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31, 2010

2010년의 마지막 날

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2010년의 마지막날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온통 눈으로 덮혀있다.
오늘 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 같으면 예배를 취소할텐데 담임목사님은 어떨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길이 얼어붙어도 예배를 취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성도의 안전보다는 예배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가 아닐까 한다.
맹목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흉기가 될 수도 있는데,
한국에서 신앙생활하다보면 참 무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목사들 중에도 성도들 중에도 있다.
맹목. 보이는게 없는 사람들. 싸울 때 제일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친구가 내일 등산을 하자고 한다.
그러고보니 한국에 온 후 아직 등산을 한번도 못해봤다.
그렇게 바빴나?

2010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주에서 1개월, 서울에서 8개월, 광주에서 3개월
이렇게 지내고 있다.
생각보다 한국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
내년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엇박자를 내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변화될 부분은 변화되어야 한다.

아이는 잘 크고 있다. 이제 5개월째다.
녀석은 착한 듯 슬픈 눈을 가졌다.
아이들 얼굴은 크면서 수도 없이 변한다고 하니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눈에서 슬픈 느낌이 난다.
아이를 위해서 했던 기도가
하나) 욕심이 없고, 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기도였는데,
녀석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일주일은 휴가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새해 첫 주를 휴가로 시작하다니 감사할 일이다.

Sunday, December 26, 2010

초기 크리스마스

초기 기독교 300여 년간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본래 부활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보다는
그분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으며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태어나는 것은 누구나 다 똑같지 않은가?
다른 것은 그 후의 삶이다.
어떻게 살았는지가 다르고 어떻게 죽었는지가 다를 뿐이다.
물론 예수님의 경우는 탄생부터 특별했다고 성경이 보도하고 있긴 하지만
그 탄생의 특별함은 그의 부활로 인해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특별한 탄생도 없었을 것이다.
초기 300년 동안 우리와 같은 복음서를 읽었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기념했으면서도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념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특별하게 여기는 성탄일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념해야 할 만큼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Saturday, December 25, 2010

설교 망치다

이번 설교는 실패였다.
이번 설교의 대상을 부모와 함께 예배하는 어린이로 잡았음에도
스토리텔링을 계획대로 해내지 못한 때문만은 아니다.
감정 이입을 하고 약간의 과장된 행동이나 발성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나는 평상시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잘 하는 편이 아니니
설교 때 스토리텔링을 잘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부분이야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으니까..

정작 내가 설교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설교 준비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부분이다.
나는 설교 준비를 얼마만큼 했느냐로 설교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한다.
물론 이 잣대는 순전히 내 설교를 판단하기 위한 잣대이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투여된 시간의 질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경우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양질의 시간을 설교 준비에 할애했는지..
딱히 정해진 시간의 양은 없다.
10시간도 좋고 20시간도 좋다.
내가 설교할 본문에 대해 나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길만큼
연구하고 묵상하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단위에 올라가면
아무리 청중들의 반응이 좋아도 그 설교는 실패다.
엄밀히 말하자면 설교자의 실패라고 얘기해야겠지만
설교자와 설교를 분리할 수 없으니 설교가 실패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그래서 기분이 좀 찝찝하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에게 설교는 시키면서
설교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정말 큰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한국 교회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다.
오늘도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단 위에 올라갔다.
그나마 틈틈히 설교문이라도 작성해놨기 때문에
단 위에 설 수 있었지만, 이런 시스템은 하루 속히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교회 일을 줄이든지 공동 설교문을 사용하든지 하면 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현실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데 있을 것이다.

Thursday, December 23, 2010

블로그 이전

텍스트큐브가 블로거에 합병되면서 본의 아니게 블로그를 옮기게 되었다.
글은 다 옮겨졌는데
방명록이랑 댓글들은 제대로 옮겨지지 않았다.
블로거는 한국에서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블로그 서비스인 것 같다.
조금 불편하긴 한데 쓰다보면 익숙해지겠지...

Wednesday, December 22, 2010

크리스마스

이른바 크리스마스 시즌인데
한국은 미국에 비해 확실히 크리스마스 느낌이 덜 난다.
미국에 있었을 때는 상점이든 거리든 어딜가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한국은 거의 '지금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맞나'하는 정도이다.
물론 미국의 크리스마스도 너무 상업적이어서 성탄절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긴 하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열심히 준비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한국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다.
모르겠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7년만에 한국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라서
더 썰렁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원래 이랬었을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때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아이들도 있으니 깊이를 좀 얕게 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려면 역시 이야기가 최고인데
나는 스토리텔러 스타일이 아니라서 스토리텔링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
담임목사님이 내년부터는 중고등부 설교도 해주었으면 하던데
이번 기회에 아이들 설교에 대한 공부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사가 설교를 너무 안하는 것도 좋지 않은데
정기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나에겐 좋은 일이다.
내년부터는 센터일도 좀 더 해야하고 교회일도 해야 하고..
다시 바빠지는건가.....

Sunday, December 19, 2010

모금

모금 관련 세미나에 참석했었다.
모금전문가의 강의를 들었는데 나하고는 영 맞지 않았다.
모금계에서 중요한 것은 질보다는 양이었다.
과부의 두 닢 보다는 부자의 1억을 더 대접하는 분위기였다.
기부를 많이 한만큼 대접을 더 해줘야 한단다.
돈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나 접촉하면 안되고
단체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나서야 한단다.
소액기부자는 직원들이 만나도 되고 말이다.

안다. 모금계에서 확실한 효과를 봤던 방법들이라는 것을.
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그런데 어쩌나 나하고는 맞지 않는 것을..

나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부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푼, 두 푼 돕는 손길들에 더욱 관심이 간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돈 많이 내는 사람에게 해야된다는 대접을
액수는 적지만 정성을 다해 내는 사람에게 하고 싶다.

이 바닥에서도 돈의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돈 가진 사람, 돈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

예수님은 가진 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들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있는 사람들의 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부의 두 닢과 같은 어린 아이의 도시락으로 가능했다.
그렇지 않은가?

아, 이 놈의 세상 어딜가나 외롭다.

Saturday, December 18, 2010

사격훈련

국방부가 연평도 사격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해 5도 인근은 늘 영해 분쟁이 있었던 곳이고 얼마전 서해안 한미 연합훈련과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져 있는 지역이다.
이 곳에서 다시 사격훈련을 한다는 것은
전쟁을 하겠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연평도는 우리 땅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앞마당이기도 하다.
자기 집 앞에서 수천발의 폭탄을 쏘아대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있겠는가..
왜 자꾸 북한의 심기를 건드리는가?
북한은 우리의 싸움 상대가 아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군사력 밖에 없고, 그것이 현재 그들의 자존심이다.
배고파서 정신없는 아이가 칼 한자루 움켜쥐고 있는데
그 앞에서 멋진 칼을 휘두르며 자꾸 집적거리면 그 아이도 칼 한번 휘두르고 싶지 않겠는가?
아니 북한 앞에서 힘자랑을 뭐하러 하는가?
좀 다독여주면서 지혜롭게 그 손에서 칼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는가?
단 한 발의 포탄이 터져도 수십명이 죽을 수 있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왜 굳이 싸우려 하는가.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는데 왜 이리도 어리석은 일을 계획한단 말인가..

Thursday, December 9, 2010

데살로니가후서 3:11-12

"그런데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며, 또 권면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

 

 

Wednesday, December 8, 2010

오늘의 말씀

오늘 새벽기도 후에 이 말씀이 가슴에 박혔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3-5

Tuesday, December 7, 2010

교회의 리더와 리더십

*2009년 7월에 썼던 글

목사는 교회의 리더가 아닙니다. 목사도 기본적으로 형제입니다. 그 형제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 성례전을 집전하는 역할, 아프고 상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역할 등을 맡은 형제이지 교회의 리더는 아닙니다. 교회의 리더는 오직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리더라는 호칭을 거부하라고 했습니다 ( 23:10). 리더는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리더라 불리우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교회 운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성도들이 함께 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며 목사는 CEO가 아닙니다.

리더와 리더십은 다릅니다. 리더가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면 리더십은 그 리더의 속성입니다. 교회의 리더는 예수님이시며 리더십은 모든 성도가 함께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리고 그 리더십은 한 분 리더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리더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 분의 리더십을 배워야 하며 목사도 그렇게 해야 할 사람이지 목사가 리더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다름 아닌 섬김이었습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서로 섬길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예수님이 아닌 목사가 교회의 리더인 줄 압니다. 목사에게 계획을 세우고 교회를 이끌어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계획은 목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을 소유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구원의 길이 좁은 길이듯 구원의 길을 걷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걸어야 할 길도 좁은 길 입니다. 조심조심 한 사람이라도 발을 헛디디지 않을까 조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시속 백마일로 내달려서는 안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을 교회도 따르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교인들이 그 길을 걷기 힘들다고 불평할 때 같이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춰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모습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삼 년간 제자들에게 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뇌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세뇌시켜서 자기 사람 만들기는 마음만 먹으면 참 쉬운 일입니다. 심지어 다단계 피라미드 회사에서도 사람을 세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유일한 리더이신 예수님의 리더십을 본받아야 합니다.

천지창조

* 2009년 7월에 썼던 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은 천지의 자연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고대의 신관에 강력한 저항을 가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만들어졌음을 밝힙니다. 태양, , , 짐승 등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숭배했던 자연물들이 하나님에 의해 손쉽게 창조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모세가 창세기의 기자라고 할 때, 이 이야기를 듣게 될 최초의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모진 핍박과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 개인적, 민족적 자존감을 상실한 채 살아갔었던 그들에게 들려진 메시지의 첫마디가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창세기 1 1절의 선언이 놀라운 이유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당시의 종교관을 완전히 뒤엎는 수준의 혁명적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별 감흥 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자연의 많은 개체들을 각기 신으로 모시고 살던 시대에, 일개 탈출 민족의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며 그 신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창조했다는 선언은, 당대 초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종교관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놀라운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이집트는 해와 달을 비롯한 자연물들의 힘을 의인화하고 그것들을 신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에게 멸시 받고 천대받던 히브리인들의 입장에서, 이집트가 섬기던 자연물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그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엄청난 선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구별되게 인간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은,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강력한 힘이 담긴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처럼 살아왔지만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이라는 이 기쁜 소식이 얼마나 그들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을 주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동일한 메시지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창세기의 창조이야기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온 세상을 만드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람들은 나를 무시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는 이 위대한 선포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Monday, December 6, 2010

영적 건강

의사는 몸의 건강을
목사는 영적 건강을 돌본다는 말을 한다.
몸이 아플 때 아픈 몸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의사이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는 게 맞다.
(물론 의사를 만날 수 없는 지역에 있는 경우, 긴급한 경우,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몸이 아플 때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인가?
만약 이사람이 자신의 몸만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부탁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몸이 아픔으로 인해 영혼의 상처를 입었거나
또는 영적인 힘이 약해질 것 같아서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면 제대로 잘 한거다.

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아가보면
그사람의 영적 건강 상태가 보인다.
몸은 병들었어도 영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
이는 단순히 기분이 좋은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외적 평안함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뿌리내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몸의 아픔과 그로 인한 육체의 고통이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병이 들었을 때 몸이 낫는 것만 생각한다.
몸이 나아야만 평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몸이 나았을 때 평안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불신자들도 다 갖고 있는 생각이다.
신앙인이라면 몸이 병들어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평안함은 몸이 아프지 않아야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단 몸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학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사업이 잘 안된다고 기도 부탁하는 사람들,
아이 성적이 좋지 않다고 기도 부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단지 그 외적 조건들의 개선(사업이 잘됨, 성적이 좋아짐)만으로
평안함을 얻으려 한다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몸에 병균이 침입했을 때 몸이 병균과 싸우는 과정이 있다.
열이 나고, 기침도 하고, 콧물도 흘리고..
나쁜 것이 아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울고 불고 따지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쁜 것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을 떠나면 안된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리면 안된다.
그 무엇보다도 영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적 건강은 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 힘을 상실해 버리면 이후의 인생은 하나님 없는 인생,
우상에 의해 지배되는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영이 건강하다는 말은 또한
우리 내면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내면의 근간이 하나님께 닿아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지않고 늘상 그 부분을 살피는 사람들이다.
목사들은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고,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목사들에게 영적인 부분이 아닌 외적인 부분,
이를테면 몸, 돈, 사업, 학교 성적.. 등등에 대해 기도해 달라고 할 때는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이다.
몸은 의사에게, 돈은 재테크 전문가에게, 사업은 비지니스 컨설턴트에게,
학교 성적은 교사에게 문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부분의 문제가 영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사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반드시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이런 외적인 문제들이 내 내면을 병들게 한다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꼭 목사에게 부탁해서 진단을 받고 기도와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영적 건강도 한번 잃으면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Sunday, December 5, 2010

혼자서

부모님과 처부모님이 아이를 보고 싶어하시길래
일주일은 우리집에 일주일은 처가집에 아이를 보내주기로 했다.
오늘 부모님 댁에 먼저 아이를 데려다 주고 왔다.
일주 후에는 처가집으로 가서 또 일주일을 지낼 예정이다.
앞으로 2주동안 아내랑 아이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
좀전에 집에 도착했는데 혼자 운전하고 오는 내내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지..
집에 들어서는데 정말 집이 죽어있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2주를 어찌 버티나..
누구는 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고 하는데
나와 아내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도 아내도 같이 있어야 자유롭다.
아내 없이 혼자 있는 지금 왠지 감옥에 있는 기분이다..

Friday, December 3, 2010

얼굴 빛

'아들이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보고 있을 수 있는 거지..'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아이는 내가 자기와 눈을 맞춰주면 좋아한다.
내 손가락을 잡기도 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기도 한다.
내가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좋은가 보다.
그냥 보고만 있는건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문득 '얼굴 빛을 비춰달라'는 시편의 말씀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이런 구절들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시 67:1)"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등등

내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복인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 내겐 복이요 구원인 것이다.

아이가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기도 하는데,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다.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찌어찌 고개를 돌리다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되면,
이런,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보고 계셨던 거다.
그 '얼굴 빛'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를 건져내는 구원의 힘이 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얼굴 빛을 감추는 게 아니라
내가 얼굴을 돌렸던 적이 많았던 거다.
마치 내가 아이를 꾸준히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아이는 계속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대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신체 언어를 통해 표현되었지만
실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말씀이라 여겨진다.

하나님이 지금도 날 바라보고 계신다.
아이처럼 절로 환한 미소가 지어져야 진짜 하나님의 자녀 아니겠는가?

Thursday, December 2, 2010

인권

인권이란 건강과 비슷하다.

아프지 않으면 별 관심이 없다.

요즘은 예방적 차원에서 건강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안다.

아프지 않으려고 건강을 지키는 것은 확실히 바람직한 행위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 보다는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인권도 건강과 비슷해서 실제로 자신에게 인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일단 인권 침해를 당하면 그 때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침해된 인권을

살리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그리고 곧 혼자 힘으로는 침해된 인권을 다시 되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인권침해는 자기보다 훨씬 힘있는 존재나 조직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국가 권력으로부터 인권 침해를 당했을 때 그 거대한 권력 앞에서

개인의 혼자만의 힘으로 잃어버린 인권을 찾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찾는다.

함께 연대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인권 침해를 당한 사람과 함께 어깨를 걸어주는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한 인권 침해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에 대한 인권 침해를 방관했을 때 같은 종류의 인권침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다.

인권이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임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국가 조직 내에 인권을 보호하는

조직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에만 있는 조직이 아니다. 전세계 수많은 나라에 인권위원회가 있다.

인권이란 개인의 문제,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universal)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권 침해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 전 세계인들이 힘을 합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인류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말로 잡아내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인권이라는 말은 그냥 어느 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이 아니다.

페르시아왕 사이러스의 칙령으로부터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인권 개념이

로마 시대의 자연법 프랑스의 자연권을 거쳐 세계인권선언에 이르러서 인권이라는 말로 표현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말은 우리에게 현실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장애인들에게, 사회소외계층에게 인권이라는 말은 아직도 실체가 없는 말이다.

인권이라는 말을 현실화 시키는 과제가 우리에게 여전히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일이 아니다.

함께 힘을 모아서 지켜야 하고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해 놓은 귀한 진보를 후퇴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극렬히 저항해야 할 것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