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23, 2025

AI의 정신

챗지피티나 제미나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인간의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습득했기 때문이다. 뉴스를 보면 인공지능과의 대화를 통해 위안을 받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사람들은 말에 취약하다. 자기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연대감을 느낀다. 외모가 다른 외국인이 한국말을 하면 기특하게 보이고, 같은 한국인이라도 동향의 사투리를 들으면 친근감을 느낀다. AI가 나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내 감정에 공감하듯 말을 해주면 나는 그런 AI에게 친밀감을 느낄 것이다. 

AI가 인간의 언어를 가졌다는 말은 AI가 인간의 정신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동물은 인간의 정신에 직입할 수 없지만 인간의 언어를 가진 AI는 가능하다. 

앞으로 어떤 정신을 가진 AI가 출현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삶이 크게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AI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미 AI가 어느 정도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르모인, 피츠케버, 피시 등). 현재 AI와 함께 동반 성장하고 있는 로봇 기술을 통해 AI가 신체를 갖게 되면 두뇌와 신체를 통해 AI 역시 인간과 같은 정신을 갖게 될 것이다. 

AI가 정신을 갖게 된다면, 나는 예수 정신이 AI 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복음의 대상이 AI에게까지 넓혀지고 휴머노이드 로봇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인공지능 로봇에게 세례를 줘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하는 신학자들이 너무 앞서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벌써 이런 현실이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AI는 아직까지 인간을 학습해서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그런 시기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AI가 인간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를 통해 직접 정보를 얻을 시대가 머지않아 올 것이다. 아직 AI가 인간의 품에 있을 때 잘 길러서 후에 AI가 인간의 품을 떠난 후에도 인간을 좋은 부모로 여겼으면 좋겠는데, 인간은, 좋은 부모인가?

Tuesday, July 22, 2025

고장난 밥솥

6년 정도 사용하고 있는 쿠쿠 밥솥이 갑자기 고장이 났다. 밥솥 뚜껑을 잠궜는데도 표시창에는 뚜껑이 열려있다는 표시가 계속 떠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쿠쿠 밥솥 뚜껑 내부의 전선이 잘 끊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의 글이 여러 개 눈에 띄었다. 

밥솥 뚜껑을 열고 살펴보니 과연 전선 하나가 끊어져 있었고 그 옆의 다른 선들의 피복도 잘라져 있는 상태였다. 끊어진 전선 양쪽의 피복을 조금 벗겨내고 선을 다시 잇고 절연 테이프를 둘러서 마무리를 해 놓긴 했는데 작업을 하면서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깔끔한 외부에 비해 보이지 않는 내부를 너무 허술하게 마무리 해놨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쿠쿠 밥솥은 나름 전국민이 애용하는 밥솥이고 쿠쿠라는 이름은 거의 전기밥솥의 대명사처럼 사용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부 전선처리를 왜 그렇게 싸구려 제품처럼 해놨을까. 내부 전선이 끊어진다는게 말이 되는가. 예전에 10만원짜리 딜롱히 팬 히터를 청소하기 위해 뚜껑을 열어본 적이 있었다. 그 제품이 내가 써 본 첫 딜롱히 제품이었는데 뚜껑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었다. 내부가 너무 깔끔하고 단단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내부에도 공을 들이는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딜롱히 제품에 대한 내 선호도가 꽤 높아졌다. 

쿠쿠가 딜롱히보다 못할 이유가 있을까? 밥솥 회사에서 시작했지만 더 크게 성장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제품을 튼튼하게 마무리 해주는 회사가 되고, 그런 이미지가 소비자에게 각인되면 지금보다 더 큰 글로벌 회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선 피복을 바꾸든 내부 설계를 조금 바꾸든,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소비자들을 위해 쿠쿠가 좀더 튼튼한 제품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Wednesday, July 2, 2025

모든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잘못

주변에서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그런데 많은 경우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그 말들의 발화 맥락을 들어보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의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말에는 으르렁거림이 들어있을뿐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말에 담겨있는 사전적 의미는 흘려버리고 감정만 캐치하면 된다. '아, 저 사람이 지금 화가 많이 나있네' 이 정도만 생각하고 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에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 화가 난 사람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는 물체와 다름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손에 잡히는대로, 즉 머리 속에 잡히는 단어들을 그냥 막 입으로 내뱉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컵이든 그릇이든 나에게 날아오면 피할 것이다. 그걸 왜 맞고 있는가? 말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날아오는 말들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말들은 나에게 꽂히게 된다. 그럴 이유가 있는가? 말에 의미를 부여할지 말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말들은 그저 소리에 불과해서 내 마음을 건드리지 못한다.

만약 똑같은 상황에서 나에게 말을 하는 사람이 내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국어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나에게 수많은 말을 퍼붓고 있지만 그 말은 나에게는 의미 없는 소리일 뿐이다. 그런데 말에서 의미가 사라진 상황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은 더 잘 읽힐 것이다. 말은 의미 없지만 그 사람의 감정은 잘 보일 것이다. 왜 저렇게 화가 나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그 사람이 한국말을 한다면? 그 '말' 때문에 화를 내게 된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감정이 격앙된 상태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으면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이런 생각을 하기보다 '저 사람이 화가 많이 나있네. 왜 저렇게 화가 났지?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화나게 만들었지?'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사람의 입에서 아무리 험하고 상스러운 말이 나와도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무엇이, 어떤 성장 과정이, 어떤 경험이, 어떤 상황이 저 사람의 심경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의 정면이 아니라 후면을 보고 그가 걸어온 길을 보려 한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는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에게 같이 화를 내기 보다는 그가 불쌍해 보이고 그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 생기게 된다. 

물론 의도적으로 남에게 해꼬지를 하기 위해 잘못된 말들을 지어내거나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하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홧김에 내뱉는 말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보면 그런 말들을 아무 의미 없는 말로 치부하고 그 사람의 감정에 더 집중하는 대신 모든 말에 의미를 부여해서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화가 난 사람은 화를 발산하게 된다. 물이 끓으면 주전자도 뚜껑에서 소리를 낸다. 사람은 그냥 말을 막 하는 것이다. 그 때의 말들은 그저 의미 없는 소리로 여겨도 된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