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성찬식 봉사를 했다. 단 위에서 커다란 포도주 잔을 들고 서 있으면서 포도주를 마시러 오는 성도들에게 "This is the blood of Christ shed for you" 라고 말하며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하얀 천으로 잔을 닦고 살짝 돌려서 다음 사람이 마시게 해준다. 하나의 잔에 들어있는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것이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성찬을 하는 교회보다는 조그만 잔에 들어있는 포도주스를 각자 들고 마시게 하는 교회가 많지만 예전에는 이렇게 하는 교회가 많았다고 한다. 이 교회에서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마시게 하고 있었다. 팬데믹 이후에도 포도주 잔을 돌려마시는 교회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담임 목사였다면 포도주 잔을 돌려 마시는 형식은 제해버렸겠지만 이 교회 목사는 아직도 전통적인 방식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이 교회는 앵글리칸 교회이다. 한국에서는 성공회라고 불리는 교회다. 앵글리칸 처치는 영연방 국가 중의 한 곳인 이 나라에서는 아마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일 것이다. 내가 침례교 목사이기 때문에 이 교회의 담임 목사/신부인 폴을 만나지 않았다면 앵글리칸 교회에 다닐 일은 없었을 거다.
폴을 처음 만났던 곳은 수년 전 이 도시에 새로 생겼었던 커피 트럭이었다. 당시에 나는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고 폴은 이 도시로 이사와서 개척하며 자비량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새로 생긴 커피 트럭에서 커피를 한 잔 사마시며 바리스타인 폴이랑 얘기를 하다보니 내가 목사라는 것까지 말하게 됐고 자기도 앵글리칸 교회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었다.
앵글리칸 신부도 자비량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한다고? 이렇게 시작되어서 올해부터는 아예 폴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이 교회는 굳이 분류하자면 저교회 전통에 가까운 교회지만 예전을 포기하지는 않은 교회이다. 게다가 뉴질랜드에서 맨발의 신부로 유명한 저스틴 주교가 폴과 함께 지내며 교회를 돕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스타일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저스틴 주교는 맨발에 장발을 땋은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주교인데 그냥 보면 전혀 신부스럽지 않고 어찌보면 조금 말끔한 노숙자스럽기까지도 하다. 아내와 함께 오랫동안 청소년 사역을 해왔고 웰링턴 인근에서 공동체 사역을 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웰링턴에 살고 있던 시절 인상깊게 여겼던 신부 중의 한명이었는데 지금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다니.. 정말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영어권 교회에 다시 참여하게 되니 다시금 영어와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고생하고 있다. 일상적인 영어는 가능하지만 설교나 기도를 영어로 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말에 자신감이 있어야 설교나 기도가 가능한데 영어에 그만큼의 자신감이 없으니 설교를 하기가 꺼려진다. 그래도 지금은 한인교회 목회하던 시절에 비하면 영어를 사용하는 기회가 많아져서 조금 나아진 느낌이다. 의도적으로 영어로 듣고 말하는데 시간을 더 투자하고 있기도 하고..
오늘 성찬식 봉사를 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면서 노동의 댓가로 돈을 벌고 이렇게 교회에서 성도들을 섬기니 좋다는 생각..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물론 아직은 영어 때문에 말로 가르치는 일은 못하고 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설교든 성경공부든 편하게 할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폴의 엄청나게 강한 스코티쉬 액센트에도 빨리 적응했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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