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4, 2009

이주 노동자

사실,

한국에 가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일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살면서

또 철학과 신학,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결국 구체적으로 내가 섬기고 싶은 people group이

이주 노동자들이 된 것이다.

 

"된"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그들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고, 어쩌면 그들이 날 선택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들의 부름에 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첫번째 부르심인 신의 부르심도 비슷했었다.

신 역시도 내가 먼저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분이 먼저 나를 불렀고 난 그 부르심에 응했을 뿐이다.

 

이제는 두번째 부르심인 이주 노동자들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다.

내 이웃들의 부르심이다.

이번에도 역시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웃이 되어 주어라."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예수가 한 말이다.

강도 만난 사람이 이웃인지 아닌지 따지기 보다

그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만난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구인가..

무시하고 지나가겠는가 아니면 그의 이웃이 되어 주겠는가..

 

Saturday, November 21, 2009

곧 한국으로..

곧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어디로가서 어떤 일을 해야 할 지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는 없다.

일단 부모님 댁으로 가서 좀 쉰 후 다음 일을 생각할까 한다.

기존 교회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은 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이 아닌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일을 할 생각이다.

먹고 사는 문제?

그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것"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만 생각한다면 동물과 다를 바 무엇인가..

정신을 가진 존재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가 얘기했듯

떡으로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

가치 우선적인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물질의 파도를 슬기롭게 타고 넘어야 할 것이다.

휩쓸리거나 가라앉지 말고..

 

기도 부탁드린다.

영에 관하여..

* 2년 전에 썼던 글.

요즘 읽게 되는 책들이 주로 제자도에 관한 책들이다. 제자도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윌라드의 관점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그의 분석이 매력 있게 다가온다. '영혼육은 하나’라는 통전적 관점은 그리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영을 의지로 본 것이 새로웠다. 나 역시 의지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이성이나 감정보다는 높이 두고 있기 때문에 윌라드의 관점이 더 와 닿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만이 순수한 영, 순수한 의지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의지)을 성경이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체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없고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또는 우리에게 파악된 하나님은 그 분의 형상이 아닌 역사 속에서 경험된 그 분의 뜻(의지)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영이라 부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도 임한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영에 먼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물론 이성의 작용과 독립적으로 의지가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통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잠시라도 놓치면 안 된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영을 의지와 같은 것으로 봤을 때 이 의지의 차원이 인간에게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본능에 얽매여 있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격이 다른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기능을 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이다. 하나님조차 터치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부분을 강제하게 되면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체가 아니라 로봇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하와의 선택을 강제로 막지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 영이 있다. 이 영은 인간을 이루는 다른 부분들, 곧 이성, 감정, 신체, 사회적 관계, 혼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모든 부분들을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이 떨어지는 그곳에서부터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여기서 돌이 떨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지 그 변화의 물결이 다른 부분까지 퍼져 나가기 시작할 수 있다. 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부딪혀서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첫 번째 부분이 바로 우리의 영이어야 한다. 그 영은 곧 우리의 마음 또는 의지이다.

윌라드가 사회적 관계를 우리 인간 존재의 한 부분으로 파악한 것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 역시 사회와 개인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이 변화를 받아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시작했다면 그 변화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까지 미치게 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 개인이 속한 사회도 변하게 마련이다. 기존 사회는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변화가 너무도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변화는 사회가 이제까지 존재해 오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윤리, 정치, 경제적 가치들을 그 근원부터 뒤집어엎기 때문이다.

사회의 윤리와 정치와 경제에는 그 근원에 인간이 있다. 인간의 유익, 그것도 지배세력의 유익을 그 근간에 깔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를 받은 한 인간의 등장과 그로 인한 사회의 변화는 이제껏 사회가 이루어온 모든 가치체계를 하나님 중심의 가치체계로 재 편성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는 인간의 윤리도 경제 원칙도 정치 시스템도 모두 무의미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제껏 절대적이라고 우리가 느껴 왔던 모든 것들이 그 절대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의 평등과 평화, 자유와 사랑등인데 이러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현재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예수의 삶의 패턴을 따라서 사는 것이고 예수의 삶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의 희생을 받아 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현한 인물이 예수이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이었고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임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으로 우리를 던지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곧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삶의 패턴을 우리도 그대로 밟아가야 하며 이러한 따름은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가 아닌 그분의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그분의 영이 다스리는 첫 번째 영역은 다름이 아닌 우리의 영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것이 선실현되어야 그 이후 우리의 행동이 변화되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 크리스천이 인간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나 창녀들과 어울릴 수 있었는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구조 속에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죄가 아닌 용서와 긍휼, 감싸안음을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또한 예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지, 강제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예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행동을 그대로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예수의 행동이 아니고 예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려면 예수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 먼저이다. 마음은 의지와 같은 의미이기에 이러한 예수의 마음 본받기 역시 영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영적인 문제는 선택의 문제와 직결된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영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 선택을 지속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면, 영성이 있는 사람은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누구보다도 영적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제 우리는 선택 차원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선택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감정(emotion)조차도 선택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감정은 느낌(feeling)과는 다르다. 감정은 신체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인 반면,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느낌과 달리 감정은 통제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감정도 충분히 선택적으로 통제 가능하다. 세상이 내 감정을 흐트려 놓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재구성된 감정의 패턴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해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간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장 잘 실현해 낸 사람이라는 간디.

비폭력이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될 수 있음을 세상에 알린 사람.

간디를 알기 전까지 비폭력은 무저항과 등가로 취급받는 말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간디를 통해서 비폭력이 폭력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간디는 힌두교도였다.

그런 그가 예수의 가르침을 실행으로 옮겼다는 사실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라는 사실을 은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신의 존재를 믿고 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길 애썼던 사람.

예수도 그에게는 하나의 스승이었겠지.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예수를 믿느냐.. 예수를 따르느냐..

 

예수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한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도

예수를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간디는 보여주었다.

간디에게 있어서는 예수 역시도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길 애썼던 사람으로

비쳐지지 않았을까.

 

크리스천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간디는 그런 의미에서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볼 때 그가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크리스천의 정의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한다면

간디도 크리스천이지 않는가..

 

예수는 나를 믿으라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 했다.

언제부터 기독교는 크리스천의 정의를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으로 정의했는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어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거기가 끝이 아니다.

구원에는 세시제가 있지 않은가.

우리는 구원 받았지만

현재의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중이다.

예수를 따르고 있는 중이란 말이다. 먼 훗날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은 결코 값싼 선물이 아니다. 값싸게 다루어도 안된다.

예수의 목숨과 맞바꾼 구원이다.

내 목숨을 바쳐야 할 만큼 값비싼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 강한 가르침에 물을 탄자들이 누구인가..

 

출애굽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다. 자유를 주신다. 자유를 주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과정 중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다. 아니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의 조건으로 율법을 잘 지킬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갑이되고 이스라엘은 을이 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갑만이 약속 이행의 책임을 졌는데 모세와의 언약에서는 을도 약속 이행의 책임을 져야한다. 율법을 주기 이전까지의 하나님은 개인의 하나님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다. 하지만 출애굽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하나님이 되신다. 개인의 하나님이 왜 민족의 하나님이 되셨나? 아브라함과의 언약 때문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민족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이제 민족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많은 수의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법이 필요하다. 이스라엘도 수가 몇명 안되었을 때는 법이 필요없었겠지만 이제 수백만(?)의 사람이 모이게 되었으니 반드시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법을 내려주신다. 이 법의 근본 정신은 십계명으로 먼저 주어졌다. 그리고 이 십계명의 정신을 구체화시킨 조항들이 율법으로 주어진다. 이 율법은 당대의 다른 국가들의 법률과 비교해봤을 때 상당히 진보적인 법률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조문들도 많이 있지만 인권 개념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탈출민들이 이 정도의 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율법에는 최소한 두가지 문제점이 있어보인다. 하나는 율법이 실생활의 모든 일에 적용가능할 만큼 세분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번 법에 의지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도 법의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법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이 없으면 새로운 법 조항을 또 만들게 되어 있고 이는 결국 법의 거대화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또 하나는  율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계층에 자연적으로 힘이 실리면서 계급의 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문제로부터 후에 토라의 부족한 부분을 구전 전승으로 보완하고자하는 랍비 유대교가 생성되게 되었고 이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인해 율법 적용이 실생활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미치게 되면서 사람들의 삶이 율법에 의해 더욱 규제를 받게 되었다. 두 번째 문제로부터 제사장 계급이 생겨나게 되고 이들의 권력 유지 본성이 결국 신약 성경에 이르러 예수를 죽이는 사건으로 연결되게 된다.

모세를 통해서 선지자의 역할 또한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이것이 선지자의 원형이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럴만도 하다. 613개의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은 자녀가 어디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았던 때가 광야 시절이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가장 반항을 많이 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율법을 항상 지킬수는 없었기에 율법을 범한 죄를 씻는 예식이 항상 필요했을 것이다. 죄를 짓고 씻고 하는 이 일이 계속 반복이 되면 죄 짓는 일에도 무덤덤해질 것 같다. 율법은 그래서 죄를 근원적으로 없애는 일을 하지는 못한다. 율법이 있는 이상 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들 사는 사회에 법이 없어도 안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는 일 외에는 없다.

십계명은 율법인가 아닌가? 십계명은 언약의 책(the book of the covenant)에 수록된 법규들을 주기 이전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명령들이다. 십계명은 언약의 책과 다른 지위를 가지는가?

율법이 내려진 이후 하나님은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신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며 인간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일년에 한차례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수시로 만났다. 모세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모세는 제사장이라기 보다는 선지자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도 있다. 성막이 거룩한 장소라면 안식일은 거룩한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시간 그리고 율법을 통한 거룩한 행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려면 이정도는 최소한 지켜줘야 하는 것들이었다.

광야 생활은 거룩에 대한 배움이 있었던 곳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거룩한 하나님과 가깝게 있었던 광야 시절에도 이스라엘 인들은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 벌써부터 다른 방법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음이 느껴진다. 매일 하나님의 영광과 공급하심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다면 과연 누가 거룩하게 됨에 성공할 수 있을까.

사라지는 하나님

성서는 왜 하나님을 점점 사라지게 표현해 놓았을까..
창세기 1장의 그 강력한 하나님 이미지가 왜 점점 사라져가도록 표현해 놓았을까..
먼 신화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강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지만
현실로 가까이 올 수록 하나님을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인가..
먼 옛날 내 삶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쓰는 것은 쉽지만
지금 여기서 내 삶에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인가..
창세기 1장의 그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셨던 하나님이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슬슬 성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겨가시다가 결국 엘리야 이후에는 전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보이지 않으신다.
에스더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없을 정도이다(연대기적으로 성경을 배열했을 경우 에스더는 구약 성서중 거의 마지막에 속한다).
똑같이 민족을 어려움에서 구한 요셉의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번 언급했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에스더에서 한번도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일이다.
왜 구약 성서 기자들의 눈에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왕국의 멸망 이후 그들의 눈에 하나님은 이제 묵시록에서나 만날 수 있는 분, 앞으로 다시 오실 분으로만 기대되고 있다.

신약 기자들의 예수님 묘사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들도 물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고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현재성, 즉 성령을 통한 부활하신 예수의 내주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비록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생명의 영으로 항상 현재하고 있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신약 기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사라져가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종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현재 속에서 체험될 수 있는, 또는 매일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구약 기자들의 하나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른 관점이 아닌가?

Facing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Facing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Aug 23, 2006


By Walter Wink

The belief that violence “saves” is so successful because it doesn’t seem to be mythic in the least. Violence simply appears to be the nature of things. It’s what works. It seems inevitable, the last and, often, the first resort in conflicts. If a god is what you turn to when all else fails, violence certainly functions as a god. What people overlook, then, is the religious character of violence. It demands from its devotees an absolute obedience- unto-death.

This Myth of Redemptive Violence is the real myth of the modern world. It, and not Judaism or Christianity or Islam, is the dominant religion in our society today. When my children were small, we let them log an unconscionable amount of television, and I became fascinated with the mythic structure of cartoons. This was in the 1960s, when the ”death of God” theologians were being feted on talk shows, and secular humanity’s tolerance for religious myth and mystery were touted as having been exhausted.

I began to examine the structure of cartoons, and found the same pattern repeated endlessly: an indestructible hero is doggedly opposed to an irreformable and equally indestructible villain. Nothing can kill the hero, though for the first three quarters of the comic strip or TV show he (rarely she) suffers grievously and appears hopelessly doomed, until miraculously, the hero breaks free, vanquishes the villain, and restores order until the next episode. Nothing finally destroys the villain or prevents his or her reappearance, whether the villain is soundly trounced, jailed, drowned, or shot into outer space.

Few cartoons have run longer or been more influential than Popeye and Bluto. In a typical segment, Bluto abducts a screaming and kicking Olive Oyl, Popeye’s girlfriend. When Popeye attempts to rescue her, the massive Bluto beats his diminutive opponent to a pulp, while Olive Oyl helplessly wrings her hands. At the last moment, as our hero oozes to the floor, and Bluto is trying, in effect, to rape Olive Oyl, a can of spinach pops from Popeye’s pocket and spills into his mouth.

Transformed by this gracious infusion of power, he easily demolishes the villain and rescues his beloved. The format never varies. Neither party ever gains any insight or learns from these encounters. They never sit down and discuss their differences. Repeated defeats do not teach Bluto to honour Olive Oyl’s humanity, and repeated pummellings do not teach Popeye to swallow his spinach before the fight.

Something about this mythic structure rang familiar. Suddenly I remembered: this cartoon pattern mirrored one of the oldest continually enacted myths in the world, the Babylonian creation story (the Enuma Elish) from around 1250 BCE. The tale bears repeating, because it holds the clue to the appeal of that ancient myth in our modern media.

In the beginning, according to the Babylonian myth, Apsu, the father god, and Tiamat, the mother god, give birth to the gods. But the frolicking of the younger gods makes so much noise that the elder gods resolve to kill them so they can sleep. The younger gods uncover the plot before the elder gods put it into action, and kill Apsu. His wife Tiamat, the Dragon of Chaos, pledges revenge.

Terrified by Tiamat, the rebel gods turn for salvation to their youngest member, Marduk. He negotiates a steep price: if he succeeds, he must be given chief and undisputed power in the assembly of the gods. Having extorted this promise, he catches Tiamat in a net, drives an evil wind down her throat, shoots an arrow that bursts her distended belly and pierces her heart. He then splits her skull with a club and scatters her blood in out-of-the-way places. He stretches out her corpse full-length, and from it creates the cosmos. (With all this blood and gore, no wonder this story proved ideal as the prototype of violent TV shows and Hollywood movies).

In this myth, creation is an act of violence. Marduk murders and dismembers Tiamat, and from her cadaver creates the world. As the French philosopher Paul Ricoeur observes (The Symbolism of Evil, Harper Collins 1967), order is established by means of disorder. Chaos (symbolised by Tiamat) is prior to order (represented by Marduk, high god of Babylon). Evil precedes good. The gods themselves are violent.

The biblical myth in Genesis 1 is diametrically opposed to all this (Genesis 1, it should be noted, was developed in Babylon during the Jewish captivity there as a direct rebuttal to the Babylonian myth). The Bible portrays a good God who creates a good creation. Chaos does not resist order. Good is prior to evil. Neither evil nor violence is part of the creation, but enter later, as a result of the first couple’s sin and the connivance of the serpent (Genesis 3). A basically good reality is thus corrupted by free decisions reached by creatures. In this far more complex and subtle explanation of the origins of things, violence emerges for the first time as a problem requiring solution.

In the Babylonian myth, however, violence is no problem. It is simply a primordial fact. The simplicity of this story commended it widely, and its basic mythic structure spread as far as Syria, Phoenicia, Egypt, Greece, Rome, Germany, Ireland, India, and China. Typically, a male war god residing in the sky fights a decisive battle with a female divine being, usually depicted as a monster or dragon, residing in the sea or abyss (the feminine element). Having vanquished the original enemy by war and murder, the victor fashions a cosmos from the monster’s corpse. Cosmic order requires the violent suppression of the feminine, and is mirrored in the social order by the subjection of women to men and people to ruler.

After the world has been created, the story continues, the gods imprisoned by Marduk for siding with Tiamat complain of the poor meal service. Marduk and his father, Ea, therefore execute one of the captive gods, and from his blood Ea creates human beings to be servants to the gods.

The implications are clear: human beings are created from the blood of a murdered god. Our very origin is violence. Killing is in our genes. Humanity is not the originator of evil, but merely finds evil already present and perpetuates it. Our origins are divine, to be sure, since we are made from a god, but from the blood of an assassinated god.

Human beings are thus naturally incapable of peaceful coexistence. Order must continually be imposed upon us from on high: men over women, masters over slaves, priests over laity, aristocrats over peasants, rulers over people. Unquestioning obedience is the highest virtue, and order the highest religious value. As Marduk’s representative on earth, the king’s task is to subdue all those enemies who threaten the tranquillity that he has established on behalf of the god. The whole cosmos is a state, and the god rules through the king. Politics arises within the divine sphere itself. Salvation is politics: the masses identify with the god of order against the god of chaos, and offer themselves up for the Holy War that imposes order and rule on the peoples round about.

In short,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is the story of the victory of order over chaos by means of violence. It is the ideology of conquest, the original religion of the status quo. The gods favour those who conquer. Conversely, whoever conquers must have the favour of the gods. The common people exist to perpetuate the advantage that the gods have conferred upon the king, the aristocracy, and the priesthood.

Religion exists to legitimate power and privilege. Life is combat. Any form of order is preferable to chaos, according to this myth. Ours is neither a perfect nor perfectible world; it is theatre of perpetual conflict in which the prize goes to the strong. Peace through war, security through strength: these are the core convictions that arise from this ancient historical religion, and they form the solid bedrock on which the Domination System is founded in every society.

The Babylonian myth is far from finished. It is as universally present and earnestly believed today as at any time in its long and bloody history. It is the dominant myth in contemporary America. It enshrines the ritual practice of violence at the very heart of public life, and even those who seek to oppose its oppressive violence do so violently.

We have already seen how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is played out in the structure of children’s cartoon shows (and is found as well in comics, video and computer games, and movies). But we also encounter it in the media, in sports, in nationalism, in militarism, in foreign policy, in televangelism, in the religious right, and in self-styled militia groups. What appears so innocuous in cartoons is, in fact, the mythic underpinnings of our violent society.

The psychodynamics of the TV cartoon or comic book are marvelously simple: children identify with the good guy so that they can think of themselves as good. This enables them to project out onto the bad guy their own repressed anger, violence, rebelliousness, or lust, and then vicariously to enjoy their own evil by watching the bad guy initially prevail. This segment of the show – the “Tammuz” element, where the hero suffers – actually consumes all but the closing minutes, allowing ample time for indulging the violent side of the self.

When the good guy finally wins, viewers are then able to reassert control over their own inner tendencies, repress them, and re-establish a sense of goodness without coming to any insight about their own inner evil. The villain’s punishment provides catharsis; one forswears the villain’s ways and heaps condemnation on him in a guilt-free orgy of aggression. Salvation is found through identification with the hero.

Only the names have changed. Marduk subdues Tiamat through violence, and though he kills Tiamat, chaos incessantly reasserts itself, and is kept at bay only by repeated battles and by the repetition of the Babylonian New Year’s festival where the heavenly combat myth is ritually re-enacted. Theologian Willis Elliott’s observation underscores the seriousness of this entertainment: ”the birth of the world (cosmogony) is the birth of the individual (egogony): you are being birthed through how you see ’all things’ as being birthed”. Therefore “Whoever controls the cosmogony controls the children”.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is the simplest, laziest, most exciting, uncomplicated, irrational, and primitive depiction of evil the world has even known. Furthermore, its orientation toward evil is one into which virtually all modern children (boys especially) are socialised in the process of maturation. Children select this mythic structure because they have already been led, by culturally reinforced cues and role models, to resonate with its simplistic view of reality. Its presence everywhere is not the result of a conspiracy of Babylonian priests secretly buying up the mass media with Iraqi oil money, but a function of values endlessly reinforced by the Domination System. By making violence pleasurable, fascinating, and entertaining, the Powers are able to delude people into compliance with a system that is cheating them of their very lives.

Once children have been indoctrinated into the expectations of a dominator society, they may never outgrow the need to locate all evil outside themselves. Even as adults they tend to scapegoat others for all that is wrong in the world. They continue to depend on group identification and the upholding of social norms for a sense of well-being.

In a period when attendance at Christian Sunday schools is dwindling,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has won children’s voluntary acquiescence to a regimen of indoctrination more extensive and effective than any in the history of religions. Estimates vary widely, but the average child reported to log roughly 36,000 hours of television by age 18, viewing some 15,000 murders. What church or synagogue can even remotely keep pace with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in hours spent teaching children or the quality of presentation? (Think of the typical “children’s sermon” – how bland by comparison!)

No other religious system has even remotely rivalled the myth of redemptive violence in its ability to catechise its young so totally. From the earliest age, children are awash in depictions of violence as the ultimate solution to human conflicts. Nor does saturation in the myth end with the close of adolescence. There is no rite of passage from adolescent to adult status in the national cult of violence, but rather a years-long assimilation to adult television and movie fare.

Not all shows for children or adults are based on violence, of course. Reality is far more complex than the simplicities of this myth, and maturer minds will demand more subtle, nuanced, complex presentations. But the basic structure of the combat myth underlies the pap to which a great many adults turn in order to escape the harsher realities of their everyday lives: spy thrillers, westerns, cop shows, and combat programmes. It is as if we must watch so much “redemptive” violence to reassure ourselves, against the deluge of facts to the contrary in our actual day-to-day lives, that reality really is that simple.

Redemptive violence gives way to violence as an end in itself. It is no longer a religion that uses violence in the pursuit of order and salvation, but one in which violence has become an aphrodisiac, sheer titillation, an addictive high, a substitute for relationships. Violence is no longer the means to a higher good, namely order; violence becomes the end.

© Walter Wink is Professor of Biblical Interpretation at Aubur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 City. Among his various books are The Human Being, Peace Is The Way, The Bible in Human Transformation The Powers That Be, and Homosexuality and Christian Faith.

Christian Peacemaker Teams is an initiative of the historic peace churches (Mennonites, Church of the Brethren, and Quakers) with support and membership from a range of Catholic and Protestant denominations. Supporting violence-reduction efforts around the world is its mandate.

Article reproduced with the kind permission of
Christian Peacemaker Teams

 

사랑과 믿음

1.

사랑은 내가 하고자 하면 나 혼자서도 얼마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다.

 

믿음은 상대방에게서 오는 것이다.

신뢰 관계가 깨어진 사람에게 믿음이 계속 가지는 않는 법이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나를 버리고 가버렸어도

여전히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상대방이 거짓을 말했을 때나

정당한 이유 없이 약속을 깨뜨렸을 때는

그를 사랑함에도 그에게 전과 동일한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왜? 그에게서 믿음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으나

그에게서 믿음이 오지 않으면 난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

 

약속을 깨뜨렸어도

계속 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를 계속 믿을 수는 없는 법이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믿어짐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함을 기반으로 한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을 믿으려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믿어진다는 것이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질 수는 있지만

첫 눈에 누군가를 믿을 수는 없다.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몰라도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면 믿을 수는 없는 법이다.

 

2.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은 수없이 하시지만

인간을 믿는다는 말은 하지 않으신다.

인간에게서 믿음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믿음이 사라지면

그 사랑을 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버릴 수 없는 법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어려운 사랑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 하나님으로 부터 믿음이 올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믿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당연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믿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믿음이 가는 분이니까..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실 뿐이다.

 

신생철학

윤노빈의 신생철학을 읽었다.

시각에 대한 분석, 요소론적/명사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 이러한 세계 이해를 버린 동사적 세계 이해로의 전환, 사람의 중요성, 그리고 통일의 중요성을 일갈하는 그의 외침이 절절하게 책 속에 배어있었다. 마치 선지자의 글을 대하는 듯 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람은 존재가 아닌 "생존"이다. 살아있는 아니 좀 더 정확히 살아 "계시는" 생명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계시는 것은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만이 계시는 것이다. 노예는 있지, 계시지 않는다. 사람의 가치를 빼앗기고 감금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의 가치를 깨닫게 하여야 하며 있지 않고 계시게 해야 한다. 사람이 개체가 아니고 우리이며 함께 임을 깨달을 때 사람은 곧 하늘/한울인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모두가 하나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큰 우리, 한울이 된다. 그래서 한울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이웃을 또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한울님도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다.

 

그는 하느님을 '하는님'이라 부른다. 동사적이다. 시각으로 포착되지 않는 움직임, 함이 하느님이다. 시각으로 포착될 수 없는 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보길 원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보면 죽는다. 즉 하느님을 명사적으로 파악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움직임이 아닌 정지된 그 무엇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신을 그렇게 정지된 존재로 보았을 때 사람들은 그 신을 자기들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포착된 신, 정지된 신을 사용했다.  하느님은 행위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자유를 주는 행위, 구원하고, 해방하는 그 행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법이다.

 

시천, 양천, 체천이라는 동학의 핵심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천이 사람이라 했을 때 사람을 모시고 키우고 하늘처럼 행하는 행위야 말로 사람을 진정 한울로 대하는 행위일 것이다.

 

동학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윤노빈이 김영민의 스승이라는 데 과연 김영민에게서 느꼈던 수행 중심적, 사람 중심적, 바깥 지향적인 면들을 이 책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듯하다.    

 

Two "I"s

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얻은 화두는 Incarnation 이었다.

Incarnation이 되지 않은 말씀은 구원이 될 수 없다.

구원은 추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 구상의 세계에서 일어나야 하기에 말씀은 반드시

Incarnation으로 우리에게 와야 한다.

성육신의 신비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에게 주어진 말씀이 내 몸으로 화하지 않는다면 ,

내 어찌 예수를 따르는 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화두는 Interdependence 이다.

independence가 아닌 Interdependence.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독립적이지 않다.

Independence는 허상일 뿐이다.

Dependence 상태를 벗어나서 independence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interdependence로 가야 한다.

서로 도와 주고 도움을 받는 상태이다.

 

인간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도울(사랑할) 수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이 불행이며,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있음이 죄악이다.

서로가 서로를 돕거나 도움을 받는(사랑) 과정 속에서만

우리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예수는 나에게 Incarnation과 Interdependence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분이시다.

 

Incarnation과 Interdependence:

내 삶의 지배가치이며 내 삶을 꼴짓는 두 축 개념이다.

 

 

메가처치 단상

"In other words, we’re not trying to reach God because God reached us. We’re trying to reach people. So we built the church to be able to reach people.
We’re all about people because we’re all about God, and God’s all about people.
People look on the outward." (Interview with Robert Morris, Vision Magazine, Christmas 2006).

게이트웨이 처치의 로버트 모리스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게이트웨이 처치를 비롯한 많은 메가처치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종의 현상은 그들이 테크놀로지에 굉장한 투자를 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물론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사용한다. 다른 것은 메시지일 뿐이다. 그런데 잘 들여다 보면 그 메시지조차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메시지만을 골라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시지가 싫어서 사람이 떠나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술 문명, 자본주의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잘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복음이란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성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과 같은 것일 것이다. 성경의 일부는 이러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세상 시스템을 전복하며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시스템의 임함이 아니던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도 사람을 사랑해야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현대 메가처치의 입장과 내 입장은 사뭇 다르다. 사탕의 달콤함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사탕을 계속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사탕의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사탕이 아닌 다른 음식에 익숙해 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설령 그 길이 좁은 길이고 힘들고 어려운 길,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도 그 길을 걷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니겠는가?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