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anuary 29, 2014

서핑과 전도

서퍼들을 보면서 전도와의 연관성이 떠올랐다. 서퍼들은 일단 바다에 익숙해져야 하고 자신의 보드에 익숙해져야 한다. 좋은 파도를 고를 줄 알아야 하고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파도에 올라타서 서핑을 즐길 수가 있다. 

서퍼와 바다의 관계는  성도와 세상의 관계와 비슷하다. 교회에 다닌다고 세상을 등한시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래선 안 된다. 세상을 알아야 한다. 내가 사는 동네는 물론이고 내 직장, 나라,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간과 세상/바다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파도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파도란 나와 마주치는 개개인들이라 하자. 우리는 일생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서퍼들에게 그렇듯 모든 파도가 서핑하기에 좋은 파도가 아니다. 그래도 좋은 파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바다에 뛰어들어 수많은 파도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파도들을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 복음/서핑을 전할/할 기회가 포착된다. 일단 좋은 관계를 형성해놓으면 대화의 주제가 다양해지고 깊이도 점점 깊어진다. 그러다가 대화 도중 기독교 신앙과 접촉점이 생기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해서, “나는 크리스천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에 감화 받아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삶이 나에게 미친 좋은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나는 당신에게 이러한 삶이 어떠한지 이야기해주고 싶다”는 류의 말을 한다. 그러려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이는 서퍼들이 자신의 보드를 잘 알고 그 보드 위에 잘 설 줄 아는 능력과 마찬가지이다.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어떤 영적인 필요를 드러내었는데도/좋은 파도가 왔는데도, 그에 맞는 신앙적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면/파도에 올라타지 못한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래서 서퍼는 또한 자신의 보드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신앙인들에게 보드란 성경과 같다. 바다위에서 서퍼를 지탱해주는 것이 보드인 것처럼, 세상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성경이다. 서퍼들이 보드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말씀 위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균형 잡힌 성경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도를 타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물 속으로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오랜만에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었다. 저절로 실눈을 뜨게 할만큼 눈부신 태양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는 푸른 바다. 남극과 가까워서 물이 차지만 아이들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그 차가운 물에서도 마냥 웃으며 파도와 어울려 놀고 있었다.  어른들은 수영을 하기도 하고 서핑을 하기도 하고 모래사장에 누워있기도 했다. 나는 모래밭이나 물에 들어가지 않고 바닷가 벤치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바람이 세지 않아서 그런지 멀리 남섬을 오가는 여객선도 여유로워 보였고, 가까이 웰링턴 공항에 내리는 각양 각색의 비행기들도 편안해 보였다. 기상청 예보에 의하면 오늘의 최고 기온은 22도라 했다. 햇빛이 강해서 춥지도 덥지도 습하지도 않은 날씨, 쾌적하다는 말이 딱 맞는 날씨였다. 날씨가 좋을 때 웰링턴의 여름은 최고라더니 과연 그러했다. 햇빛도 바람도 파도도 사람들도 모두 좋았던 하루였다.

Monday, January 27, 2014

부끄러운 일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그 분의 살과 피를 나눈 형제 자매들과 한 몸이 되었다면, 그들의 아픔이 내 몸의 아픔처럼 느껴져야 하고, 내 몸의 통증에 반응하듯 즉각적으로 그들의 아픔에 반응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까. 늘상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아직 성찬의 의미가 나에게 체화 되지 못했기 때문인 걸까.
가령, 초대형 태풍 하이옌에 의해 폐허가 된 필리핀 타클로반에서 집도 음식도 없이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 형제, 자매들의 아픔에 나는 왜 좀더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들과의 공간적, 심리적, 민족적 거리감을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 일체감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 단순히 기부금 얼마를 낸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 자매로서 너무 면목이 없는 일이 아닌가. 정말 내 가족이 그런 고난을 당했다면 찾아가서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하지 않겠는가.
고난의 현장이 어디 그 곳 뿐이겠는가.. 성만찬을 통해 구현된 하나됨이 아직도 내 삶에 실현되지 않고 있는데,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고난의 현장을 모른체하며 살고 있는데, 내가 또 무슨 낯으로 성찬에 참여한단 말인가.. 부끄러운 일이다..

Saturday, January 18, 2014

존댓말

이것도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얻게된 생각인데, 어린이들, 10대, 20대, 30대까지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고맙게 여겨진다. 그들이 살아있음이 고맙고 그들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있어야 인간 세상이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없다면 우리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쓰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귀한 생명들인데 존대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Saturday, January 4, 2014

"어바웃 타임"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시간여행에 관한 영화였고 이를 바탕으로 사랑과 행복이 현재/일상을 충실히 살아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름답게 보여준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나서 든 생각: 현재 속에 과거도 미래도 녹아있다. 과거도 현재로서만 경험되어지고 미래도 현재로서만 경험될 뿐이다. 과거를 기억으로 부르든, 미래를 기대로 부르든 그것은 현재에서만 가능한 사태이다. 어떤 과거도 현재로 호출될 수 있고 어떤 미래도 현재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내 현재가 내 과거이며 내 미래이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아들과 함께 산책을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내가 지금 바닷가에 살고 있고 어린 아들이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들과 산책하고 함께 놀아줄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인데, 가끔 그걸 잊을 때가 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하는데, 아둔한 나는 가끔 그걸 잊고 산다.

Wednesday, January 1, 2014

계획없이 시작된 새해

2014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고, 나에겐 아무런 계획이 없다.
한 해의 계획이 없이 새해를 맞이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있었지만 머리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을 뿐,
계획이라는 이름 하에 머물러 있을 만한 것들은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이 여전히 좁은 데다
내가 만난 예수와의 관계를 진정성 있게 나누고 발전시킬만한
사람도 장소도 아직 얻지 못했다.

일은 계속 하고 있긴 하지만 이게 내 일이란 생각이 들진 않는다.
내 일이란게 있을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 일이라 생각하면 안될까.
외연을 부수고 내포만으로 만족하며 살면 안될까.

계획없이 시작된 2014년.
어떻게 마무리될지,
하나님은 또 어떻게 나를 이끌어가실지,
기대되는 한 해의 시작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