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6, 2010

스리랑카 교회

스리랑카 교회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다.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사람 수는 불과 네 다섯명 정도이고 그마저도 일요일에 일이 있으면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

대부분 영세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또 돈을 벌어서 스리랑카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쳐야 하기 때문에 야근이든 초과근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려고 한다.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하는 경우에 처해 있는 사람도 많고..

 

언어의 문제도 있다. 한국말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한 두명 정도 있고 나머지는 일상적인 회화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거나 아예 한국말을 못한다.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우선 한국말을 모르다보니 찬송을 부르기가 어렵다.

발음도 안되고 의미도 모르고..

반주도 없이 나 혼자서 기타치며 불러야 하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발음부터 하나씩 가르쳐 주자니 예배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궁여지책으로 한국어와 영어로 되어 있는 악보를 몇개 구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모르니 내가 영어 발음과 뜻까지 알려줘야 한다. 설상가상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렇다.

영어로만 할 수도, 한국어로만 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한국어를 이해 못하고 어떤 사람은 영어를 이해 못하고..

통역을 시키자니 통역과 따로 만나서 설교 내용에 대한 선이해를 시키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매일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게다가 가끔씩 지방에 있는 스리랑카 친구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 친구들 중에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된 사람도 많아서 말 그대로 복음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설교 내용을 이해시키기가 더 어려워진다.

 

지금으로서는 혼자서 기타치며 찬양 가르쳐주고 설교하고, 찬양할 때도 설교할 때도 한국말 뜻 알려주고 영어로 설명해주고  이러고 있다.

동역자가 한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찬양만 맡아주어도 내가 좀더 말씀 선포에 신경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둘다 하려니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주변에 외국인 사역을 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

무보수라서 어렵기는 하겠지만 나도 무보수로 하고 있으니 재정적으로 희생할 각오가 있으신 분이라면 평신도든 신학생이든 함께하면 좋을 듯 싶다.

 

사람 수는 많지 않지만 정말 귀중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먼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Wednesday, June 23, 2010

아내 사랑

현재 내가 관여하고 있는 사업은 스리랑카 사업과 이주아동학교 설립사업이다.

처음에는 학교 쪽 일을 해야하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스리랑카나 아니면 영어권 국가쪽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내가 한국에서 본인의 일을 아무런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스리랑카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스리랑카 일이든 학교 일이든 둘다 외국인을 돕는 일이고, 스리랑카에서 일을 하든 학교에서 일하든 한국적 시스템 속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스리랑카까지 다시 나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내가 아니라면 스리랑카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장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곳에 가든 내가 할 일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의 경우는 다르다. 아내의 라이센스는 사용 가능한 곳이 있고 불가능한 곳이 있다.

열심히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했는 데 그 걸 써먹을 길이 없다면, 그것도 본인이 그렇게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좀 더 여유가 있는 내가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처가에서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도 상당하고..

 

내가 유일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내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나를 무방비 상태로 열어두기로 작정한 단 한명의 사람이 아내이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만약 내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게 싫다면 얼마든지 스스로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부모든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어느 누구라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게 된다, 나는. 그런데 아내에게만은 나를 그냥 열어놓는다. 열어놓고 그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사랑은 있고 없음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도의 문제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정도인데 상대방에게 자신을 여는 것을 사랑이라고 본다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열어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이 자신의 사랑의 정도이다.  정도의 차이로 볼 때 내가 할 수있는 사랑의 최대치가 바로 아내에 대한 사랑이다.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야말로 100의 수준이다. 하나님에게 배운 사랑, 예수님에게 배운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하듯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지 않는가. 아내를 위해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정말 그정도로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도 아내보다 앞설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일이 성직이라고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나에겐 더 귀한 성직이다. 아담처럼 하와와 같이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아담은 하와가 이미 그 열매를 먹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와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는다. 어쩌겠는가. 아담도 그 열매를 먹었다.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다. "당신이 내게 준 여자가 그 열매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와 한 몸이된,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가 죽습니다. 나도 같이 죽겠습니다." 그 사랑을 누가 막겠는가? 아담은 하와와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누가 아담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아담이 사랑하는 하와를 위해 죽는 길을 택했듯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는가. 사랑은 그런 것이지 않는가? 상대방을 위해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의 가치로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는 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이 사랑이 가족을 넘어 이웃에게로 흘러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을 말이다. 아담은 단지 자기 아내를 위해/사랑해 죽었고 그것이 그의 한계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사랑해 죽음으로 아담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사랑은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아직 예수님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아내를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고 사랑의 그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다.

 

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설파해야하는 사람이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웃 사랑을 입에 담을소냐..  

 

Wednesday, June 9, 2010

쉼터 예배

지금 내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남자 쉼터와 여자 쉼터가 있는데 합치면 아마도 백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을 것이다. 이분들을 위해서 하루에 세번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데(개인적으로 예배 횟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몇 주 전부터 내가 월요일 저녁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주중에 하는 일이 많아서 가급적 저녁 예배 인도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목사가 예배 인도할 사람이 없는 데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어서 맡기로 한 것이다.

첫날 예배 인도를 할 때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사람들이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이제껏 설교했던 대상들 중에 가장 이해력이 떨어지는 분들 같았다.

교육 수준이 낮기도 하지만 타문화권에서 온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준비한 설교문을 덮고 그 분들의 반응을 주시하며 설교의 난이도를 맞추기 시작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핀트를 맞추는 작업이랄까..

최고의 렌즈를 가지고 있는 카메라(성경)가 있어도 핀트를 맞추지 못하면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법이다.

핀트가 미리 맞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현장에서 뷰파인더를 보았을 때 초점이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핀트를 재조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 있느냐는 것이다.

핀트를 제대로 다시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의 도우심에 나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심리적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쌓아온 내공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이라도 너는 너일 수 있는가.

너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가. 이제껏 공부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너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가. 성령님과 매 순간 동행하고 있는 너로서의 자신감이 있는가.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순간 성경 말씀과 청중들에게 집중하며 네 전부를 열어젖힐 수 있는가. 그런 자신감이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Saturday, June 5, 2010

Lectio Divina

초기 수도사들의 성경 읽기 방법.

내가 아닌 성경이 나를 읽게 하는 방식.

네 단계.

1. Lectio 본문을 소리내어 여러번 읽는다. 천천히 묵상하듯이. 말씀의 침잠.

 

2. Meditatio 생각, 반추, 특별히 와닿는 문구나 단어에 주목

 

3. Oratio 마음 열기. 직관적인 하나님과의 대화. 묵상을 통해 얻어진 것을 하나님께 말하는 단계.

 

4. Contemplatio 경청하는 단계. 모든 생각을 털어냄.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을 들음.

 

렉티오 디비나는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성경 읽기 방법이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를 돌아보며 내 삶을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재 조준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렉티오 디비나만 집중하여 공부를 등한시 하면 안된다.

잘못하면 과도한 주관성에 갇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렉티오 디비나 역시 몸을 얻어야 한다.

몸을 얻은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몸과 삶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명상의 수준에서 멈춘다면 이 역시도 헛된 놀음에 불과할 것이다.

아내와 함께 있으려면..

아내와 함께 있지 못할 상황에 대해서 미국에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당연히 임신, 출산 기간 동안 아내와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에 온 후 이 일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크다.

서울 물가가 워낙 비싸니 산후조리원도 비싸고..

게다가 아내는 대학병원급에서만 애를 낳아야할 상황이니 병원비도 많이 나올거고..

산후조리원에 가지 않으려면 집이 좀 커서 장모님이 와계서도 될 정도는 되야 하는데,

두사람 누우면 꽉차는 원룸에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 두 칸짜리를 얻을 돈도 없고..

결국 별 수 없이 전주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애를 낳아야 할 것 같다.

장모님 몸이 편찮으시니 어쩔 수 없이 산후조리원에 가야할 것 같고..

 

문제는 그 기간동안 내가 아내와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 달 말에 내려가서 8월 중순에 애를 낳고 삼개월 쉰다고 하면

한 5개월 정도를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거 심하게 고민된다.

더더구나 다른 일도 아니고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뜻깊은 순간/기간이 아닌가!!

 

과연 출산, 산후 기간동안 내가 아내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맞는가?

함께 있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내가 이런 분리를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 들여야만 하는가?

 

결혼 할 때가 생각난다.

그 때 난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했었고 아내는 전주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남들은 다들 주말 부부로 살아야지 어떻게 하냐고 말했고,

우리는 헤어져 있으려면 뭐하러 결혼하냐고 했었다.

단지 같이 있으려는 이유 하나로 난 엘지를 그만뒀고

회사를 옮겨 전주로 내려갔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내와 같이 있고 싶다.

일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일은 언제나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때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선택이 모두가 말리는 일이어도 그 가치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