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절망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가 그야말로 치욕과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예수에게 인생을 걸었는데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겨졌을 만큼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부활을 통해 그들은 희망을 얻게 되었다. 예수가 가리켰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실제로 체험했던 것이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끝이라는 현실을, 불의가 아니라 정의가 끝이라는 현실을,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끝이라는 현실을 부활을 통해서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권력이 내렸던 사형 판결을 뒤집고 죽음에서 예수를 일으켜 세워 주셨으며 예수는 부활 이후로도 원수를 응징하기 보다는 공생애 기간동안 꾸준히 설파했었던 사랑을 실천해 나가셨다. 자신을 배신했던 제자들을 찾아가서 사랑으로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셨고 악한 세상 속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것을 부탁하셨다.
부활을 현실로 경험했을 때 그들은 변화되었다. 소유를 나누기 시작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의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따른 고통과 반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에게 절망이 있는가? 풍요로움에 안주하기만 해서는 부활 신앙을 경험할 수 없다. 세상의 절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의 부조리와 권력의 행태에 절망을 느껴야 한다. 세상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죽임을 봐야 한다. 그러한 절망감이 현실로 느껴질 때 비로소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절망이 없는 사람은 부활을 현실로 경험할 수 없다. 안락함 속에 부활이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돈을 구원자로 여기고 있다. 만질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돈이 우리의 구원자인데 어찌 보이지 않는 예수의 부활이 기쁠 수 있겠는가. 소유를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데 어찌 소유의 추구를 경시하는 예수님을 기뻐할 수 있겠는가.
부활절에 늘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내 삶에 십자가가 있는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쓰다가 얻게 된 상처가 있는가? 나는 과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