했는데, 의사가 Kidney Stone(신장결석)이라고 했다. 통증의 강도가 산통과 비슷하다고 했는데, 확실히 예전에 대상포진을 앓았을 때 느꼈던 통증보다는 더 셌던 것 같았다. 여태 경험했던 통증 중에 가장 큰 통증이 아니었나 싶다.

통증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온몸의 근육이 수축되면서 숨을 내쉬기가 어려웠다. 숨을 내쉬려면 근육을 이완해야 하는데 그러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옆에서 숨을 쉬라고 다그치는데… 그런데 그 순간, 산소 포화도가 뚝 떨어지던 그 순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편안했다. 그냥 이렇게 숨을 안 쉬고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멎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다시 숨을 쉬어야 했다. 신장 결석으로 죽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어쨌든 묘한 경험을 했다. 인생이란 숨을 쉬면 사는 것이고 숨이 멎으면 죽는 것인데...이렇게 나약한 존재가 인간인데... 뭘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살려하는지... 이번에 뉴질랜드 의료 시스템의 혜택을 톡톡히 봤다. 미국이었으면 꽤 많은 의료비가 지출되었을 텐데, 뉴질랜드에서는 무료였다. 물론 세금을 더 내기는 하지만, 어쨌든 세금이 제대로만 쓰인다면 사회는 훨씬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의료비 걱정만 없어도  얼마나 부담이 덜한 사회겠는가.

(나중에 알고 보니 숨을 안 쉬는데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몰핀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몰핀이나 펜타닐 같은 오피오이드 계열 마약성 진통제에 이런 부작용이 있다고 한다. 마약은 숨을 안쉴 때 느껴지는 고통마저 무화시키는 무서운 힘이 있는 물질인데 이런 위험한 물질을 의료계 바깥에서 만들고 유통시키는 자들이 있다니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가) 

Wednesday, October 1, 2014

하나님의 심판?

범죄를 저지른 목사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옳다. 당신의 전체 인생에 대한 최종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사람이 어찌 사람의 인생 전체에 대한 심판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신의 범죄, 이미 드러난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법 기관이 해도 된다. 사법 기관은 그런 일들을 처리하도록 만들어진 단체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당신의 범죄에 대한 처벌을 받으라. 그런 정도의 판단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해도 된다. 괜히 하나님 이름까지 끌어들여서 다른 크리스천들까지 난처하게 하지 마시라.

Monday, September 29, 2014

섣부른 판단

해변가 고속도로를 지나다 한그루의 나무를 본적이 있다. 그 나무는 바람이 불어 미는 방향을 따라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친채 마치 반쪽 짜리 나무 마냥 서있었다. 그 세찬 바람을 이겨내며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기형적인 모습으로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환경을 무시하고 단지 나무 자체만을 정상/비정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 나무는 틀림없이 비정상적인 나무라는 판단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무가 자라온 환경을 놓고 본다면 아무도 그 나무의 모습을 비정상이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산 속에서 고이 잘 자란 나무들을 기준으로 볼 때는 비정상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그 나무는 해풍이 늘상 몰아치는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가 일반적인 나무처럼 양쪽으로 가지를 뻗친 모습을 고집했다면 그 나무는 이미 그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이 어떤 환경 속에서 자라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지 보이는 모습,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잠깐의 경험 만을 근거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 사람의 뒤편으로 수십 년의 모진 세월이 보이지 않는가... 말을 이상하게 하고 성격이 괴팍하다고 해서 몹쓸 사람이라 쉽게 단정짓지 말라.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얼마나 세찬 바람이 그의 삶을 흔들어 왔는지, 그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쳐왔는지 들어보라. 판단은 그 후에 내려도 되지 않겠는가..

Saturday, September 20, 2014

과학과 신앙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해도 과학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해나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을 통해 자연의 법칙들을 발견해나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간다는 보장은 없다.
과학을 다루는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인간의 내면을 고양시킬것인가.
인문학, 예술, 종교 외에 인간의 내면을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과학, 중요한 도구이긴 하지만, 그것이 진리도 아니며 선도 아니다.
호트의 지론처럼 과학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유용한 기초 조건일 뿐이다 (John F. Haught, Science and Faith: A New Introduction).
과학을 통해 자연의 메커니즘이 새로이 발견되면 신앙 역시 더 깊어지고 다채로워질 수 있다.
신앙은 과학의 대상인 자연과 물질 현상을 해석하여 과학이 전제하지 않는 영적/내적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 돕고 되먹이며 더 깊고 넓은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가는 동반자이다.

Saturday, August 30, 2014

하나님의 실체?

도킨스를 비롯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초자연적 인격신"에 칼을 겨누었지만, 진보적 현대신학의 신이해는 이미 그러한 신이해를 벗어나 있기에, 많은 진보 그리스도인들에게 도킨스의 칼은 예리하기는 하나 허공을 가르는 칼 밖에 되지 못한다.

나는 신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신이 사람처럼 생겼고 직접 말을 한다는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신 이해에 온전히 매여있지는 않다. 물론 대화를 하려면 그 무엇이든 무생물이든 동물이든 인격화 할 수 밖에 없으니 그런 목적으로 인격화된 신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신이 실제로 인격이라는 믿음은 굳이 받아들여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신에게는 인격보다는 신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그 신격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관념 속에 잡아두기 위해 수없이 던져왔던 인격이라는 올가미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어떤 것일 것이다.

신의 실체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말이다. 물론 성서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이 있지만, 그 계시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에 인간 언어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다. 누구든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교만에 빠진 사람이다. 그 계시는 시공간에 매여있는 인간이라는 조건에 의해 제한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논할 때 그 논의의 빈 공간들을 채우려 애쓰기 보다는 그저 비워두어야만 한다. 그 편이 채우려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다. 채우려면 모르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이지 신적인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실체는 모르나 그 실재는 인정하는 자세. 그 실체를 초자연적 인격신으로 고정시켜 놓기 보다는 좀더 유연하게 열어놓는 자세.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할지라도, 그냥 모르는 상태로 놓아두는 자세.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더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저 계심으로 충분한 분이시다.

Friday, August 29, 2014

화려함과 소소함

어제 웰링턴시에서 무료로 펼치는 라이트 쇼에 다녀왔다. 먼저 다녀온 키위 친구가 하도 멋지다고 요란을 떨기에 머리속으로 레이저 쇼나 크리스마스 장식 비슷한 화려한 빛의 향연이 펼치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어제 밤에 그곳에 가보니 참 소소하기 그지없는 작품들이었다. 전시물들을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넓은 지역에 여기저기 설치해 놓아서 맵이 없으면 어디서 전시를 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작은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그 작은 전시물들을 보며 처음에는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 이런 보잘 것 없는 전시물을 보자고 이 추운 밤에 시내까지 나왔단 말인가..'

실망감으로 집에 돌아가려하는데, 가만히 다른 사람들을 보니 다들 이 전시물들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는게 아닌가.. 순간 '왜 나는 이 쇼를 즐기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나도 모르게 화려함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이나 미국에서 봤던 화려함에 물들어서 그에 못 미치는 작은 것들에는 아예 그 사이즈만 보고 실망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은 작품들이라도 즐겁게 보고 감상해준다면 이를 설치한 예술가들에게는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는가. 한국 같았으면 관객들의 실망과 욕지거리에 주눅이 들어서 이런 작은 수준의 전시물을 설치하지도 않을 것 아닌가. 행사를 주최한 실무자들도 시민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면 이런 작은 사이즈의 행사를 얼마든 부담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무명의 예술가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을 터이다.

나에게 이 행사를 소개시켜준 키위 친구는 전 세계를 여행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데도 이런 소소한 행사가 멋지다고 꼭 가보라고 추천을 해준 것이다. 행사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Awesome'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정말 별볼일 없어 보이는 작품들을 보면서도 찬찬히 작품을 관찰하고 즐기며 좋아하는 사람들. 화려함에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고, 그만큼 나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Sunday, August 17, 2014

창세기 1장 - 다스림

창세기 1장26-28에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특별히 사람이라는 존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그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점은 다스림의 대상과 그 의미이다.

 다스림의 대상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이 다스려야 할 대상은 사람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만들어졌던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가리킨다. 해와 달과 별, 동식물등을 모두 포함한다. 현재 발전해 있는 각종 분과 학문들을 살펴보면 우주와 지구의 각종 생물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물론 불완전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다스려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할 점은,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도는 그 때까지 만들어진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존재로서 다같이 평등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본성이 삼위일체이듯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도 서로 같은 존재론적 위치에서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는 관계에 서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세상은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세상인 것이다. 파라오가 지배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이상향 가나안에서 만들어가고자 했던 새 세상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다. 기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출애굽의 후손들이 왕을 세우려고 할때 선지자 사무엘은 왕정으로 인해 발생하게될 지배-피지배 관계의 폐해를 우려한다. 심지어 그런 체제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체제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마저 그들의 왕을 뽑고 다른 나라들처럼 지배- 피지배의 관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다.

 다스림의 의미
 다스린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라다’로서 영어로는 dominion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한국어로 느낌을 표현한다면 짓밟고 깨부수는 의미까지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강한 힘으로 억누르고 컨트롤한다는 의미, 정복한다는 의미이다. 근대화 이후 산업의 발전으로 자연이 파괴되었을때 기독교적 세계관이 그러한 파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비판들이 있었는데, 창세기의 문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기자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 다스림의 대상이었지, 자연이 어머니라거나 우리가 보호해야할 대상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다스림을 수천년전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다스림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다스림
 우선 자연물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떤 방식인지는 예수의 공중나는 새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며 새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천부께서 기르신다는 표현을 하신다(마6:26). 새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도저를 앞세운 자연파괴자의 모습이 아닌 새들에게 물과 모이를 주는 마음씨 착한 사람의 모습에 더 가깝다. 본문에서 기른다는 말은 헬라어 “트레포”로서 좀더 정확히는 먹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나무를 자르고 숲을 파괴하고 새들의 보금자리를 없애는 그런 인간들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 아닌가. 예수는 또한 사람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위에서 충분히 군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비 교주처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약간의 힘만 있어도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자신의 말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의 친구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였다. 모두가 평등했다. 그 평등한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전환시켜 지배-피지배 관계로 만드는 세력에 예수는 대항했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죄를 덧씌우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항했다. 예수에게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한 예수를 경험하지 않은 창세기 기자에게 자연은 정복과 다스림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자연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대개의 사람들이 자연을 신성시하고 자연물을 신격화하는 시대에 자연을 피조물로 보고 인간의 다스림의 대상으로 파악한 창세기 기자의 선견지명은 분명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 하나님은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정복자라기 보다는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는 자연보호가에 더 가까웠다. 지금은 힘과 폭력을 숭배하는 수천년전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기 보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새롭게 창세기를 읽어야 할 시대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방식은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돌봄이었으며 예수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또한 사람은 애초부터 지배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서로 협력하며 공생하는 존재였음을 확인하였다. 우리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대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는 세상, 그리고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돌봄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광풍

바람에겐 손이 있다.
파도를 잡아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모래를 움켜쥐고 사방에 뿌려대기도 한다.
우리집 낡은 문도 두드리고 창문도 흔들어댄다.
그만 좀 하라 했더니,
일어나라 한다.
정신차리라 한다.
지금이 누워있을때냐고, 제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한다.

Sunday, August 10, 2014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에 살을 입혀야 한다. 살을 입히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에 살을 입힌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나는 내 입을 손으로 막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겠다.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현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나로서는 그분을 가리키는 것 외에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구현해 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최대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면 인간계에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님은 순종을 넘어서 그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을 성육시키신 분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했으며, 이해한 그 뜻에 육신의 생각을 굴복시키고 온전히 실행으로 옮긴 분이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임을 알기에 자기를 따르라고 한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모임 또는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열린 연합체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현실이고 그 분 안에서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고 그 분을 따름으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내는 사람들의 연대가 되어야 한다.

이 모임을 이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분 외에 리더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을 현실로 인정하는 사람은 감히 교회의 리더가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목사들도 역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고, 성도들도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물론 목사의 역할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목사가 리더는 아니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는가?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이 아니고, 교회 조직이나 목사만이 현실로 보이는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며 마땅히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도 현실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세상만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지배 질서에 부합하고자 애쓰는 다른 조직들과 과연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다의 입맞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며 입맞춤을 한다. 그 입맞춤(필레오phileo)은 신약성서에 여러번 등장하는 입맞춤인데 서로 인사하며 하는 입맞춤이다. 주로 바울서신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구절들에 나오는 그 입맞춤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누가복음에서는 좀더 절절한 입맞춤인 '카타필레오kataphileo'가 두번 더 사용되는데, 한번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그 발에 입을 맞출 때이고(눅7:38), 또 한번은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입을 맞출 때이다(눅15:20). 누가가 의도적으로 필레오라는 단어를 이 세 곳에 썼는지는 알수 없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이나 탕자의 아버지의 절절한 카타필레오와 비교해보면 유다의 필레오가 얼마나 가식적이었을지 추측할 수 있다.  

주님과의 만남이 가식적인 입맞춤으로 끝나는 경우가 아직도 많이 있는 것 같다. 열렬히 주님을 따랐던 시간들, 주님과의 뜨거운 포옹이, 차가운 입맞춤으로 끝나는 비극. 주님은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 계신다. 유다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것 같고, 가끔.. 유다의 일부는 내 안에도 살고있는 듯 하다. 주님을 만날때 나는 어떤 입맞춤을 하고 있나.. 입맞춤을 하러 다가가는 내 눈을 바라보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까 두렵다. "ㅇㅇ아,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Wednesday, August 6, 2014

효녀

오늘 만난 여든셋의 할머니에게는 5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중 넷은 바다 건너 호주에 살고 있고 막내딸만 인근 도시에 살고 있다. 막내딸의 나이는 51세. 그런데 이 막내딸이 할머니를 매주 한번씩 찾아온단다. 막내딸이 사는 도시에서 할머니 집까지 오려면 대략 자동차로 한시간가량 걸린다. 매주 한시간씩 차를 타고 어머니를 만나러 오는 중년의 딸. 그 딸에게 일주일의 하루는 엄마를 위한 Mother's day였다.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그 딸이 once a week mother's day를 16살때부터 지켜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 대단한 딸이었다. 그런 자녀를 둘 수 있다는 것은 노년에 정말 큰 복이다. 그러고보니 이상하게도 내가 만난 뉴질랜드 노인들의 자녀들은 다들 부모에게 잘한다. 자녀들이 외국에 살고 있거나 너무 먼곳에 살고 있지 않는 한, 일주일에 한번쯤은 부모를 방문하는 것 같다. 나이들어 몸도 약하고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는 부모들을 매주 찾아뵙는 자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내 아들도 나중에 늙은 나에게 저렇게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Thursday, July 3, 2014

말씀의 육화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말씀이 물질로 변했다면 모든 피조물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육화이다. 물론 이 말씀의 육화가 가장 생생하게 우리 앞에 나타난 순간이 예수님이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이긴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자연이나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때가 있다. 어느 순간 경이로움을 느낄 때가 그런 때가 아닌가 한다. 매일 보던 앞바다가 어느날 경이롭게 보이고, 매일 보던 풀 한 포기가 어느날 경이롭게 보이고, 매일 보던 아이가 어느날 경이롭게 보이고, 매일 보던 청소부가 어느날 경이롭게 보일때, 그 때 나는 그 '보고 있는 중'에 어떤 말을 듣는다. 그 말이 다름아닌 그 대상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 한다. 말씀을 통해 자연이 만들어졌다면,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늘 순간일뿐이었다. 절대 오래 지속되지 않는 그 순간들, 아, 그 순간들이 영원했으면 좋으련만..

Wednesday, July 2, 2014

포스트 기독교 시대

신학을 공부하면서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내 마음 속에는 교회의 잘못을 고쳐나가면 교회가 더 건강하게 잘 성장해나가겠지하는 생각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잘못된 신학, 불투명한 교회운영, 목회자들의 비윤리적 행위들, 기복신앙에 빠져있는 성도들.. 이런 부분들을 고쳐나가면 교회가 더욱 성숙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그쪽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것이 옳다는 믿음이 있었다. 나부터 그렇게 살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작은 교회나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교회에 관심을 많이 가졌었다. 

뉴질랜드에 와서 나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있다. 뉴질랜드 교회는 신학적으로도 이미 한국 교회의 수준을 넘어섰고, 교회도 아주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고, 목회자들의 비리도 거의 없는 편이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기 위해 애쓰고 있고, 지역사회와의 교류 또한 중요시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 기독교 현상은 비단 뉴질랜드만의 문제는 아니고 서구 유럽 선진국들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경향이긴 한데, 실제로 이곳에서 그 현상을 직접 체험하니 도대체 이제 뭘 어떻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이 해결된 곳에서 결과적으로 일어난 현상이 교회의 쇠락이라니.. 과연 이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진보적 신학이 문제일까.. 아님 사람들의 사고 수준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의 가르침에서 멀어진걸까.. 아님 일부 학자들의 견해대로 가족관계가 느슨해지면서 그 여파로 교회가 힘을 잃은 것인가.. 아님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많은 서비스들이 국가나 사회단체로 이전되면서 사람들이 점점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일까.. 확실히 이제는 교회가 서구인들의 삶의 중심이 아니긴 하다. 예전에는 서구 사람들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삶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교회가 중심적인 장소로서의 역할을 했었는데, 이제는 굳이 교회를 가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 모든 필요를 충족할 수 있으니 말이다. 

말씀의 힘. 이것은 이제 사실 그렇게 큰 동력이 아닐 수도 있다. 예전에 천국, 지옥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먹혀들던 시대에는 말씀의 힘이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모으는 큰 힘이었을 수도 있지만, 과학의 세례를 받고 자란 지금 세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신화적인 이야기는 별로 매력이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비신화적인 방법으로 역사비평적인 접근을 하자니 공부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나 관심을 좀 끌까, 그렇지않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관심 밖이고, 그러한 접근방식의 결과로 성경도 하나의 고전 아니면 조금 특별한 고전으로 여겨지니 "하나님 말씀"의 지위 역시 많이 약화된 상태이다. 예수, 물론 매력있는 인물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독특한 위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그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계속 전해 주는 것도 공해로 여겨지고 있다. 

포스트 기독교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교회로 되돌릴 수 있을까?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하고, 되돌릴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성령의 바람이 불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지금은 돛을 내리고 있어야 할 시기인가..


Saturday, June 28, 2014

선택의 기준

하나님나라는 다가오는 어떤 것이다. 아직 여기에서 완성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오고 있는 어떤 실재이다. 물론 그 나라는 어떤 이들에게는 현실이 아니라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크리스천에게 그 나라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실재이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면, 예측 속의 미래가 아닌 실재하는 미래에 맞추어 현재의 선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 현재의 선택이 다가오는 실재와 어긋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선택은 늘 다가오는 실재인 하나님나라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나라라는 보이지 않는 실재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은 크리스천이 아닌 것이다.

자식들

노인들을 돕는 일을 시작한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20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부터 정부주택에 사는 사람까지, 부부가 같이 사는 사람부터 혼자 사는 사람까지,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 하나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다들 자식들을 보고 싶어하고 손주들을 보고 싶어한다.
집에가면 꼭 자식들 사진과 손주들 사진들이 여럿 걸려있다.
아, 그 많던 자녀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 역시 부모님을 떠나 멀리서 살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내 아들도 커서는 나를 떠나서 살 것이다.
가까이서 살게 되면 좋겠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고..
그나마 두분이서 같이 사는 분들은 좀 낫지만 혼자서 사시는 분들은 너무 안타깝게 보인다.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렇게 외롭게 살다 죽어야 하는 것일까..
왜 자녀들은 부모를 돌보며 살지 못할까.. 부모와 함께 사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일까..

내가 만난 할머니들

1.
할머니의 딸은 호주에 있다.
얼마전 할머니를 보러 호주에서 건너온 딸이 할머니에게 호주로 와서 같이 살자고 한다.
할머니는 딸에게 부담이 되기 싫다며 여기서 계속 살겠다고 하신다.
딸은 호주에서 엄마보러 여기까지 오는게 더 힘들겠다고 웃으면서 말한다.

할머니의 아들은 스웨덴에 있다.
몇달전 다리를 다친 할머니는 이제 운전을 못하게 되었고 장을 보러 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스웨덴에 사는 아들이 인터넷으로 할머니 동네 슈퍼마켓에 주문을 해서 매주 할머니 집으로 배달이 되도록 해주고 있다.

할머니는 방 세개짜리 집에서 혼자 살고 계신다.
아들 딸이 다 자기를 떠났다고 하신다.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힌다.
쇠약해진 몸으로 언제까지 그 집에 혼자 살 수 있을까..

2.
할머니는 환한 미소를 갖고 있다.
몸집도 왜소하고 말도 조심스럽게 한다.
첫인상이 좋다.

거실에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계신다.
뇌졸중으로 인한 장애란다.
얼마나 오래되셨냐고 물었다.
32년이란다.

뇌졸중 환자 모임에 이제 남은 사람이 자기 밖에 없다고 한다.
다른 분들은 모두 다 떠나고 남편만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80이 넘는 거구인데, 할머니는 155 정도의 작은 몸이다.
그 몸으로 할아버지 돌보며 자녀 셋을 다 키우셨다.
그 환한 미소는 신비이다.

3.
할머니는 여섯명의 자녀가 있다.
남편은 41세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서른 둘이었다.
혼자서 여섯명의 자녀를 키웠다.

매일이 전쟁이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아이들을 재우고 밤에 나가서 청소를 했다.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었다.

자식들은 다들 잘 살고 있다.
그런데 큰아들이 할머니를 찾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너무 강하기만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말한다.
강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자식들을 키울 수 있었겠냐고..
어떻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겠느냐고..

Sunday, June 22, 2014

다양한 성경 읽기의 방법들

성경을 읽는 방법은 한가지만이 아니다. 다양한 방식의 성경읽기에 열려있어야 하고 자신의 성경읽기 방식만이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Link: http://www.patheos.com/Topics/2014-Religious-Trends/Progressive-Christian/The-Problem-Isnt-the-Bible-Brian-McLaren-06182014

2014 Religious Trends

The Problem Isn't the Bible

The Bible is too good and too important to be left to those who won't think critically about it. And frankly, it is too dangerous.

By Brian McLaren, June 18, 2014

Editors' NoteThis article is part of the Public Square 2014 Summer Series: Conversations on Religious Trends. Read other perspectives from the Progressive Christian community here.
Earlier this year, I blogged my hunch that this would be the year of the Bible. I felt we were reaching a tipping point after which the cat would be out of the bag, by which I meant that important conversations about the Bible would escape from the seminary classroom to the local congregation. With important releases by Adam Hamilton, Peter Enns, Steve Chalke, and many others (including, I hope, my newest book), that hunch seems to be coming true.

Many people, of course, think there are only two ways to read the Bible: their way and the wrong way. But there are actually multiple options, as this matrix shows.


Within these four general categories, there are countless locations or points of view, and many of us move back and forth from one quadrant to another, depending on our mood or context.
There's one other feature to the diagram that's relevant to ways the Bible is being re-thought. While some people read the Bible as an academic or intellectual exercise only, many of us—as indicated by the shaded circular space that overlaps all four quadrants—read it with some sense of personal need, maybe even desperation. In this circle, we are seeking guidance and wisdom for how to live our lives because we are aware that as individuals, families, communities, nations, and civilizations, we are always on the verge of tipping over into self-destruction.
In other words, those of us in the gray circle aren't primarily seeking information from the Bible. Rather, we're seeking meaning, hope, guidance, perhaps even salvation from something that threatens to destroy us. And—dare we say it?—we may even be seeking revelation, some encounter that gets our minds into realities too big to be contained within our minds. We feel ourselves to be in trouble, in a predicament, on a quest, and we're ever vigilant for news that might help us cope with the mysteries and challenges in which we find ourselves. So the shaded circle represents a personal or predicamental approach, as opposed to merely an academic, doctrinal, analytic, political, or informational approach. It can bring people from all four quadrants together.
As a boy, I was introduced to the Bible from the lower left quadrant. When I got older, I moved to the lower right quadrant and gained new insights. I was never attracted to the upper left quadrant, but I read many authors who wrote from that quadrant. From them I gained the freedom to apply critical thinking to this text that I had come to love. Finally, I found myself at home in the upper right quadrant, where I can enter the Bible as a library, a literary collection containing poetry, fiction, nonfiction, and other genres, and where I have complete freedom to ask questions about the Bible's sources, development, internal tensions, biases, accuracy, cultural context, and genre. In my movement from quadrant to quadrant, I have remained in that shaded circle of reading personally, because I still feel myself deep in the mysteries, dangers, and wonders of the human predicament.
From this space, I don't need to presume agreement among writers. I can allow them to make statements and counter-statements, to agree and to disagree. Similarly, I don't need to assume every detail in the library is factual. Instead, I can read with the assumption that ancient storytellers had aims other than journalistic objectivity, scientific accuracy, or even absolute clarity.
This personal/critical/literary approach has freed me from the need to defend the violence found in the Bible, often attributed to God. It has also freed me from the opposite extreme: the need to throw out the Bible because it contains this violence. It has allowed me to trace how violence and the idea of God are gradually disentangled through the course of the biblical narrative, leading to a radically gracious and nonviolent vision of God. With a personal/critical/literary approach, I can see how our ideas of God have always matured as we matured, which challenges me to keep maturing now.
Of course, plenty of people tell me I'm not allowed to read the Bible in this way. To them, anything other than innocent/literal belief is nothing but unbelief. I try to respond politely but firmly: You are free to read the Bible literally and innocently if you prefer, but you don't have the authority to force everybody else to do so. If they push harder and claim that authority, I reassure them that my problem is not with the Bible's authority, but with theirs.
The Bible—and the same could be said for the Quran or any other sacred text—is too good and too important to be left to those who won't think critically about it. And frankly, it is too dangerous.
As this fresh conversation about the Bible makes its way from seminary classrooms into local congregations, people will discover that reading the Bible with personal engagement, critical thinking, and literary skill yields more joy, more insight, more wisdom, and, yes, more revelation than before.




Brian D. McLaren
Brian D. McLaren is an author, speaker, activist, and networker among innovative Christian leaders. His dozen-plus books include A New Kind of Christianity, A Generous Orthodoxy, Naked Spirituality, and Why Did Jesus, Moses, the Buddha, and Mohammed Cross the Road? He and his wife, Grace, live in Florida and have four adult children and four grandchildren. He's an avid wildlife and outdoors enthusiast. His newest book, We Make the Road by Walking, is available now and offers 52+ fresh readings of the Bible, from Genesis to Revelation.

Sunday, May 18, 2014

518 단상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같은 반 친구가 어느날 저녁 매점으로 나를 부르더니 몇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묵사발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 피범벅이 된 임신부의 시체, 온 몸에 피멍이 든 시체 등이 찍힌 사진들이었다. 그 친구는 그 사진들을 당시 대학교에 다니던 형에게서 얻었다며 그 사건이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전해주었다. '이게 정말 사실인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이런 의구심을 털어낼 수 있었던 건 그 후 2년이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얼마전 쯤 우리교회에 휠체어를 탄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양복을 입고 가족과 함께 왔었는데, 외관상 그냥 잘 사는 장애인인가보다하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80년 5월의 광주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하반신 불수가 된 518의 희생자였었다. 사진으로만 보고 풍문으로만 들었던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그 분과 친해지게 되고, 그분의 부탁으로 만학도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차에 옮겨 태우고 하는 일들을 1년간 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어떤 세상'의 존재에 대해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그 세상은 사람들을 힘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이었고, 약자와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세상이었으며, 진실을 숨기기 위해 갖은 음모와 술수를 부려대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은 2천년전 예수를 미워했던 바로 그 세상이었으며, 바울 사도가 우리들의 싸움 상대로 지목했던 통치자, 권세자,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 또는 하늘의 악한 영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억압과 살인과 폭력과 파괴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싸움 대상으로 개인보다는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통제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지배 체제, 그 지배 체제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악한 영성을 주목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지배체제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줄기차게 해왔었다. 사회가 죄인으로 규정한 인간들의 죄를 사해주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아닌 것을 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죄라는 명목으로 옭아매려는 세력들에 대항하셨다. "내가 한 일이 죄라고? 죄를 덮어씌우려는 너희들의 행위가 오히려 죄 아니냐?""너희들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들, 하나님나라는 너희들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518은 체제의 가면이 벗겨진 사건이었다. 그 체제의 영성, 그 사악한 악마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 악마를 쫓아내고 체제를 구원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통해 체제의 민낯을 보게되었고 체제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작업은 아직도 더디게나마 진행 중에 있다. 때로는 이 작업이 과연 성공할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사탄의 민낯을 보았으며 그에게 덧씌운 십자가의 저주를 이겨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사탄의 체제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결국에는 이긴다는 희망이.. 그때까지 우리는 죽을 것이다. 죽고 죽고 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고 부활하고 또 부활할 것이다. 죽임과 생명의 대결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크리스천이라면 이 대결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겠는가.

Monday, April 14, 2014

공허함

3월 중순경 한국에 계시는 장모님이 갑자기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한국에 들어갔다. 낙상으로 인한 뇌출혈이었는데 뇌손상부위가 커서 의식을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3주간 중환자실에 코마상태로 계시다가 4월 1일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갑자기 60대 후반의 정정하셨던 어머니를 잃은 처가 가족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그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나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낙상이 일어났던 장소가 병원이었기에 아직 남아있는 인맥을 동원해 변호사들을 소개받고 의료사고 여부를 의논하고 병원에 항의하는 일들을 해야 했고, 밤에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2주 동안 잠을 자며, 장모님을 걱정하시는 장인어른의 마음의 짐을 덜어드려야 했다. 그 와중에 겪어야 했던 심신의 피로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장례를 치르고 다시 뉴질랜드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신학적 물음들이 내 마음을 짖누르고 있다.

어제 참석했던 예배는 참 공허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하며 기도를 드렸다.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했고, 고통받는 이웃들, 자연재해로 인해 신음하는 나라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었다. 그런 기도에 가족들의 애타는 기도에도 잠깐의 의식도 회복하지 못하고 거의 시신과 다름없는 상태로 각종 의료장비에 연결된채 돌아가신 장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하, 이 질문에 대한 답, 보수신학의 답변과 진보신학의 답변들을 나는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공허한걸까.. 예전에 "그렇지,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그 답변들이 왜 이리 공허한 걸까.. 내 지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내 말들이 왜 나에게는 이런 공허함을 주는 걸까.. 나는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에 대해, 사랑에 대해, 기도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을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 앞에 욥처럼 입닥치고 있고 싶을 뿐이다.

Friday, March 7, 2014

"I am haunted by humans"

I am haunted by humans. 영화 '책도둑'의 마지막 라인이다. 책을 읽지 않고 영화로만 보았는데, 의인화된 화자 'Death'의 마지막 대사가 저 문장이었다. 저승사자(죽음을 의인화 했으니)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승사자도 사람이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냥 천수를 누리고 살면 좋을 것을 왜 그리도 서로 죽이는지.. 인간이란 저승사자도 시달리게 만드는 존재다.

Wednesday, March 5, 2014

교회는 어떤 곳인가

얼마 전 이 도시의 남부 지역 교회 모임에 다녔왔다. 점점 줄어가는 신도 수로 인해 문을 닫는 교회당이 많아지자 위기를 느낀 지역교회 목사들이 모임을 가진 것이다. 현재 출석하고 있는 장로교회 담임목사의 제안으로 나도 같이 그 모임에 참석했다. 무너져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방법. 그런 것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나름대로 열정이 있었지만, 너무 온순했다. 좋은 사람들이고 착한 사람들이었지만,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교구내에 문을 닫은 교회당을 팔아서 생긴 돈을 어떻게 써야 할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웃 동네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만약 난민들이 이들 교회로 나오기 시작하면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교회를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날까. 교회는 그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적당히 교제를 나누는 사교모임에 불과한 것일까. 건물유지 보수하고 장비 새로 구입하고 우리 새끼들 잘 돌봐줄 사역자 구하는 데에만 돈을 쓰면 되는 것일까. 교회는 그저 예배만 드리면 되는 곳일까. 삶과 유리된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인데, 어찌 대개의 교회는 예배와 그 예배가 구현되어야 될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는 교회도 교회인건가. 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는가.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주님이 어찌 되시겠는가..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

근래에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사역자를 필요로 하는 한인교회도 없는데다, 한인이 많지 않으니 새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설령 교회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몇몇 성도에 지나지 않을테니 늘 예상해왔던대로 자비량 목회 외에는 답이 없는 형편이다. 문제는 무슨 일을 할 것이냐 인데, 버스나 택시 운전같은 일을 할 것인가 아니면 공부를 해서 좀 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것인가.. 공부를 한다면 현재 관심있는 분야가 방사선 치료나 진단 쪽이다. 물리 치료도 관심이 있는데 4년을 공부해야 하니 좀 그렇고, 3년에 끝낼 수 있는 방사선 분야가 좀 더 끌린다. 사람 돕는 걸 좋아하고 기계 만지는 걸 좋아하니 적성에 맞을 것 같기는 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어젯밤에 이 일로 진지한 고민을 하고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잠이 들었는데, 낮에 한국에 계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국시간으로는 이른 아침이라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아버지께서 내 꿈을 꾸셨다며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 하시더라는 것이다. 꿈에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 열어봤더니 내가 대학생 모습으로 문 앞에 서있더라는.. 내 고민이 아버지에게 통한 것인가. 영적으로 교통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영적으로는 함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교회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목사로 살아가기가 이 시대 목사들의 과제가 아닌가 한다. 교인 수는 앞으로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미 우리는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었지 않은가. 이 현상은 서구에 나와보니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도 없고 복음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이 느끼는 영적 갈등 또는 내적 고민을 풀어줄 곳은 교회가 아니라도 많다. 종교는 단지 교회만이 아니다. 스포츠도 쇼핑도 의학 심리학도 종교다. 구원? 하루 하루 별 부족함 없이 사는데 현재의 구원이 무슨 매력이 있을까. 내세에 관심이 없기에 죽음을 앞둔 사람들도 대개는 그냥 별 두려움 없이 죽는다. 일요일 아침 해변은 각종 수상 스포츠 클럽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모으려면 교회는 이제 스포츠 클럽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 교회는 교회에 관심없는 그들에게 과연 무엇을 줄 수 있는가..

Thursday, February 6, 2014

하나님나라와 부활 그리고 십자가

나는 한국 사람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하나님나라 사람이기도 하다. 하나님나라 사람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이 아직 하나님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나라 사람으로서 하나님나라의 말을 하고, 하나님나라의 음식을 먹고, 하나님나라의 풍속을 따르려고 한다. 마치 내가 뉴질랜드 땅에 살면서 한국말을 하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 풍속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잘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예수님의 행동과 가르침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나라를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고, 그 나라가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물론 이 일은 나 혼자만의 행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타자를 포함한 우리의 힘으로, 그리고 이 '우리'를 가능케하시는 성령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어찌 나와 타자가 함께 우리가 되겠는가.    

혹자는 말한다.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힘으로 이 땅위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 그 나라가 어찌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질 수 있겠는가. 만약 그리 된다면 그 나라는 또 다시 인간의 나라가 될터이지 어찌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는가.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이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할지라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한다. 그 길의 끝에 절망이 있을 것이고 고통과 좌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어이 그 절망을 맛보아야 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 그 절망의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야 부활도 가능하고 그래야 하나님나라도 열리는 법이다.

부활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에게나 의미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 부활이 있었느니 없었느니, 가능하니 불가능하니를 따지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십자가를 져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십자가, 단순한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고통받고 소외당한 자들을 구하려다 다다르게 된 고통과 절망의 자리이다. 그 곳에 이르지 못한 자들에게 부활은 헛소리에 불과하겠지만, 하나님마저 나를 버린 것 같은 절망의 자리에 다다른 자들에게 부활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유일한 증거, 정의가 살아있고, 우리에게 희망이 아직 남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부활은 탁상머리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믿느니 마느니 기껏 belief 수준에서 만지작 거릴 개념이 아니다. 부활은 우리가 십자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오직 그 때에만, 그 길의 끝에서 새롭게 열리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인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예수님이 들어선 그 나라, 하나님나라, 우리의 영원한 희망, 이 땅에 없기에 그 어느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래서 영원한, 그 희망을 얻고 싶다면 십자가를 져보라.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같이 어깨를 걸어보라. 맞아터지고 협박도 받고 체제의 공고한 힘에 억눌려도 보라. 그러면 그 숨도 쉴 수 없을 답답함 속에서 부활도 하나님나라도 기꺼이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Wednesday, January 29, 2014

서핑과 전도

서퍼들을 보면서 전도와의 연관성이 떠올랐다. 서퍼들은 일단 바다에 익숙해져야 하고 자신의 보드에 익숙해져야 한다. 좋은 파도를 고를 줄 알아야 하고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파도에 올라타서 서핑을 즐길 수가 있다. 

서퍼와 바다의 관계는  성도와 세상의 관계와 비슷하다. 교회에 다닌다고 세상을 등한시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선 안 된다. 세상을 알아야 한다. 내가 사는 동네는 물론이고 내 직장, 나라,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세상/바다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파도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파도란 나와 마주치는 개개인들이라 하자. 우리는 일생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서퍼들에게 그렇듯 모든 파도가 서핑하기에 좋은 파도가 아니다. 그래도 좋은 파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바다에 뛰어들어 수많은 파도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파도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 복음/서핑을 전할/할 기회가 포착된다. 일단 좋은 관계를 형성해놓으면 대화의 주제가 다양해지고 깊이도 점점 깊어진다. 그러다가 대화 도중 기독교 신앙과 접촉점이 생기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해서, “나는 크리스천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에 감화 받아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삶이 나에게 미친 좋은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나는 당신에게 이러한 삶이 어떠한지 이야기해주고 싶다”는 류의 말을 한다. 그러려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이는 서퍼들이 자신의 보드를 잘 알고 그 보드 위에 잘 설 줄 아는 능력과 마찬가지이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어떤 영적인 필요를 드러내었는데도/좋은 파도가 왔는데도, 그에 맞는 신앙적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면/파도에 올라타지 못한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래서 서퍼는 또한 자신의 보드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신앙인들에게 보드란 성경과 같다. 바다위에서 서퍼를 지탱해주는 것이 보드인 것처럼, 세상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성경이다. 서퍼들이 보드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 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균형 잡힌 성경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도를 타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물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오랜만에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저절로 실눈을 뜨게 할만큼 눈부신 태양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는 푸른 바다. 남극과 가까워서 물이 차지만 아이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그 차가운 물에서도 마냥 웃으며 파도와 어울려 놀고 있었다.  어른들은 수영을 하기도 하고 서핑을 하기도 하고 모래사장에 누워있기도 했다. 나는 모래밭이나 물에 들어가지 않고 바닷가 벤치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바람이 세지 않아서 그런지 멀리 남섬을 오가는 여객선도 여유로워 보였고, 가까이 웰링턴 공항에 내리는 각양 각색의 비행기들도 편안해 보였다. 기상청 예보에 의하면 오늘의 최고 기온은 22도라 했다. 햇빛이 강해서 춥지도 덥지도 습하지도 않은 날씨, 쾌적하다는 말이 딱 맞는 날씨였다. 날씨가 좋을 때 웰링턴의 여름은 최고라더니 과연 그러했다. 햇빛도 바람도 파도도 사람들도 모두 좋았던 하루였다.

Monday, January 27, 2014

부끄러운 일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 분의 살과 피를 나눈 형제 자매들과 한 몸이 되었다면, 그들의 아픔이 내 몸의 아픔처럼 느껴져야 하고, 내 몸의 통증에 반응하듯 즉각적으로 그들의 아픔에 반응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늘상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아직 성찬의 의미가 나에게 체화 되지 못했기 때문인 걸까.
가령, 초대형 태풍 하이옌에 의해 폐허가 된 필리핀 타클로반에서 집도 음식도 없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 형제, 자매들의 아픔에 나는 왜 좀더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들과의 공간적, 심리적, 민족적 거리감을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일체감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단순히 기부금 얼마를 낸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 자매로서 너무 면목이 없는 일이 아닌가. 정말 내 가족이 그런 고난을 당했다면 찾아가서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하지 않겠는가.
고난의 현장이 어디 그 곳 뿐이겠는가.. 성만찬을 통해 구현된 하나됨이 아직도 내 삶에 실현되지 않고 있는데,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고난의 현장을 모른체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또 무슨 낯으로 성찬에 참여한단 말인가.. 부끄러운 일이다..

Saturday, January 18, 2014

존댓말

이것도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얻게된 생각인데, 어린이들, 10대, 20대, 30대까지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고맙게 여겨진다. 그들이 살아있음이 고맙고 그들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있어야 인간 세상이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없다면 우리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쓰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귀한 생명들인데 존대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Saturday, January 4, 2014

"어바웃 타임"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였고 이를 바탕으로 사랑과 행복이 현재/일상을 충실히 살아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준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나서 든 생각: 현재 속에 과거도 미래도 녹아있다. 과거도 현재로서만 경험되어지고 미래도 현재로서만 경험될 뿐이다. 과거를 기억으로 부르든, 미래를 기대로 부르든 그것은 현재에서만 가능한 사태이다. 어떤 과거도 현재로 호출될 수 있고 어떤 미래도 현재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내 현재가 내 과거이며 내 미래이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아들과 함께 산책을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내가 지금 바닷가에 살고 있고 어린 아들이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들과 산책하고 함께 놀아줄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인데, 가끔 그걸 잊을 때가 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하는데, 아둔한 나는 가끔 그걸 잊고 산다.

Wednesday, January 1, 2014

계획없이 시작된 새해

201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고, 나에겐 아무런 계획이 없다.
한 해의 계획이 없이 새해를 맞이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있었지만 머리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을 뿐,
계획이라는 이름 하에 머물러 있을 만한 것들은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이 여전히 좁은 데다
내가 만난 예수와의 관계를 진정성 있게 나누고 발전시킬만한
사람도 장소도 아직 얻지 못했다.

일은 계속 하고 있긴 하지만 이게 내 일이란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내 일이란게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 일이라 생각하면 안될까.
외연을 부수고 내포만으로 만족하며 살면 안될까.

계획없이 시작된 2014년.
어떻게 마무리될지,
하나님은 또 어떻게 나를 이끌어가실지,
기대되는 한 해의 시작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