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면 어떨까.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완전히 교회에 발을 끊으라는 말은 아니다. 교회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단지 교회 출석이나 헌금을 비롯한 모든 종교적 의무에서 자유로워지라는 의미이다. 주일에 교회에 안가도 되고, 새벽기도 안해도 되고, 십일조 안해도 되고, 교회 모임에 참석 안해도 되는 자유말이다.
만약 이 모든 종교 행위들을 계속 하고 싶다면 순전히 자발성에 의해서 하면 된다. 교회를 졸업한 사람에게 교회는 어떤 종교 행위도 강요하면 안된다. 졸업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종교 행사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하거나 할 수는 있어도, 교회는 그들을 교회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된다. 교회는 늘 새로운 성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만 힘을 쏟아야 한다.
졸업한 교인들은 교회가 그런 교육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교회가 한결 가벼워지지 않겠는가. 교회 이제 그만 다녀도 괜찮을만한 사람들이 교회에 계속 붙어있는 모습을 보니 답답하다. 교회 그만 다니고 가끔만 다녀도 괜찮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상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Saturday, December 31, 2016
Friday, December 30, 2016
2017년 28시간 전
어느덧 2016년도 스물 여덟시간만 남았다.
앞으로 남은 스물 여덟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지낼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설교 준비와 방학 중인 아이를 돌보는 일에 쓰게 될 것 같다.
송구영신은..
성탄절 기간인데 무슨 송구영신.
숫자 하나 6에서 7로 바뀌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성탄절 기간에 송구영신인가..
1월 6일 주현절 전까지는 오직 성육신에 집중할 것이다.
그 후로는 2 주간의 휴가다.
한국에서 놀러오는 친구와 이 땅의 이곳 저곳을 돌아볼 계획이다.
우리 스타일 상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질색이니
가족과 함께 천천히 느릿느릿 최대한 이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휴가를 보낼 예정이다.
2017년에도 역시 특별한 계획은 없다.
계획없이 살아온지 벌써 몇년은 된 것 같다.
계획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몸으로 살련다.
주님이 머리시니 생각은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발로, 손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유대 땅, 이방 땅, 사마리아 땅 가리지 않고 다니셨던 주님의 발로
가난한 자, 병든 자, 세리와 창녀까지도 안아주셨던 주님의 손으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앞으로 남은 스물 여덟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지낼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설교 준비와 방학 중인 아이를 돌보는 일에 쓰게 될 것 같다.
송구영신은..
성탄절 기간인데 무슨 송구영신.
숫자 하나 6에서 7로 바뀌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 성탄절 기간에 송구영신인가..
1월 6일 주현절 전까지는 오직 성육신에 집중할 것이다.
그 후로는 2 주간의 휴가다.
한국에서 놀러오는 친구와 이 땅의 이곳 저곳을 돌아볼 계획이다.
우리 스타일 상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질색이니
가족과 함께 천천히 느릿느릿 최대한 이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휴가를 보낼 예정이다.
2017년에도 역시 특별한 계획은 없다.
계획없이 살아온지 벌써 몇년은 된 것 같다.
계획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몸으로 살련다.
주님이 머리시니 생각은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발로, 손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유대 땅, 이방 땅, 사마리아 땅 가리지 않고 다니셨던 주님의 발로
가난한 자, 병든 자, 세리와 창녀까지도 안아주셨던 주님의 손으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Saturday, December 17, 2016
함께 계시는 하나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예수님의 삶을 보라.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예수를 이름있는 도시에서 태어나게 해주지도 않으셨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해주지도 않으셨고,
부자로 만들어 주지도 않으셨고,
돈 잘 버는 직업을 갖게 해주지도 않으셨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목수/석공일을 하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건사하며 살던 예수가
자신의 가족만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가족이며,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나병환자들, 세리들, 창녀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 주셨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예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그 앞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도록,
이웃을 위해 끝까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도록,
그렇게 예수님의 인격을 도야해 주셨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의 삶을 보고도,
예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을 보고도,
램프의 요정 같은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면,
도대체 예수를 믿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굳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의 삶을 보라.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예수를 이름있는 도시에서 태어나게 해주지도 않으셨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해주지도 않으셨고,
부자로 만들어 주지도 않으셨고,
돈 잘 버는 직업을 갖게 해주지도 않으셨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목수/석공일을 하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건사하며 살던 예수가
자신의 가족만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가족이며,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나병환자들, 세리들, 창녀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 주셨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예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그 앞에서 도망가지 않을 수 있도록,
이웃을 위해 끝까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도록,
그렇게 예수님의 인격을 도야해 주셨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의 삶을 보고도,
예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을 보고도,
램프의 요정 같은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면,
도대체 예수를 믿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굳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Friday, December 16, 2016
성육신
성육신 사건을 신화적으로 본다해도
그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대단하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순전한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인 척' 사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셨다.
신이면서 인간인 척 한것이 아니라, 반신반인으로 산 것이 아니라,
백퍼센트 사람으로 사셨다.
심지어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 몸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지금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그 몸으로 하나님 옆에 계시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보자면
펭귄을 사랑하는 펭귄 보호운동가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펭귄을 구하기 위해
잠깐 동안 펭귄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가능하다는 전제하에).
하지만 임무를 마친 후에도 펭귄의 몸으로 계속 있어야 한다면...?
구원을 위해 성육신을 감행할 정도의 사랑.
나에게는 그러한 사랑이 있는가.
최소한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있기나 한건가..
성육신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도
그리 살지 못하고 있다면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인생인가...
그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대단하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순전한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인 척' 사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셨다.
신이면서 인간인 척 한것이 아니라, 반신반인으로 산 것이 아니라,
백퍼센트 사람으로 사셨다.
심지어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 몸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지금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그 몸으로 하나님 옆에 계시는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보자면
펭귄을 사랑하는 펭귄 보호운동가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펭귄을 구하기 위해
잠깐 동안 펭귄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가능하다는 전제하에).
하지만 임무를 마친 후에도 펭귄의 몸으로 계속 있어야 한다면...?
구원을 위해 성육신을 감행할 정도의 사랑.
나에게는 그러한 사랑이 있는가.
최소한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있기나 한건가..
성육신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도
그리 살지 못하고 있다면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인생인가...
Wednesday, December 7, 2016
마태복음 11:6
하나님 나라 사역에 모든 것을 바친 세례 요한.
그가 선포했던 임박한 심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다.'
이제 곧 모든 악행과 불의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하나님의 영이 예수에게 임하는것을 보았다.
그는 확신했다. 드디어 그 분이 오셨다.
세례 요한은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짖었다.
헤롯왕의 부도덕을 폭로하고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그는 의아해했다.
그가 메시아로 확신했던 예수가 심판의 불을 내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병을 고치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고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며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심판을 실행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확신은 점점 의심으로 변해갔다.
그는 스스로의 확신과 싸웠다.
그는 예수의 입을 통해 분명히 듣고 싶었다.
그가 메시아인지, 메시아가 아닌지..
요한은 임박한 심판만 알고 있었을 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가 확신했던 바는 반만 옳았을 뿐..
자기의 반쪽 깨달음에 확신을 가짐으로 그는 의심의 비탈로 미끄러졌다.
그럴 수 있다.
불완전한 내 판단을 우선시 함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을 이루어주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은 말한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세례 요한같은 사람도 실족할 수 있다.
누구나 실족할 수 있다.
확신은 언제나 의심으로 변할 수 있다..
원인은 늘 우리에게 있다.
그가 선포했던 임박한 심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다.'
이제 곧 모든 악행과 불의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하나님의 영이 예수에게 임하는것을 보았다.
그는 확신했다. 드디어 그 분이 오셨다.
세례 요한은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짖었다.
헤롯왕의 부도덕을 폭로하고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그는 의아해했다.
그가 메시아로 확신했던 예수가 심판의 불을 내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병을 고치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고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며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심판을 실행하고 있지 않았다.
그의 확신은 점점 의심으로 변해갔다.
그는 스스로의 확신과 싸웠다.
그는 예수의 입을 통해 분명히 듣고 싶었다.
그가 메시아인지, 메시아가 아닌지..
요한은 임박한 심판만 알고 있었을 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가 확신했던 바는 반만 옳았을 뿐..
자기의 반쪽 깨달음에 확신을 가짐으로 그는 의심의 비탈로 미끄러졌다.
그럴 수 있다.
불완전한 내 판단을 우선시 함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할 때가 있다.
내가 원했던 것을 이루어주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은 말한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세례 요한같은 사람도 실족할 수 있다.
누구나 실족할 수 있다.
확신은 언제나 의심으로 변할 수 있다..
원인은 늘 우리에게 있다.
Wednesday, November 16, 2016
구체적 소명
2016년 교회력이 이번 주일로 마무리되고 그 다음 주일부터 2017년 교회력이 시작된다.
2017년에는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구체적인 소명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여태까지는 이 곳에 목회자가 없기 때문에 왔다는 소명으로 버텨왔지만 이제부터 좀 더 구체적인 소명을 찾지 않으면 의미는 없고 의무만 있는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목사로 부름을 받았으니 하늘에서(아니면 교회를 통해) 해직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하게 될 일 의미있게 하고 싶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삶은 지루해진다.
하나님께 부여 받은 내 생명을 지루함으로 채우지 않고 좀 더 풍성하게 살아내려면 하나님의 뜻에 연결되는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구약)을 통해 제 2 성전 시대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메시아적 소명을 체득하였듯이, 나 역시 성경을 통해 이 곳에서의 구체적인 내 소명을 새로이 발견해내야 할 것이다.
이 곳에서 나에게 맡겨진 작은 공동체를 잘 섬겨야 한다는 소명은 잘 알고 있지만 뭔가 구체적으로 그 소명을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 역할을, 이들과 같은 신학적 프레임을 공유하고 있는 목사가 올 때까지 이들이 교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 정도로 한정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을 이들의 프레임 너머로 이동하게 만드는 정도까지 확장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들에게 박혀있는 기복적 신앙관이 실로 뿌리가 깊다. 여태껏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크게 거부감이 없을 정도의 내용으로 그들의 신앙적 세계관 바깥으로의 외출을 유도해 보았으나 그것은 잠시일 뿐 다시 기복신앙이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밖은 춥고 집은 따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 시각으로는 그 집이 지금은 따뜻해 보여도 곧 무너질 집이라 차라리 밖으로 나와 새로운 집을 짓고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는 말이 있다. 유튜브만 틀면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형교회 유명 목회자들의 설교를 얼마든 들을 수 있으니, 내 설교로 약간 찝찝해진 그들의 마음을 자기 편인 목사의 설교로 치유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도 목사고 대형교회 목사들도 목사이니 내 말만 들을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뭐 성경 해석이야 어짜피 다양하니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목사의 설교를 주식으로 하고 내 설교는 주일에 한번 외식한다는 느낌으로 맛만 보는 격이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도 예전에는 저들과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했었으니..
사실 그들의 신앙행태가 그렇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야 물론 있겠지만 '거지 나사로 이야기'의 '부자' 같은 사람들은 없다. 아예 그런 부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그 행태를 바꾸려 하겠지만, 우리 성도들 같은 경우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들과 같은 신앙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목사가 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목사가 오면 이들도 더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이제 기복적 설교는 할 수가 없다. 내 개인적 소원을 이뤄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도 할 수가 없다. 그런 기도도 잘 못한다. 나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이기심을 벗어나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 속에서 그런 예수를 만났고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복을 추구하는 다른 목사들도 성경에서 기복적인 예수(?)를 만났을 거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이 곳에 있어야 하는 이상(이 곳에 올 수 있는 목사가 아직 없고, 성도들도 아직은 나를 나가라고 하지 않으니..) 이 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 구체적 소명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간만 보내게 될 것 같으니 말이다.
2017년에는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구체적인 소명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여태까지는 이 곳에 목회자가 없기 때문에 왔다는 소명으로 버텨왔지만 이제부터 좀 더 구체적인 소명을 찾지 않으면 의미는 없고 의무만 있는 삶을 살게 될 것 같다.
목사로 부름을 받았으니 하늘에서(아니면 교회를 통해) 해직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하게 될 일 의미있게 하고 싶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삶은 지루해진다.
하나님께 부여 받은 내 생명을 지루함으로 채우지 않고 좀 더 풍성하게 살아내려면 하나님의 뜻에 연결되는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구약)을 통해 제 2 성전 시대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메시아적 소명을 체득하였듯이, 나 역시 성경을 통해 이 곳에서의 구체적인 내 소명을 새로이 발견해내야 할 것이다.
이 곳에서 나에게 맡겨진 작은 공동체를 잘 섬겨야 한다는 소명은 잘 알고 있지만 뭔가 구체적으로 그 소명을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 역할을, 이들과 같은 신학적 프레임을 공유하고 있는 목사가 올 때까지 이들이 교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 정도로 한정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을 이들의 프레임 너머로 이동하게 만드는 정도까지 확장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들에게 박혀있는 기복적 신앙관이 실로 뿌리가 깊다. 여태껏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크게 거부감이 없을 정도의 내용으로 그들의 신앙적 세계관 바깥으로의 외출을 유도해 보았으나 그것은 잠시일 뿐 다시 기복신앙이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밖은 춥고 집은 따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 시각으로는 그 집이 지금은 따뜻해 보여도 곧 무너질 집이라 차라리 밖으로 나와 새로운 집을 짓고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그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는 말이 있다. 유튜브만 틀면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형교회 유명 목회자들의 설교를 얼마든 들을 수 있으니, 내 설교로 약간 찝찝해진 그들의 마음을 자기 편인 목사의 설교로 치유하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도 목사고 대형교회 목사들도 목사이니 내 말만 들을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뭐 성경 해석이야 어짜피 다양하니 자신들의 입장에 맞는 목사의 설교를 주식으로 하고 내 설교는 주일에 한번 외식한다는 느낌으로 맛만 보는 격이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도 예전에는 저들과 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했었으니..
사실 그들의 신앙행태가 그렇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야 물론 있겠지만 '거지 나사로 이야기'의 '부자' 같은 사람들은 없다. 아예 그런 부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그 행태를 바꾸려 하겠지만, 우리 성도들 같은 경우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아마 그래서 내가 이들과 같은 신앙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목사가 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목사가 오면 이들도 더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이제 기복적 설교는 할 수가 없다. 내 개인적 소원을 이뤄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교도 할 수가 없다. 그런 기도도 잘 못한다. 나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이기심을 벗어나서 십자가의 길을 통해 이웃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 속에서 그런 예수를 만났고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복을 추구하는 다른 목사들도 성경에서 기복적인 예수(?)를 만났을 거라고 하겠지만..
어쨌든 이 곳에 있어야 하는 이상(이 곳에 올 수 있는 목사가 아직 없고, 성도들도 아직은 나를 나가라고 하지 않으니..) 이 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 구체적 소명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시간만 보내게 될 것 같으니 말이다.
Saturday, November 12, 2016
내 주변의 신앙인들
기독교 신앙을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시라고 믿기에 기도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일러준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이 들어주실거야.'
여기서 하나님이 들어주실거라는 말은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No 라고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를 통해 악과 싸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 생각을 한다 해도 그 때의 악은 나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악이다. 체제에 깃들어 있는 악, 사람들을 괴롭히고, 진실을 억압하고, 불의를 행하도록 유혹하는 악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의, 평화, 사랑과 같은 가치들을 이 땅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실현시키며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더 답답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이 주변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시라고 믿기에 기도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일러준다.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해. 하나님이 들어주실거야.'
여기서 하나님이 들어주실거라는 말은 소원을 이루어 주실 거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No 라고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기도를 통해 악과 싸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 생각을 한다 해도 그 때의 악은 나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악이다. 체제에 깃들어 있는 악, 사람들을 괴롭히고, 진실을 억압하고, 불의를 행하도록 유혹하는 악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의, 평화, 사랑과 같은 가치들을 이 땅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실현시키며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더 답답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이 주변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Wednesday, November 9, 2016
타키투스의 시각으로 본 출애굽
타키투스(Tacitus)가 기록한 역사(The Histories)라는 책에 유대인에 대한 평가가 있다(Book Five).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유대인을 이해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이 책에서 타키투스가 이해하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이해는 아마도 그 당시 로마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아닐까 싶다. 그 책에 기록된 내용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언젠가 이집트 전역에 소모성 질환이 창궐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몸에 해를 입었다. 치료책을 강구하기 위해 하몬의 신탁을 찾아갔던 파라오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신의 저주를 입었으니 그들을 다른 땅으로 추방해서 이집트 땅을 정결케 하라는 말을 듣는다. 파라오는 그 신탁을 따라 병에 걸린 사람들을 모두 모아 광야로 쫓아낸다. 광야로 쫓겨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에게 닥친 운명에 순응했으나, 모세라는 사람은 우리의 운명을 신이나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우리에게 닥친 이 어려움을 벗어나자고 동료들을 설득한다. 사람들은 모세의 말에 동의했고 새로운 곳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물 부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게 된다. 모두의 기력이 쇠할 즈음 모세는 들나귀떼를 만나게 되고 그 뒤를 따라가서 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난 그들은 가나안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취하게 된다 (이 외에도 유대인들의 예식이나 관습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많다).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밖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
언젠가 이집트 전역에 소모성 질환이 창궐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몸에 해를 입었다. 치료책을 강구하기 위해 하몬의 신탁을 찾아갔던 파라오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신의 저주를 입었으니 그들을 다른 땅으로 추방해서 이집트 땅을 정결케 하라는 말을 듣는다. 파라오는 그 신탁을 따라 병에 걸린 사람들을 모두 모아 광야로 쫓아낸다. 광야로 쫓겨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들에게 닥친 운명에 순응했으나, 모세라는 사람은 우리의 운명을 신이나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우리에게 닥친 이 어려움을 벗어나자고 동료들을 설득한다. 사람들은 모세의 말에 동의했고 새로운 곳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물 부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쓰러지게 된다. 모두의 기력이 쇠할 즈음 모세는 들나귀떼를 만나게 되고 그 뒤를 따라가서 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난 그들은 가나안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취하게 된다 (이 외에도 유대인들의 예식이나 관습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많다).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밖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
Monday, November 7, 2016
한국의 개혁을 응원한다
"교통사고로 두명 중상, 자동차 범죄자 6명 경찰에 체포, 주택 화재로 네 명 피신, 오토바이 사고로 한 명 사망, 오폐수를 방류한 농장주 사과"
오늘자 뉴질랜드 국내 뉴스 홈페이지의 헤드라인이다. 정치인이나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의 뉴스에서 권력형 비리나 부정부패에 관련된 내용들이 사라질 날들이 오길 기대해본다. 그 시작을 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에서부터 보고 싶다.
멀리서나나 한국의 개혁을 응원한다.
오늘자 뉴질랜드 국내 뉴스 홈페이지의 헤드라인이다. 정치인이나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의 뉴스에서 권력형 비리나 부정부패에 관련된 내용들이 사라질 날들이 오길 기대해본다. 그 시작을 현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에서부터 보고 싶다.
멀리서나나 한국의 개혁을 응원한다.
Wednesday, October 26, 2016
세리장 삭개오
이번 주 교회력 본문(눅 19:1-10)이 삭개오와 관련된 내용이어서 로마 시대 세금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아래 책의 내용이 괜찮은 것 같아서 대략 번역을 해둔다.
혹시 필요한 분이 있을지 모르니..
T. E. Schmidt, “Taxes,” ed. Joel B. Green and Scot McKnight,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2), 806.
그런데 tax farmer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대적 의미로는 채권 추심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세금은 부실 채권이 아니니..
("Jesus through Middle Eastern Eyes"("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를 번역하신 박규태 목사님은 tax farming을 '징세 도급제'로 번역하셨다. 역시 내공이 있는 분이시다.)
tax collector는 세금 징수원, tax farmer는 거금을 들여 세금 징수권을 따낸 지역에서 자기가 투자한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이윤을 남기기 위해 그 밑에 tax collector들을 거느리고 갖은 잔꾀를 부리며 때로는 공갈, 협박까지 불사했을 사람.
삭개오도 tax farmer였다는 사실.
-------------------------------------------------------------------------------------
1. 로마 과세제도
로마가 기원전 63년경에 유대를 합병했을 때, 대제사장 히르카누스는 로마에 공물을 바칠 의무를 짐. 기원전 47년에 율리우스는 공물의 양을 추수의 12.5퍼센트로 낮춰주었고(셀레우시드 왕조 때에는 아마도33%), 안식년에는 세금을 면제해 줌. 헤롯은 처음에 이두메와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공물을 바치도록 되어있었으나 기원전 30년에 이러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짐. 그 후 그는 로마의 방식을 따라서 부를 축적했고 아마 과세 제도도 로마의 표준을 따랐던 것 같음. 헤롯이 죽은 후 로마는 안티파스에게 갈릴리와 페레아지역에 대한 공물을 걷도록 했지만, 유대 지역은 기원후 6년 아켈라우스의 폐위 이후에 로마 총독을 통한 직할 통치를 하면서 산헤드린으로 하여금 로마의 세금을 거두게 함. 요세푸스의 두개의 세금 추정치 중 더 큰 수치에 따르면 헤롯 사후 그 지역의 수익은 연간 800탈렌트에 달했고 이는 4백 8십만 드라크마(1 드라크마는 하루치 품삯)와 같음. 당시 인구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는 일하는 남성을 25만으로 잡을 때 일반 남성이 일년에 3주를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과 같음. 빈곤 경계선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대에 이 정도의 세금은 엄청난 부담으로 여겨졌을 것임.
1.1 세금의 종류
크게 세 종류의 세금이 있음: 토지세, 인두세, 관세.
1.1.1. 토지세: 땅의 모든 소산에 세금을 붙임. 땅이 없는 사람은 면제, 그러나 소작농은 땅 주인에게 소작료를 바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세금을 냄. 소규모 땅 소유자는 면제, 계절 노동자나 어부들은 면제지만 다른 종류의 세금이 있었을 것. 예를 들어, 예루살렘 거주자는 주택세와 판매세를 납부. 토지세는 아마도 10분의 1 정도 였을 것. 이 금액은 지역별로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흉작이나 개인 파산이 있을 경우 손실분은 징세 지역에서 떠맡게 되어있음. 당시 수확량이나, 세금, 소작료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관계로 일반 농민들이 얼마만큼의 조세 부담을 안고 있는지 계산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최저 생활 수준의 삶을 영위하고 있어서 약간의 세금도 큰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임.
1.1.2. 인두세: 주기적인 인구 조사와 관련됨. 금액은 아마도 일년에 1 데나리우스 정도(하루치 일당). 14세부터 65세까지의 남성이 대상일 가능성, 부인 몫까지 내야할 가능성도 있음.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토지세를 내는 사람에 한에서 인두세가 면제될 가능성도 있음.
1.1.3. 관세 제도: 항구나 도시의 입구에서 세금을 받음. 관세율은 2 – 5% 정도. 장거리 여행에는 여러번 세금을 내야했음. 요율과 수수료는 법에 의해 규제됨. 하지만 복잡한 제도와 관세사에게 주어진 세금 부과 권한 때문에 부정이 만연. 촌락 단위 경제였기 때문에 대규모 거래가 이루어지는 큰 도시에는 세금 징수원이 파리처럼 꼬임.
1.2. 세금 징수: 직접세(토지세와 인두세)는 유대 지도자 위원회(산헤드린?)와 그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연단위로 거둠. 관세와 같은 간접세는 farmed 됨: 가장 높은 가격을 미리 내고 한 지역의 세금 징수 권한을 따냄.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임. 세관원(publican)이 아님(publican은 세금징수 단체의 회원을 일컫는 기술적인 용어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30년에 폐지됨). 이러한 텍스 파밍(tax farming) 제도로 로마는 미리 돈을 받았고 텍스 파머는 통행료나 관세에 붙인 수수료를 통해 이윤을 남김. 이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 tax collector (telonai)임. 세리장 삭개오는 다른 징수원(세리)들을 감독하는 텍스 파머임.
2. 세금 징수원
복음서에서 세리라는 타이틀은 확실히 모욕적인 말이었고 창녀와 죄인과 같이 취급됨.
2.1. 텍스 파머(tax farmer)와 부정: 직접세를 걷는 사람과 텍스 파머와의 차이. 텍스파머들은 항상 눈에 띔. 수수료로 먹고 삶. 길가에서 사람을 막고 물품의 일부를 요구하는 행위는 제도화된 강도짓으로 여겨졌고 그 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텍스 파머들 밖에 없음. 수수료 제도가 규제된다고 해도 징수원이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부정이 개입될 여지가 다분함. 사실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이 팔린다는 말은 세금징수액과 통행료를 제일 많이 부과할 사람이 세금 징수권을 얻는다는 말임. 텍스 파머가 그 지역의 세금을 선불로 지급해야 한다는 말은 그가 본래 엄청난 부의 소유자라는 말이고 농경사회에서 그런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고리대금외에는 없을 것. 그래서 랍비들은 텍스 파머가 들어간 집은 부정하다고 여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인격도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임. 이런 연유로 텍스 파머들은 부정의 대명사로 여겨짐.
아래 책의 내용이 괜찮은 것 같아서 대략 번역을 해둔다.
혹시 필요한 분이 있을지 모르니..
T. E. Schmidt, “Taxes,” ed. Joel B. Green and Scot McKnight,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2), 806.
그런데 tax farmer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대적 의미로는 채권 추심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세금은 부실 채권이 아니니..
("Jesus through Middle Eastern Eyes"("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를 번역하신 박규태 목사님은 tax farming을 '징세 도급제'로 번역하셨다. 역시 내공이 있는 분이시다.)
tax collector는 세금 징수원, tax farmer는 거금을 들여 세금 징수권을 따낸 지역에서 자기가 투자한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이윤을 남기기 위해 그 밑에 tax collector들을 거느리고 갖은 잔꾀를 부리며 때로는 공갈, 협박까지 불사했을 사람.
삭개오도 tax farmer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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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과세제도
로마가 기원전 63년경에 유대를 합병했을 때, 대제사장 히르카누스는 로마에 공물을 바칠 의무를 짐. 기원전 47년에 율리우스는 공물의 양을 추수의 12.5퍼센트로 낮춰주었고(셀레우시드 왕조 때에는 아마도33%), 안식년에는 세금을 면제해 줌. 헤롯은 처음에 이두메와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공물을 바치도록 되어있었으나 기원전 30년에 이러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짐. 그 후 그는 로마의 방식을 따라서 부를 축적했고 아마 과세 제도도 로마의 표준을 따랐던 것 같음. 헤롯이 죽은 후 로마는 안티파스에게 갈릴리와 페레아지역에 대한 공물을 걷도록 했지만, 유대 지역은 기원후 6년 아켈라우스의 폐위 이후에 로마 총독을 통한 직할 통치를 하면서 산헤드린으로 하여금 로마의 세금을 거두게 함. 요세푸스의 두개의 세금 추정치 중 더 큰 수치에 따르면 헤롯 사후 그 지역의 수익은 연간 800탈렌트에 달했고 이는 4백 8십만 드라크마(1 드라크마는 하루치 품삯)와 같음. 당시 인구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는 일하는 남성을 25만으로 잡을 때 일반 남성이 일년에 3주를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과 같음. 빈곤 경계선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 시대에 이 정도의 세금은 엄청난 부담으로 여겨졌을 것임.
1.1 세금의 종류
크게 세 종류의 세금이 있음: 토지세, 인두세, 관세.
1.1.1. 토지세: 땅의 모든 소산에 세금을 붙임. 땅이 없는 사람은 면제, 그러나 소작농은 땅 주인에게 소작료를 바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세금을 냄. 소규모 땅 소유자는 면제, 계절 노동자나 어부들은 면제지만 다른 종류의 세금이 있었을 것. 예를 들어, 예루살렘 거주자는 주택세와 판매세를 납부. 토지세는 아마도 10분의 1 정도 였을 것. 이 금액은 지역별로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흉작이나 개인 파산이 있을 경우 손실분은 징세 지역에서 떠맡게 되어있음. 당시 수확량이나, 세금, 소작료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관계로 일반 농민들이 얼마만큼의 조세 부담을 안고 있는지 계산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최저 생활 수준의 삶을 영위하고 있어서 약간의 세금도 큰 부담으로 느껴졌을 것임.
1.1.2. 인두세: 주기적인 인구 조사와 관련됨. 금액은 아마도 일년에 1 데나리우스 정도(하루치 일당). 14세부터 65세까지의 남성이 대상일 가능성, 부인 몫까지 내야할 가능성도 있음.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토지세를 내는 사람에 한에서 인두세가 면제될 가능성도 있음.
1.1.3. 관세 제도: 항구나 도시의 입구에서 세금을 받음. 관세율은 2 – 5% 정도. 장거리 여행에는 여러번 세금을 내야했음. 요율과 수수료는 법에 의해 규제됨. 하지만 복잡한 제도와 관세사에게 주어진 세금 부과 권한 때문에 부정이 만연. 촌락 단위 경제였기 때문에 대규모 거래가 이루어지는 큰 도시에는 세금 징수원이 파리처럼 꼬임.
1.2. 세금 징수: 직접세(토지세와 인두세)는 유대 지도자 위원회(산헤드린?)와 그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연단위로 거둠. 관세와 같은 간접세는 farmed 됨: 가장 높은 가격을 미리 내고 한 지역의 세금 징수 권한을 따냄.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임. 세관원(publican)이 아님(publican은 세금징수 단체의 회원을 일컫는 기술적인 용어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기원전 30년에 폐지됨). 이러한 텍스 파밍(tax farming) 제도로 로마는 미리 돈을 받았고 텍스 파머는 통행료나 관세에 붙인 수수료를 통해 이윤을 남김. 이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 tax collector (telonai)임. 세리장 삭개오는 다른 징수원(세리)들을 감독하는 텍스 파머임.
2. 세금 징수원
복음서에서 세리라는 타이틀은 확실히 모욕적인 말이었고 창녀와 죄인과 같이 취급됨.
2.1. 텍스 파머(tax farmer)와 부정: 직접세를 걷는 사람과 텍스 파머와의 차이. 텍스파머들은 항상 눈에 띔. 수수료로 먹고 삶. 길가에서 사람을 막고 물품의 일부를 요구하는 행위는 제도화된 강도짓으로 여겨졌고 그 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텍스 파머들 밖에 없음. 수수료 제도가 규제된다고 해도 징수원이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부정이 개입될 여지가 다분함. 사실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이 팔린다는 말은 세금징수액과 통행료를 제일 많이 부과할 사람이 세금 징수권을 얻는다는 말임. 텍스 파머가 그 지역의 세금을 선불로 지급해야 한다는 말은 그가 본래 엄청난 부의 소유자라는 말이고 농경사회에서 그런 부를 축적하는 방법은 고리대금외에는 없을 것. 그래서 랍비들은 텍스 파머가 들어간 집은 부정하다고 여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인격도 그다지 좋지 않았을 것임. 이런 연유로 텍스 파머들은 부정의 대명사로 여겨짐.
Wednesday, October 19, 2016
설교 준비를 하다가..
교우 가게를 확장 오픈한다고 해서 아침에 가게에 나가보았다.
이 말씀에 비춰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
설교를 그만하고 싶다.
출입문에 오픈일이 하루 늦춰져서 죄송하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보니 내일 오픈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직 정리가 안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네 분 모두 우리 교우이다.
그 가게 주인이신 집사님은 며칠째 밤 12시까지 일하고 있다고 했고,
직원들도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 오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내가 직장 생활 했었을 때가 떠올랐다.
잦은 야근에 회식에 토요일 근무까지.. 힘든 삶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또 설교 준비를 하러 책상에 앉아있다.
어제까지 준비해 놓았던 설교문을 들여다 본다.
예수님이 나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면 예수님은 우리 교우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실까..
다시 화면에 이번 주 설교의 본문(눅 18:9-14)을 띄워놓는다.
세리를 의롭다고 하신 예수님이 보인다.
십일조 잘하고 교회 생활 열심히 해서 복을 받았다고 목소리 높이는, 당신들도 성공하고 싶다면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고 새벽기도하라고 훈계를 늘어놓는 성공한 사업가가 아닌, 가게 운영하느라 주님 말씀대로 이웃을 돌보지 못하고, 교회일에도 잘 참여하지 못하고, 직원들에게 더 많은 급여를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그래서 늘 주님 앞에 죄송한 작은 가게 주인을 의롭다고 하실 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이 말씀에 비춰서 내 자신을 돌아본다.
설교를 그만하고 싶다.
설교 준비를 하는 내 마음은 지금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던 세리와 같은 마음이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찌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한단 말입니까.. 억압받고 학대받는 이웃들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하지 못하는 죄인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까.. 가족들과 편안한 삶을 살아가느라 불우한 이웃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이 죄인이 어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Sunday, October 16, 2016
Saturday, October 15, 2016
누가복음 18:1-8
눅 18:1-8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는 끈질긴 시도를 하고 있지 않다.
과부가 억울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재판장을 찾아가서 정의를 요구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세상의 불의와 싸워야 할 것이다.
끈질기게 정의를 추구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우리의 끈질김 때문에 정의를 실천해 줄 것이다.
하나님은 나쁜 재판장과 달리 정의에 관한 우리의 요구를 속히 들어주실 분이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일은 지금이 아닌 인자가 올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진 후에야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가 오면 하나님은 속히 세상에 정의를 실현시키실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인자의 오심을 마음 속에 새기며 불의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낙심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치셨다.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졸라댔다.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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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재판장 보다 훨씬 나은 분인데 우리는 과부보다 훨씬 못하다.
불의한 재판장 하에서도 정의를 되찾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 과부의 모습인데,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는 끈질긴 시도를 하고 있지 않다.
과부가 억울한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재판장을 찾아가서 정의를 요구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세상의 불의와 싸워야 할 것이다.
끈질기게 정의를 추구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우리의 끈질김 때문에 정의를 실천해 줄 것이다.
하나님은 나쁜 재판장과 달리 정의에 관한 우리의 요구를 속히 들어주실 분이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일은 지금이 아닌 인자가 올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진 후에야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때가 오면 하나님은 속히 세상에 정의를 실현시키실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인자의 오심을 마음 속에 새기며 불의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추구하는 일에 낙심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Wednesday, September 14, 2016
절망과 희망
"희망은 절망이었어"라는 말에서 그가 바라던 희망은
삶 속에서 그가 얻길 바라던 어떤 구체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픈 동생의 병원비를 그만 대고, 원하던 직장에 취직하고, 맘껏 연애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소원들이 희망이라면 아픈 동생이 계속 아프고, 원하던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맘껏 연애할 수 없는 현실은 절망이 된다.
이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기독교의 희망이 하나님 나라라 할 때,
그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은 아직은 순수의 영역에 있다.
그래서 안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구체성의 영역에 놓여져 있다면
그것에 대한 희망도 절망일 때가 많을 것이다.
십자가라는 절망.
그러나
부활도 하나님 나라도 아직은 순수의 영역에 있기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여전하다.
그리고 그 희망 때문에
여타한 소원들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절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 위를 타고 싶다면,
하늘에 희망을 두고 보이지 않는 바람에 의지해도 되지 않겠는가.
(사진은 카이트서핑(kitesurfing)하는 모습)
삶 속에서 그가 얻길 바라던 어떤 구체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픈 동생의 병원비를 그만 대고, 원하던 직장에 취직하고, 맘껏 연애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소원들이 희망이라면 아픈 동생이 계속 아프고, 원하던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맘껏 연애할 수 없는 현실은 절망이 된다.
이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기독교의 희망이 하나님 나라라 할 때,
그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은 아직은 순수의 영역에 있다.
그래서 안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구체성의 영역에 놓여져 있다면
그것에 대한 희망도 절망일 때가 많을 것이다.
십자가라는 절망.
그러나
부활도 하나님 나라도 아직은 순수의 영역에 있기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여전하다.
그리고 그 희망 때문에
여타한 소원들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절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 위를 타고 싶다면,
하늘에 희망을 두고 보이지 않는 바람에 의지해도 되지 않겠는가.
(사진은 카이트서핑(kitesurfing)하는 모습)
먹고 난 이후에
내 눈 앞에 당근이 있다고 해봅시다.
내가 그 당근을 먹었을 때 그 당근은 내 몸 속에서 더 이상 내 눈 앞에 있었던 당근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만약 당근이 내 몸 속에 들어와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나는 그 당근 때문에 죽고 말 것입니다.
내 눈 앞에 있던 당근은 내 몸 속에 들어와서 잘게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그 모양을 잃어야 합니다.
모양을 잃어버린 당근은 어떤 식으로든 내 몸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남는 것은 '나'이지 '당근'이 아닙니다.
먹어서 그 모양을 잃으면 어떡하냐는 걱정하지 마시고 먹어서 없애시기 바랍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전부 내 안에서 부서져야 합니다.
내 안에 들어온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사라지며 남겨진 것들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그것이 그대로 내 안에 있고 나는 앵무새처럼 그 가르침을 되뇌이고만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나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먹고 소화해서 없애버리시기 바랍니다.
남는 건 당근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당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봤자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당신의 몸/삶만 보일 뿐입니다.
소화 불량, 변비, 설사, 복통을 안고 사는 당신의 모습 말입니다.
당근 이야기는 먹고 난 이후에,
당근의 모양이 다 사라진 이후에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당근을 먹었을 때 그 당근은 내 몸 속에서 더 이상 내 눈 앞에 있었던 당근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만약 당근이 내 몸 속에 들어와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나는 그 당근 때문에 죽고 말 것입니다.
내 눈 앞에 있던 당근은 내 몸 속에 들어와서 잘게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그 모양을 잃어야 합니다.
모양을 잃어버린 당근은 어떤 식으로든 내 몸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남는 것은 '나'이지 '당근'이 아닙니다.
먹어서 그 모양을 잃으면 어떡하냐는 걱정하지 마시고 먹어서 없애시기 바랍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전부 내 안에서 부서져야 합니다.
내 안에 들어온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사라지며 남겨진 것들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그것이 그대로 내 안에 있고 나는 앵무새처럼 그 가르침을 되뇌이고만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나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먹고 소화해서 없애버리시기 바랍니다.
남는 건 당근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당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봤자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당신의 몸/삶만 보일 뿐입니다.
소화 불량, 변비, 설사, 복통을 안고 사는 당신의 모습 말입니다.
당근 이야기는 먹고 난 이후에,
당근의 모양이 다 사라진 이후에나 해 주시기 바랍니다.
Tuesday, August 23, 2016
여섯 살 생일
아이가 이제 내일이면 만 여섯 살이 된다.
6 년전이다... 벌써...
아내의 뱃속에서 머리부터 쑥 빠져나오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생명이라는 신비가 아이의 모습으로 나와서 지금까지 6 년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목도 못 가누던 아이가 이제는 뛰고 말하고 글을 읽고 춤추고 노래하고...
아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신비다.
저 생명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저 아이는 누가 키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 최소한일뿐..
지난 6 년동안 나는 신비 체험을 해왔던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고
아이로 인해 생명이 열어가는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이를 키웠는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아이 안에 내재된 생명력에 감응하여 성실하게 응대했을 뿐이다.
생명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이제 아이는 여섯 살이 된다.
앞니가 빠지면 어떡하냐며 걱정하다가도
친구들과 생일 파티에서 놀 일이 생각나면 배시시 웃는 여섯 살 아이가 된다.
어제 아침,
동트기 전 희미한 어둠 속에서 아이가 뜬금없이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었다.
내일 아침에는 내가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
뜬금없이...
하지만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말이기에 뜬금없지 않은... 고맙다는 말을.
6 년전이다... 벌써...
아내의 뱃속에서 머리부터 쑥 빠져나오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생명이라는 신비가 아이의 모습으로 나와서 지금까지 6 년동안 우리 곁에 있었다.
목도 못 가누던 아이가 이제는 뛰고 말하고 글을 읽고 춤추고 노래하고...
아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신비다.
저 생명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저 아이는 누가 키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 최소한일뿐..
지난 6 년동안 나는 신비 체험을 해왔던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고
아이로 인해 생명이 열어가는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이를 키웠는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아이 안에 내재된 생명력에 감응하여 성실하게 응대했을 뿐이다.
생명이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이제 아이는 여섯 살이 된다.
앞니가 빠지면 어떡하냐며 걱정하다가도
친구들과 생일 파티에서 놀 일이 생각나면 배시시 웃는 여섯 살 아이가 된다.
어제 아침,
동트기 전 희미한 어둠 속에서 아이가 뜬금없이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었다.
내일 아침에는 내가 아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
뜬금없이...
하지만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말이기에 뜬금없지 않은... 고맙다는 말을.
Saturday, August 20, 2016
내 안의 욥
고난에 관해 묵상하다가 다시 욥기를 읽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3)
사업이 망했고, 자식들이 죽었고, 내 몸에 중병이 들었다.
아내도 나를 떠났다.
내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찾아와 주었다.
친구들은 7일 동안 아무 말하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다 친구들이 입을 열었고
나는 친구들과 나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에 대해 설전을 벌였다.
나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지쳤다. 죽고 싶었다.
그 때 하나님이 오셨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지 말고 일어서라. 남자답게 일어서라.
정신 차려라. 내가 여기 있다. 네 상대는 너에게 닥친 고난이 아니라 나다.
똑바로 일어서서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봐라. 그리고 내 질문에 대답해라"
그리고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퍼부으셨다.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맥락에 맞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듣고 있자니 왠지 그 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고난 속으로 폭풍처럼 급하게 달려와서
내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까지 어떻게든 나에게 힘을 주시고자 하는
그 마음이 와 닿는 듯 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고난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다.
친구들이 와 주었고
하나님도 와 주었다.
그거면 됐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욥 38:3)
사업이 망했고, 자식들이 죽었고, 내 몸에 중병이 들었다.
아내도 나를 떠났다.
내 소식을 듣고 친구들이 찾아와 주었다.
친구들은 7일 동안 아무 말하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다 친구들이 입을 열었고
나는 친구들과 나에게 닥친 고난의 원인에 대해 설전을 벌였다.
나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 묻고 싶었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지쳤다. 죽고 싶었다.
그 때 하나님이 오셨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지 말고 일어서라. 남자답게 일어서라.
정신 차려라. 내가 여기 있다. 네 상대는 너에게 닥친 고난이 아니라 나다.
똑바로 일어서서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봐라. 그리고 내 질문에 대답해라"
그리고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퍼부으셨다.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맥락에 맞지 않는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듣고 있자니 왠지 그 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고난 속으로 폭풍처럼 급하게 달려와서
내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하시고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까지 어떻게든 나에게 힘을 주시고자 하는
그 마음이 와 닿는 듯 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고난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다.
친구들이 와 주었고
하나님도 와 주었다.
그거면 됐다.
Monday, August 15, 2016
좋은 선생이란
목사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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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졸업생들과 입학생들이 교차하는 이맘 때가 되면 교수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성찰하며, 학생이 죽어 버린 이 시대에 선생으로 입신하려는 열정을 가만히 되씹어 본다. 학생이 없는 시대에 선생으로 살아가는 뜻은 무엇일까? 그 무익한 열정은 무엇일까?
내 경우, 선생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선 ‘나’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알아낸 것을 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앎을 위해서, 그리고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먼저 노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와중에서 넘어졌든 자빠졌든, 다만, 그 노력의 치열한 흔적, 그 흔적의 길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보여 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산정(山頂)에 올라서서 두 다리를 뻗고 산 아래를 향해 두 손을 흔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산정을 향해서 먼저 출발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이며, 그 실수의 경험을 헛되지 하지 않은 사람이며, 그 경험에서 온고지신의 지혜를 닦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선생은 강단 위에서 강단 아래로 정답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정답이 없는 절망 속을, 해결이 없는 배회 속을 얼마나 멋지게 견딜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람이다.
잘해야 그는 정답을 찾기 위한 도정에서 얻은 상흔을 보여 줄 뿐이며, 심지어 오답 투성이의 앎과 삶에서도 섣부른 권태나 냉소에 빠지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용기 있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가르칠 ‘무엇’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르칠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좋은 선생이란 허우적대면서도 격(格)이 있고, 자빠지면서도 멋이 있다는 것 뿐."
-김영민『문화(文化) 문화(文禍) 문화(紋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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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졸업생들과 입학생들이 교차하는 이맘 때가 되면 교수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성찰하며, 학생이 죽어 버린 이 시대에 선생으로 입신하려는 열정을 가만히 되씹어 본다. 학생이 없는 시대에 선생으로 살아가는 뜻은 무엇일까? 그 무익한 열정은 무엇일까?
내 경우, 선생이란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우선 ‘나’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알아낸 것을 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앎을 위해서, 그리고 앎과 삶의 일치를 위해 먼저 노력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와중에서 넘어졌든 자빠졌든, 다만, 그 노력의 치열한 흔적, 그 흔적의 길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보여 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먼저 산정(山頂)에 올라서서 두 다리를 뻗고 산 아래를 향해 두 손을 흔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산정을 향해서 먼저 출발한 사람이며,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이며, 그 실수의 경험을 헛되지 하지 않은 사람이며, 그 경험에서 온고지신의 지혜를 닦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선생은 강단 위에서 강단 아래로 정답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정답이 없는 절망 속을, 해결이 없는 배회 속을 얼마나 멋지게 견딜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람이다.
잘해야 그는 정답을 찾기 위한 도정에서 얻은 상흔을 보여 줄 뿐이며, 심지어 오답 투성이의 앎과 삶에서도 섣부른 권태나 냉소에 빠지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용기 있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선생은 가르칠 ‘무엇’을 지닌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르칠 것이 없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사람일 뿐이다.
다만 좋은 선생이란 허우적대면서도 격(格)이 있고, 자빠지면서도 멋이 있다는 것 뿐."
-김영민『문화(文化) 문화(文禍) 문화(紋和)』중에서-
중환자실에서의 기도
중환자실 병상에 누워 각종 선들을 얼기설기 달고 있는 30대 후반의 그를 보니,
거의 비슷한 모양새로 역시 중환자실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셨던 장모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의 병상 옆에서 나는 기도를 해야했다.
기도를 해주고 싶어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그 곳에 들어갔던 터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보니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었다.
주님께서 그 자리에 이미 와 계시고 이미 그의 아픔을 나눠 지고 계시는데,
내가 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가족들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런저런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해줘야 했다.
입을 열고 마음을 다해 그렇게 기도해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일어나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나는 객관적인 의학 정보와 싸우고 있었다. 통계와 싸우고 있었다. 내 경험과 싸우고 있었다.
객관적인 정보상, 수치상, 경험상 그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퇴원하긴 어려웠다.
안다.
그런데 그걸 믿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뭔가 다른 걸 믿고 싶었다.
하나님이 그를 정상적인 상태로 일으키는 것을 믿고 싶었다.
내 이런 믿음은 여러번 배반 당했었다.
그래도 나는 객기를 발휘하여 똘아이처럼 다시 믿고 싶었다.
사랑의 하나님과 능력의 하나님,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려내십시오, 하나님!!"
이 한 마디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거의 비슷한 모양새로 역시 중환자실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셨던 장모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의 병상 옆에서 나는 기도를 해야했다.
기도를 해주고 싶어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그 곳에 들어갔던 터였다.
그런데 그의 모습을 보니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었다.
주님께서 그 자리에 이미 와 계시고 이미 그의 아픔을 나눠 지고 계시는데,
내가 할 말이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가족들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런저런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해줘야 했다.
입을 열고 마음을 다해 그렇게 기도해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일어나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나는 객관적인 의학 정보와 싸우고 있었다. 통계와 싸우고 있었다. 내 경험과 싸우고 있었다.
객관적인 정보상, 수치상, 경험상 그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퇴원하긴 어려웠다.
안다.
그런데 그걸 믿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뭔가 다른 걸 믿고 싶었다.
하나님이 그를 정상적인 상태로 일으키는 것을 믿고 싶었다.
내 이런 믿음은 여러번 배반 당했었다.
그래도 나는 객기를 발휘하여 똘아이처럼 다시 믿고 싶었다.
사랑의 하나님과 능력의 하나님, 둘 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려내십시오, 하나님!!"
이 한 마디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Wednesday, July 13, 2016
크리스천의 용서
크리스천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따른다.
회개하지 않은 인간들에게도 용서를 베푸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먼저 용서하셨다.
먼저 용서를 베풂으로 죄인이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신다.
만약 용서를 받은 자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무시하고 계속 하나님과 등진채로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하셨다.
그러나 죄인이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용서를 취소하지는 않으신다.
이미 용서하셨다.
회개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용서가 먼저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내 삶의 자리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베풀어진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 잘못된 행위를 고치는 것은 그가 해결할 문제다.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할 뿐.
나는 용서하고 사랑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셨듯.
- 미로슬라브 볼프의 "Free of Charge"를 읽다가...
회개하지 않은 인간들에게도 용서를 베푸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먼저 용서하셨다.
먼저 용서를 베풂으로 죄인이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신다.
만약 용서를 받은 자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무시하고 계속 하나님과 등진채로 살아갈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하셨다.
그러나 죄인이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용서를 취소하지는 않으신다.
이미 용서하셨다.
회개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용서가 먼저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받은 용서를
내 삶의 자리에서 되풀이하는 것이다.
베풀어진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 잘못된 행위를 고치는 것은 그가 해결할 문제다.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할 뿐.
나는 용서하고 사랑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셨듯.
- 미로슬라브 볼프의 "Free of Charge"를 읽다가...
Thursday, July 7, 2016
영화 '오베라는 남자'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어떠했는지를 알기 전에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근거로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행위는 유보하는 게 옳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히스토리가 있다.
어떤 인간도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고 역사와 함께 자라고 역사와 함께 나아간다.
그 역사는 나만의 역사가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역사이다.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있고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으며 옆과 옆이 맞물려 있다.
나의 끝으로 누군가의 시작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은 결코 낭비된 인생은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한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내 삶을 내어주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히스토리가 있다.
어떤 인간도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지고 역사와 함께 자라고 역사와 함께 나아간다.
그 역사는 나만의 역사가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역사이다.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있고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으며 옆과 옆이 맞물려 있다.
나의 끝으로 누군가의 시작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은 결코 낭비된 인생은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한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내 삶을 내어주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Monday, June 27, 2016
영화 '곡성'과 믿음
인간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인가?
성경은 마귀를 최고의 유혹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순수하게 인간의 힘만으로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마귀의 유혹을 세 차례나 이긴 사람이 있었다.
예수,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예수가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의 도움이 없이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는 없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가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유지했었기 때문이다.
그 흔들림 없는 믿음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질 수 없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는가.
예수가 믿을 만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미친놈, 귀신 들린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대중들이 더 신뢰했었던 사람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 율법교사 같은 이들이었다.
성경은 마귀를 최고의 유혹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순수하게 인간의 힘만으로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마귀의 유혹을 세 차례나 이긴 사람이 있었다.
예수, 하지만 그도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예수가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의 도움이 없이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는 없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가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유지했었기 때문이다.
그 흔들림 없는 믿음을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질 수 없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는가.
예수가 믿을 만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미친놈, 귀신 들린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대중들이 더 신뢰했었던 사람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 율법교사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권위를 내세웠다.
예수에게는 외적 권위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신적 권위가 있었다.
예수에게 있는 그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구원자였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보지 않고 믿는 것, 확인하지 않고 믿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외부적인 조건들로 시선이 향하면 예수를 믿기 어려워지고,
예수를 믿지 못하면 그는 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믿음으로 살고 의심으로 죽지만 우리는 늘 그 경계에 서있는 듯 하다.
내가 '종구'였다면 나는 '무명'을 믿었을 것인가 '일광'을 믿었을 것인가..
예수에게는 외적 권위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신적 권위가 있었다.
예수에게 있는 그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구원자였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보지 않고 믿는 것, 확인하지 않고 믿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외부적인 조건들로 시선이 향하면 예수를 믿기 어려워지고,
예수를 믿지 못하면 그는 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믿음으로 살고 의심으로 죽지만 우리는 늘 그 경계에 서있는 듯 하다.
내가 '종구'였다면 나는 '무명'을 믿었을 것인가 '일광'을 믿었을 것인가..
Monday, June 13, 2016
자유를 주는 목회
가끔 교인 중에 목사님이 원하시는 목회를 마음껏 하시라고 말해주는 분이 계시다.
나를 위해서 해주는 말이어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마음 속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목사님이 원하는 목회'라는 부분이다.
목회를 목사가 원하는 대로 해서야 되겠는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지..
그렇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많은 목사들이 나름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눈에는 목사들마다 원하는 목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들마다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고 교회를 섬기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교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면 내가 원하는 목회라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에 대한 내 해석'이 담긴 목회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는 성도들을 자유롭게 하는 목회라고 믿기에
교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목회를 마음껏 하고 싶기는 하다.
우리 교인들이 주님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매여있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교회 건물과 조직에도 매여있지 않고
교회의 전통이나 관습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삶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왜 어려워하는 걸까..
나를 위해서 해주는 말이어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마음 속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
'목사님이 원하는 목회'라는 부분이다.
목회를 목사가 원하는 대로 해서야 되겠는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지..
그렇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많은 목사들이 나름대로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에 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눈에는 목사들마다 원하는 목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들마다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고 교회를 섬기는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교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 부분을 고려하면 내가 원하는 목회라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에 대한 내 해석'이 담긴 목회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목회는 성도들을 자유롭게 하는 목회라고 믿기에
교인들에게 자유를 주는 목회를 마음껏 하고 싶기는 하다.
우리 교인들이 주님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매여있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교회 건물과 조직에도 매여있지 않고
교회의 전통이나 관습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삶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왜 어려워하는 걸까..
Monday, June 6, 2016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하나님 나라는 실재/현실인가.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라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실재라고 느낄 수 있는 장소인가.
지역교회는 아니라고 한다면, 보편교회는 그런가.
2천년동안 줄곧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쳐왔지만 하나님 나라를 실재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진입할 수 있다하지 않았나.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도 했고..
'이미'와 '아직'으로 사이를 벌려놓았다고 해도
'이미' 속으로 진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게 아닌가.
그래야 '아직'이 유효해질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최대한 축소해서 본다면 개인의 삶인데,
개인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봤던 자들은 그의 기적에 매료되었던 자들 뿐이었지 않나.
그들 중의 얼마는 그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봤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경험했던 잠깐 동안의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를 통해 사라져버리고..
부활을 통해 경험했던 그리스도와 그 후 성령의 역사로 인해 시작된 교회는 로마의 핍박을 견뎌내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지만, 그 교회가 정말 하나님 나라라면 누가 그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래서 완전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없는 것이고 우리는 가끔씩 하나님 나라란 이런 것인가 하는 순간만을 맛볼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2천년이란 시간이 너무 커보이지만 우주의 역사에 비할 때 2천년이란 그저 찰나의 순간일뿐이니 2천년이란 시간 앞에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다림은 계속되고 참여도 계속되고 절망과 희망도 계속 될 것이다.
그 끝없는 '아직' 속에서 말이다.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라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실재라고 느낄 수 있는 장소인가.
지역교회는 아니라고 한다면, 보편교회는 그런가.
2천년동안 줄곧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쳐왔지만 하나님 나라를 실재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진입할 수 있다하지 않았나.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도 했고..
'이미'와 '아직'으로 사이를 벌려놓았다고 해도
'이미' 속으로 진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게 아닌가.
그래야 '아직'이 유효해질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최대한 축소해서 본다면 개인의 삶인데,
개인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봤던 자들은 그의 기적에 매료되었던 자들 뿐이었지 않나.
그들 중의 얼마는 그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봤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경험했던 잠깐 동안의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를 통해 사라져버리고..
부활을 통해 경험했던 그리스도와 그 후 성령의 역사로 인해 시작된 교회는 로마의 핍박을 견뎌내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지만, 그 교회가 정말 하나님 나라라면 누가 그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래서 완전체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없는 것이고 우리는 가끔씩 하나님 나라란 이런 것인가 하는 순간만을 맛볼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2천년이란 시간이 너무 커보이지만 우주의 역사에 비할 때 2천년이란 그저 찰나의 순간일뿐이니 2천년이란 시간 앞에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다림은 계속되고 참여도 계속되고 절망과 희망도 계속 될 것이다.
그 끝없는 '아직' 속에서 말이다.
Wednesday, May 25, 2016
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눅 18:17).
그런데 어린아이라고 하나님 나라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였다면 그 아이는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받은 아이이다.
아이들에게는 신 개념이 없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 잘 이해를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시키려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교육을 시켜야 한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어린 아이들은 유대교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앙 교육을 꾸준히 받은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그리 쉽지 않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질문이 꽤 많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내 아이의 경우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엉뚱한 이야기를 해댄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내 아이를 예수님 곁에 데리고 갔다해도 예수님은 내 아이를 가까이 부르셔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아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아이를 안키워보셔서 잘 모르시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예수님에게도 어린 동생들이 많이 있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예수님도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잘 모르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을 예수님이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순전한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하면서 천천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비꼬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대하면서 알려고 노력하고, 모르면 모르는체로 지내다가 또 다시 어느 틈엔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렇게 서서히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린아이라고 하나님 나라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였다면 그 아이는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분한 교육을 받은 아이이다.
아이들에게는 신 개념이 없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 잘 이해를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시키려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교육을 시켜야 한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어린 아이들은 유대교 신앙의 가정에서 자라면서 신앙 교육을 꾸준히 받은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그리 쉽지 않다.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질문이 꽤 많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내 아이의 경우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 엉뚱한 이야기를 해댄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내 아이를 예수님 곁에 데리고 갔다해도 예수님은 내 아이를 가까이 부르셔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아했을 것 같다. '예수님이 아이를 안키워보셔서 잘 모르시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예수님에게도 어린 동생들이 많이 있었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예수님도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잘 모르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을 예수님이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순전한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하면서 천천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비꼬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대하면서 알려고 노력하고, 모르면 모르는체로 지내다가 또 다시 어느 틈엔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렇게 서서히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 들이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Monday, May 23, 2016
최소주의 목회
어렸을 때부터 나는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좋아했다. 남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했고 남의 이목을 끄는 것도 싫어했다. 주위에 겉멋이 든 친구들이 있었을 때도 그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을만큼 단순 소박함을 좋아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 성향은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대로이다. 그래서 아마도 나에게 가장 적합한 목회 방식은 최소주의 목회일 것이다. 성도들의 삶에도 최소한으로 개입하고, 교회일도 필수적인 것만 최소한으로 하고, 설교도 단순하고 소박하게 본문에만 집중하고...
신앙생활도 목회도 최소한으로 할 때 여유 공간이 생긴다. 그런 여유 공간들이 있어야 삶에 바람이 통한다. 나에게는 그 바람이 나를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생명(성령)의 바람으로 느껴진다. 그 힘이 있어야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빈 공간을 될 수 있는대로 채우려하지 않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공간을 채우려고 한다. 채우려 하지 않는 나와 채우려는 사람들.. 비워둬야 바람이 통할텐데.. 나는 언제까지 바람을 맞을 수 있을까..
신앙생활도 목회도 최소한으로 할 때 여유 공간이 생긴다. 그런 여유 공간들이 있어야 삶에 바람이 통한다. 나에게는 그 바람이 나를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생명(성령)의 바람으로 느껴진다. 그 힘이 있어야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빈 공간을 될 수 있는대로 채우려하지 않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공간을 채우려고 한다. 채우려 하지 않는 나와 채우려는 사람들.. 비워둬야 바람이 통할텐데.. 나는 언제까지 바람을 맞을 수 있을까..
Tuesday, May 17, 2016
화산 폭발 가능성
집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높이 2800미터짜리 화산이 있는데 지난 2007년 마지막으로 폭발한 이후 지금 또 폭발의 조짐이 보인다고 한다. 요근래 있었던 몇번의 지진이 그 산의 밑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쳤나보다. 산 정상에 있는 화구호의 물 온도가 40도를 넘어섰고 가스 분출량도 많아졌다고 한다. 화산 경보는 폭발 전단계인 레벨 2로 올라갔다. 근처에서 괜찮은 크기의 지진이 한번만 더 있으면 폭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맨눈으로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3년전쯤인가 강도 6.6의 지진도 경험했었는데 이번에는 잘하면 화산폭발까지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 뉴질랜드 자연이 확실히 다이나믹하다.
Tuesday, May 10, 2016
데라와 아브라함
데라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아브람, 나홀, 하란.
하란은 어린 자녀 롯과 밀가, 이스가를 남겨두고 일찍 죽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했지만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조카 롯을 아들처럼 챙겼을 것이다.
또 다른 질녀 중 하나인 밀가는 아브람의 동생(또는 형) 나홀과 결혼을 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죽은 아들 하란의 자식인 손자 롯과 함께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가나안으로 가던 중 하란이라는 지역에 이르렀을때 여정을 멈추고 그곳에 거류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백오 세가 될 때까지 살다가 죽는다.
데라는 왜 가나안까지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렀을까.
왜 다른 지역이 아니고 하란인가.
여기서부터는 상상의 영역이긴 하지만 혹시 데라가 하란에 머물렀다는 표현은 데라가 아들 하란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 아닐까..
자기의 삶의 터전을 떠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아들까지 떠나지는 못한.. 과거에 붙잡힌.. 그래서 새로운 땅으로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의 결정을 존중해 준다.
이제 그만 가나안으로 가시자고 재촉하지 않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거한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슬픔과 외로움에 잠겨 있을 아브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아브람은 새로운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데라와 아브람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아브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란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되면 아브람이 형제 나홀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길을 떠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창세기 28장 10절에 보면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는데 그곳이 하란이었다. 29장에서는 야곱이 어느 우물가에서 하란에서 온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냐고 묻고 그들이 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람은 하란을 떠났지만 나홀과 그의 자손들은 하란에 계속 머물러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아브람은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난다(창 12:4).
먼저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가나안까지 가지 못한 데라와 달리 아브람은 가나안까지 갔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나중에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까지 한다. 아브람은 데라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확실히 데라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란은 어린 자녀 롯과 밀가, 이스가를 남겨두고 일찍 죽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했지만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조카 롯을 아들처럼 챙겼을 것이다.
또 다른 질녀 중 하나인 밀가는 아브람의 동생(또는 형) 나홀과 결혼을 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죽은 아들 하란의 자식인 손자 롯과 함께 자신의 삶의 터전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가나안으로 가던 중 하란이라는 지역에 이르렀을때 여정을 멈추고 그곳에 거류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백오 세가 될 때까지 살다가 죽는다.
데라는 왜 가나안까지 가지 않고 하란에 머물렀을까.
왜 다른 지역이 아니고 하란인가.
여기서부터는 상상의 영역이긴 하지만 혹시 데라가 하란에 머물렀다는 표현은 데라가 아들 하란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이 아닐까..
자기의 삶의 터전을 떠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아들까지 떠나지는 못한.. 과거에 붙잡힌.. 그래서 새로운 땅으로의 여정을 계속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의 결정을 존중해 준다.
이제 그만 가나안으로 가시자고 재촉하지 않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거한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슬픔과 외로움에 잠겨 있을 아브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아브람은 새로운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데라와 아브람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아브람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란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되면 아브람이 형제 나홀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길을 떠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창세기 28장 10절에 보면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는데 그곳이 하란이었다. 29장에서는 야곱이 어느 우물가에서 하란에서 온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냐고 묻고 그들이 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람은 하란을 떠났지만 나홀과 그의 자손들은 하란에 계속 머물러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아브람은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난다(창 12:4).
먼저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가나안까지 가지 못한 데라와 달리 아브람은 가나안까지 갔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나중에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기까지 한다. 아브람은 데라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확실히 데라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Wednesday, May 4, 2016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 약 115번 등장한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에 church로 번역되어있다. 처치는 kirche라는 독일어에서 유래했고 좀더 거슬러가면 Kuriakos라는 그리스어에 닿는다. Kuriakos의 어근이 kurios이기 때문에 처치는 주님께 속한, 주님의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교회로 번역되어 있는 원어는 kuriakos가 아니라 ecclesia이다.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소집된 민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는 일년에 몇차례씩 나라일을 결정할 때마다 소집되는 최고 민회였다. 제정 로마 시대에는 그 역할이 아테네 때만큼 크지는 않았겠지만 로마시대에도 각도시의 제반 사항들을 결정하는 민회인 에클레시아가 있었을 것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썼을 때 확실히 그들은 건물로서의 교회를 머리 속에 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말에 로마나 유대 시스템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요즘은 많이 약해진 것 같지만 아직도 건물 중심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쯤이나 사람들이 교회와 건물을 등치시키지 않을까..
그런데 신약성경에 교회로 번역되어 있는 원어는 kuriakos가 아니라 ecclesia이다. 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소집된 민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는 일년에 몇차례씩 나라일을 결정할 때마다 소집되는 최고 민회였다. 제정 로마 시대에는 그 역할이 아테네 때만큼 크지는 않았겠지만 로마시대에도 각도시의 제반 사항들을 결정하는 민회인 에클레시아가 있었을 것이다.
신약성경 기자들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썼을 때 확실히 그들은 건물로서의 교회를 머리 속에 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말에 로마나 유대 시스템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요즘은 많이 약해진 것 같지만 아직도 건물 중심으로 교회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언제쯤이나 사람들이 교회와 건물을 등치시키지 않을까..
신학: 해석과 번역
다른 학자들도 그렇겠지만, 신학자들도 시대적 한계 속에서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신학자의 경우 그것은 신학적 해석일 것이다. 일부 신앙인들에게는 해석없이 주님의 뜻을 가급적 문자적으로 추구하며 사는 방식도 가능하겠지만,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인간 이성의 지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니, 신앙의 지적인 부분에 도움이 되는 해석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사는 삶에 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무조건 믿어라 보다는 '이러이러하니 믿어라'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사건 역시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다. 유대교의 해석을 따르자면 메시아는 이교도에 의해 사형당해서는 안되는 존재이고 역사의 중간에 부활이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해졌을 것이고 부활을 경험했던 제자들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진행되었다. 그 중 바울의 해석이 가장 정교했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 해석에 설득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유대교 신앙에서 벗어났다.
요즘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까? 그렇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천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천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필요하다. 특히나 과학적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관이 과학이라면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관은 구약적 세계관이었고 바울과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면 과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는 해석과 함께 신학과 타 학문간의 해석적 번역(단순한 언어 번역이 아닌 학제간 번역)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수준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 언어를 신학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하고 신학 언어를 과학 언어로 번역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과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심리학, 문학, 예술 등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각 분과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고 각 분과적 언어를 신학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막무가내식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수준으로 말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학제간 고급 번역요원들을 양성해 내는 사업을 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이일에 지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사건 역시 그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다. 유대교의 해석을 따르자면 메시아는 이교도에 의해 사형당해서는 안되는 존재이고 역사의 중간에 부활이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다. 이로 인해 그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해졌을 것이고 부활을 경험했던 제자들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진행되었다. 그 중 바울의 해석이 가장 정교했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 해석에 설득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유대교 신앙에서 벗어났다.
요즘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까? 그렇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천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천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이 여전히 필요하다. 특히나 과학적 사고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관이 과학이라면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서도 하나님 나라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관은 구약적 세계관이었고 바울과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면 과학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는 해석과 함께 신학과 타 학문간의 해석적 번역(단순한 언어 번역이 아닌 학제간 번역)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수준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 언어를 신학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하고 신학 언어를 과학 언어로 번역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과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 심리학, 문학, 예술 등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각 분과적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고 각 분과적 언어를 신학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막무가내식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수준으로 말이다. 한국 교회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학제간 고급 번역요원들을 양성해 내는 사업을 장기적으로 추진하고 이일에 지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Saturday, April 30, 2016
일곱살 아이(만 다섯 살)
이 나라에서는 사람들의 나이를 다 만으로 세기 때문에 내 아이가 다섯살이라는 생각만하고 살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나이셈법으로 계산해보면 내 아이가 벌써 일곱살이다. 아이가 좀 전에 엄마와 자러들어가면서 내 방에 와서 나를 안아주고 뽀뽀를 해주고 갔다. 나는 일곱살 때 내 아빠를 안아주거나 아빠에게 뽀뽀를 해 준 기억이 없다. 내 기억 속에 아빠는 엄한 아버지였고 같이 있으면 그다지 편하지 않은 아빠였다.
자라면서 나는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아빠가 되어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다행히 내가 마음먹은대로 나는 내 아들에게 좋은 아빠, 같이 있고 싶은 아빠가 되었다. 아이는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엄마와 같이 자러들어가고 절반 정도는 나와 같이 자러들어간다. 간혹 내가 자줘야 하는 날에 일이 있어서 아이게게 "오늘은 엄마랑 잘래?" 라고 하면 화를 내면서 울려고 한다. 엄마만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되지만 아이가 나를 그만큼 좋아해주니 고맙기도 하다.
아이는 오늘처럼 엄마랑 자러들어갈 때는 꼭 나한테 와서 포옹을 해주고 뽀뽀를 해주고 간다. 그런데 그 포옹이 그냥 대충 마지못해 하는 포옹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 깊이 안아주는 진짜 포옹이다. 그게 참 고맙다. 아이한테도 고맙고, 내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얻지 못했던 부자간의 살가움과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는 것도 고맙다.
이제 2주간의 텀브레이크가 끝나고 다음주 월요일이면 아이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다. 부끄러움이 많은 것을 보면 영락없이 내 어릴 적 모습과 똑같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부끄러워할 때 절대 아이를 다그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나도 부끄러움이 많았고 그 때 나를 채근하는 어른들이 싫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앞에 나서는 게 싫은데 왜 어른들은 자꾸 앞에 나가서 뭘하라고 하는지 정말 싫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를 채근하지도 않고 내 아이에게 '사내녀석이 그렇게 부끄러움이 많아서 어쩌냐'고 얘기하는 한국 사람들에게서 내 아이를 보호해주기도 한다.
나는 아이에게 될 수 있는대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성장하면서 스스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스트레스외에 부모나 사회로부터 부과되는 스트레스는 가급적 겪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컸으면 좋겠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아쉽게도 부모 마음이 다 같지는 않다.
자라면서 나는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아빠가 되어야겠다고 늘 생각했다. 다행히 내가 마음먹은대로 나는 내 아들에게 좋은 아빠, 같이 있고 싶은 아빠가 되었다. 아이는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엄마와 같이 자러들어가고 절반 정도는 나와 같이 자러들어간다. 간혹 내가 자줘야 하는 날에 일이 있어서 아이게게 "오늘은 엄마랑 잘래?" 라고 하면 화를 내면서 울려고 한다. 엄마만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되지만 아이가 나를 그만큼 좋아해주니 고맙기도 하다.
아이는 오늘처럼 엄마랑 자러들어갈 때는 꼭 나한테 와서 포옹을 해주고 뽀뽀를 해주고 간다. 그런데 그 포옹이 그냥 대충 마지못해 하는 포옹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서 깊이 안아주는 진짜 포옹이다. 그게 참 고맙다. 아이한테도 고맙고, 내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얻지 못했던 부자간의 살가움과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는 것도 고맙다.
이제 2주간의 텀브레이크가 끝나고 다음주 월요일이면 아이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다. 부끄러움이 많은 것을 보면 영락없이 내 어릴 적 모습과 똑같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부끄러워할 때 절대 아이를 다그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나도 부끄러움이 많았고 그 때 나를 채근하는 어른들이 싫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앞에 나서는 게 싫은데 왜 어른들은 자꾸 앞에 나가서 뭘하라고 하는지 정말 싫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를 채근하지도 않고 내 아이에게 '사내녀석이 그렇게 부끄러움이 많아서 어쩌냐'고 얘기하는 한국 사람들에게서 내 아이를 보호해주기도 한다.
나는 아이에게 될 수 있는대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성장하면서 스스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스트레스외에 부모나 사회로부터 부과되는 스트레스는 가급적 겪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컸으면 좋겠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아쉽게도 부모 마음이 다 같지는 않다.
Thursday, April 28, 2016
아내와 재즈
오늘 재즈 콘서트를 다녀왔다.
키위 친구가 내 티켓 값도 자기가 지불할테니 같이 가겠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인근 사립학교 홀을 빌려서 하는 콘서트였는데 연주자들은 전국구 실력자들이었다.
피아노, 더블베이스, 드럼으로 이루어진 수준급의 남성 삼인조 밴드였다.
그런데 한참 재즈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에 흠뻑 젖어있던 순간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거참 신기하게도 불현듯 집에 있는 아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냥 아내가 옆에서 나와 함께 이 음악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헤어진지 한시간도 안됐는데 말이다.
아내의 부재가 재즈라는 존재를 무화시키는 순간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내의 부재가 아내의 존재를 더 강하게 내 내면에 불러일으켰고
그러면서 그 '없음으로 있는 아내'가 내 안에 가득 차있었던 재즈를 밀어내고 만 것이다.
압도적인 환경을 무화시키는 존재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밤이었다.
키위 친구가 내 티켓 값도 자기가 지불할테니 같이 가겠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인근 사립학교 홀을 빌려서 하는 콘서트였는데 연주자들은 전국구 실력자들이었다.
피아노, 더블베이스, 드럼으로 이루어진 수준급의 남성 삼인조 밴드였다.
그런데 한참 재즈 특유의 리듬과 멜로디에 흠뻑 젖어있던 순간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거참 신기하게도 불현듯 집에 있는 아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냥 아내가 옆에서 나와 함께 이 음악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헤어진지 한시간도 안됐는데 말이다.
아내의 부재가 재즈라는 존재를 무화시키는 순간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내의 부재가 아내의 존재를 더 강하게 내 내면에 불러일으켰고
그러면서 그 '없음으로 있는 아내'가 내 안에 가득 차있었던 재즈를 밀어내고 만 것이다.
압도적인 환경을 무화시키는 존재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밤이었다.
Wednesday, April 27, 2016
아이 눈 검사를 마치고
아들을 데리고 눈 검사 하는 곳을 다녀왔다. 검안의가 전체적인 눈의 건강상태와 망막검사, 시력검사, 색맹 검사 등을 해줬는데 전부 공짜였다. 검사 결과 아주 건강한 상태라고 했다. 아들이 요즘 티비보는 시간이 늘어나서 티비 시청이 시력에 안좋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지를 물어봤더니 티비는 괜찮다고 한다. 티비보다는 오히려 독서가 눈에 피로감을 많이 준다고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책을 멀리 떨어져서 보게하고 너무 오랫동안 책을 읽게 하지 말라고 한다. 아들이 아직 책보다 티비로 뭘 보는 걸 좋아해서 당분간 눈이 나빠질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도 책을 벌써부터 많이 읽게 하고 싶지도 않고..
아이들은 태어날 때 원시로 태어나서 점점 근시로 변해간다고 한다. 어느 정도 시점에서 그 변화가 멈추면 정상 시력이 되겠지만 진행이 계속되면 근시안이 되어 안경을 써야 한다. 눈의 시력은 안경이라도 써서 잡아줄 수 있지만, 정신의 근시안은 어떻게 고쳐줘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나와 내가족 그 이상을 바라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멀리를 보게할 수 있을까?
시력이 안좋아지면 불편함을 느끼지만 내면의 시력이 약한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멀리 보는 것을 불편해 한다. 나와 내 가족 너머에 있는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을 보고 세계 곳곳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불편해 한다. 그 사람들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이 만들어가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도 보이지 않을 것인데, 이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 없이 자기 신앙 안에서 불편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시각 장애인의 눈을 고쳐주셨다. 아예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눈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고쳐주셔서 갖게 된 그 눈은 근시안도 아니고 원시안도 아니었을 것이다. 멀리 있는 곳도 잘 보고 가까이 있는 곳도 잘 볼 수 있는 건강한 눈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칭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인데 사람들의 영적 근시안도 못 고치고 있다. 갈길이 멀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 원시로 태어나서 점점 근시로 변해간다고 한다. 어느 정도 시점에서 그 변화가 멈추면 정상 시력이 되겠지만 진행이 계속되면 근시안이 되어 안경을 써야 한다. 눈의 시력은 안경이라도 써서 잡아줄 수 있지만, 정신의 근시안은 어떻게 고쳐줘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나와 내가족 그 이상을 바라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멀리를 보게할 수 있을까?
시력이 안좋아지면 불편함을 느끼지만 내면의 시력이 약한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멀리 보는 것을 불편해 한다. 나와 내 가족 너머에 있는 이웃과 사회적 약자들을 보고 세계 곳곳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불편해 한다. 그 사람들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이 만들어가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도 보이지 않을 것인데, 이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 없이 자기 신앙 안에서 불편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시각 장애인의 눈을 고쳐주셨다. 아예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눈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고쳐주셔서 갖게 된 그 눈은 근시안도 아니고 원시안도 아니었을 것이다. 멀리 있는 곳도 잘 보고 가까이 있는 곳도 잘 볼 수 있는 건강한 눈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칭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인데 사람들의 영적 근시안도 못 고치고 있다. 갈길이 멀다...
Wednesday, April 20, 2016
죽음 이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뭔가를 계속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근래에는 죽음 이후로도 부족해서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까지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냥 하나님 나라와 부활이면 족한데, 죽음 이후에 대해 책 한권씩 써내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 이후는 그냥 희망으로 남겨두고 현재는 그냥 십자가 지는 삶에나 집중하면 안될까?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 이후는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살아있을 때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만 해도 정신없는데, 그 이후의 삶이 천국이든 부활이든 뭐 그리 궁금할까?
그냥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좋은 그 무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뜻대로 열심히 살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근래에는 죽음 이후로도 부족해서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까지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냥 하나님 나라와 부활이면 족한데, 죽음 이후에 대해 책 한권씩 써내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 이후는 그냥 희망으로 남겨두고 현재는 그냥 십자가 지는 삶에나 집중하면 안될까?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 이후는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살아있을 때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만 해도 정신없는데, 그 이후의 삶이 천국이든 부활이든 뭐 그리 궁금할까?
그냥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좋은 그 무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만 생각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뜻대로 열심히 살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Sunday, April 10, 2016
잠언 16:1-3
네가 네 머리로 계획은 짜도 그 계획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 계획이 예스인지 노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네 계획의 외적인 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네 심령을 보신다. 네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신다. 그것이 너의 이기심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한 것인지를 보신다. 그것은 너의 그 그럴싸한 계획으로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네 심령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채우라. 그리고 거기에 네 노력, 네 열심, 네 성취까지 모두 하나님께 드려라. 그러면 네 계획에 오케이 사인이 날 것이다.
Friday, April 8, 2016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기적을 믿지 않는다니.. 그럴 수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주에 지구라는 별이 있다는 것이 기적 아닌가..
138억 광년에 달하는 이 드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유일한 별이 지구다.
물론 앞으로 생명체가 살고있는 별이 발견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관측가능한 수많은 별들 중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닌가?
진화를 믿는다 해도
무기물에서 유기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기적이 아닌가..
어떻게하면 무기물에서 유기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확률로 따지면 정말 얼마나 미미한 확률이겠는가?
나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이 팍팍한 인생, 닫힌 법칙의 세계에서 그 틀 너머를 꿈꿀 수 있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은가 보다. 꽉막힌 우주보다 틈이 있는 우주, 새로운 차원으로 열려있는 우주가 더 좋지 않은가? 실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계속 확장되고 있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부활에 대해서도 올바른 자세는 '그런 거 없다' 보다는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여야 하지 않을까? 무생물들만 있던 지구에 생물이 나타났을 때, 식물들만 있던 지구에 동물이 나타났을 때, 짐승들만 있던 지구에 인간이 나타났을 때, 인간들만 있던 지구에 부활한 인간이 나타났을 때, 그런게 다 기적 아닌가?
하지만..
무엇보다 우주에 지구라는 별이 있다는 것이 기적 아닌가..
138억 광년에 달하는 이 드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유일한 별이 지구다.
물론 앞으로 생명체가 살고있는 별이 발견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까지 관측가능한 수많은 별들 중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닌가?
진화를 믿는다 해도
무기물에서 유기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기적이 아닌가..
어떻게하면 무기물에서 유기체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
확률로 따지면 정말 얼마나 미미한 확률이겠는가?
나는 기적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이 팍팍한 인생, 닫힌 법칙의 세계에서 그 틀 너머를 꿈꿀 수 있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은가 보다. 꽉막힌 우주보다 틈이 있는 우주, 새로운 차원으로 열려있는 우주가 더 좋지 않은가? 실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다. 계속 확장되고 있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부활에 대해서도 올바른 자세는 '그런 거 없다' 보다는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다'여야 하지 않을까? 무생물들만 있던 지구에 생물이 나타났을 때, 식물들만 있던 지구에 동물이 나타났을 때, 짐승들만 있던 지구에 인간이 나타났을 때, 인간들만 있던 지구에 부활한 인간이 나타났을 때, 그런게 다 기적 아닌가?
Tuesday, March 22, 2016
부활에 관심이 없는 이유
뉴질랜드에서 부활절은 초콜릿 에그를 먹는 날이자 4일간의 연휴를 즐기는 날이다. 비기독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그로 인해 주어진 부활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기간이라기보다는 연휴를 즐기는 날인 것처럼 보인다.
뉴질랜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부활에 관심이 없을까 생각하던 중 한가지 이유가 이웃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기독교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부활은 고문이나 처형같은 실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앙을 가져도 아무런 박해가 없는 뉴질랜드인들을 비롯한 서구 복지국가 사람들에게 부활은 그다지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 듯 보인다.
지금의 삶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있어봐야 약간의 금전문제, 건강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다인 사람들에게 부활은 그냥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내 삶에 별다른 영향을 못 미치는 개념에 불과한 것 같다.
부활이라는 새로운 존재양식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하나님의 새창조와 관련된 실재이다. 즉 우리가 부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서 현재 자연과 인간세상을 억압하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 사라진 완전한 평화의 상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개인의 삶의 바운더리에서 그러한 악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하고 안락함 속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과 인권유린과 각종 체제의 억압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상태를 고대하는 정도가 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이 그런 상태를 고대하려면 나라는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서 학대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그들이 나의 형제요 이웃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예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다가 도달한 결과가 십자가였고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사람은 모두가 다 차별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데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돌이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었고 그 화해의 장을 마련해 준 사람이 예수님이었으며 그를 위해 예수님이 치러야 했던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그로 인한 나의 부활도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Wednesday, March 16, 2016
하나님 나라
나는 하나님 나라(천국)가 좋다.
그 형식이 부활이든, 영혼불멸이든, 전천년이든, 후천년이든, 무천년이든, 새창조든, 저 천국이든, 황금이든, 보석이든, 뭐든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가 좋다.
그냥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만해도 좋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좋다.
이 땅에서, 이 세속의 가치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으며 산다는 그 자체가 좋다.
물론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기에 슬프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적 삶을 살때 마주하게 되는 좌절과 고통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이 주는 힘이 그런 모든 부정적인 현실들보다도 훨씬 크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걸 내 생애 보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나라의 일원으로
선취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그 형식이 부활이든, 영혼불멸이든, 전천년이든, 후천년이든, 무천년이든, 새창조든, 저 천국이든, 황금이든, 보석이든, 뭐든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가 좋다.
그냥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만해도 좋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좋다.
이 땅에서, 이 세속의 가치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으며 산다는 그 자체가 좋다.
물론 현실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기에 슬프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적 삶을 살때 마주하게 되는 좌절과 고통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이 주는 힘이 그런 모든 부정적인 현실들보다도 훨씬 크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지는 걸 내 생애 보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 나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것이다.
앞으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 나라의 일원으로
선취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하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
Tuesday, March 8, 2016
무능한 목사?
어느 목사 아들이 쓴 무능한 목사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글을 읽었다. 무능하다는 표현은 세속과 교회의 일반적인 관점을 따라서 자신의 아버지를 평가한 말이었다. 설교도 평범하고, 교회도 크지 않고, 지명도도 높지 않은 목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는 말은 아버지가 묵묵히 성실하게 낮은 자리에서 교회를 30년 가까이 섬겼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여기에서 글이 끝났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런데 글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버지가 무능한(?) 목회자였기에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병원도 제대로 못가고 먹을 것도 맘껏 먹을 수 없는 형편에서 살았지만, 나중에 보니 자기는 전문의, 형은 모 전자 책임 연구원, 동생은 한의사가 되어있었고 이는 아버지의 희생과 기도 덕택이었으니 사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복을 자식들에게로 유도한 유능한(?) 목회자였던 것처럼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 글을 꼼꼼히 읽지는 않아서 내 독해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글을 쓴 분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만하다.
삼형제가 모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지는 말자고 다짐했었던 걸 보니 그 환경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류의 글이 인터넷에서 유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경험했던 그렇게 어려웠던 목회 환경을 바꿔보자는 글을 써주면 좋지 않을까?
이런 글들은 목회자가 참고 희생하고 기도하면 자식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쪽으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나는 저 글을 쓴 필자의 아버지와 비슷한 목회를 하신 분들의 자식들이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봤다. 굳이 목회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신약성경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신실한 신앙으로 인해 초기 300년동안 핍박과 궁핍 속에 살았던 걸 보면 신앙이 자식들의 세속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교회에도 부자교회 가난한 교회가 있다는 이 참담한 현실을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실하게 목회하는 목사가 돈이 없어서 자식들 병원에도 못보내고 가족들에게 삼겹살도 한번 못사줄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개탄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쓴이는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졌으니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감사는 아직도 성실하게 목회하면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목사들의 삶을 돕는 쪽으로, 잘못된 교회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표현되면 안될까.
아버지가 무능한(?) 목회자였기에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병원도 제대로 못가고 먹을 것도 맘껏 먹을 수 없는 형편에서 살았지만, 나중에 보니 자기는 전문의, 형은 모 전자 책임 연구원, 동생은 한의사가 되어있었고 이는 아버지의 희생과 기도 덕택이었으니 사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복을 자식들에게로 유도한 유능한(?) 목회자였던 것처럼 느껴지는 글이었다 (그 글을 꼼꼼히 읽지는 않아서 내 독해가 잘못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글을 쓴 분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만하다.
삼형제가 모두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지는 말자고 다짐했었던 걸 보니 그 환경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류의 글이 인터넷에서 유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경험했던 그렇게 어려웠던 목회 환경을 바꿔보자는 글을 써주면 좋지 않을까?
이런 글들은 목회자가 참고 희생하고 기도하면 자식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쪽으로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나는 저 글을 쓴 필자의 아버지와 비슷한 목회를 하신 분들의 자식들이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많이 봤다. 굳이 목회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신약성경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신실한 신앙으로 인해 초기 300년동안 핍박과 궁핍 속에 살았던 걸 보면 신앙이 자식들의 세속적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교회에도 부자교회 가난한 교회가 있다는 이 참담한 현실을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실하게 목회하는 목사가 돈이 없어서 자식들 병원에도 못보내고 가족들에게 삼겹살도 한번 못사줄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개탄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쓴이는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졌으니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감사는 아직도 성실하게 목회하면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목사들의 삶을 돕는 쪽으로, 잘못된 교회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표현되면 안될까.
Friday, March 4, 2016
구별됨에 관하여
모세가 주님께 아뢰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 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이나 저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저 자신과 주님의 백성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백성과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까?" (출 33:15-16)
가나안 땅에 들어갈 즈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더는 같이 안간다. 같이 갔다가는 내가 그들을 다 진멸할지도 모른다 (출 33:3)"는 말을 했고 모세는 위와 같은 말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을 진멸할지도 모르는 하나님인데도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모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매여있는 분임을 모세가 확실히 경험했기에 가능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경배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진멸하려 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언급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그래서 통제불가능한 무서운 분일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말씀에 스스로 매인 분이셨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분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분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었기에 복된 약속이었고, 그 약속을 지키는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유익한 일일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고 했다. 흔히 우리는 이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별된 사람들. 나중에는 분리가 되겠지만 지금은 이땅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는 구별된 삶의 모습들을 정형화하고 그 삶의 모습들을 강요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정형화된 모습들만 넘쳐난다.
그런데 모세의 기도에서 그 구별됨의 근거는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함께 계심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계셔야 우리는 우리의 구별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구별됨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만 우리에게 보여져야 한다. 어떤 환경에 이끌리어 그냥 남들 하는대로 행하는 구별됨이 아니라 실제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인해 보여지는 행동들로 구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실상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보다는 우리 눈에 좋아보이거나 다른 사람들 눈에 좋아보이는 곳 또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구별되어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구별되어 보이는 곳에서 구별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우리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구별되는 것이다. 모세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즈음 하나님이 모세에게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과 더는 같이 안간다. 같이 갔다가는 내가 그들을 다 진멸할지도 모른다 (출 33:3)"는 말을 했고 모세는 위와 같은 말을 하나님께 아뢰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을 진멸할지도 모르는 하나님인데도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모세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매여있는 분임을 모세가 확실히 경험했기에 가능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수송아지 상을 만들어 경배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진멸하려 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언급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그래서 통제불가능한 무서운 분일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말씀에 스스로 매인 분이셨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분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분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었기에 복된 약속이었고, 그 약속을 지키는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유익한 일일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고 했다. 흔히 우리는 이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구별된 사람들. 나중에는 분리가 되겠지만 지금은 이땅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래서 교회는 구별된 삶의 모습들을 정형화하고 그 삶의 모습들을 강요하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정형화된 모습들만 넘쳐난다.
그런데 모세의 기도에서 그 구별됨의 근거는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함께 계심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다른 누구가 아닌 '하나님'으로 우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계셔야 우리는 우리의 구별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그 구별됨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만 우리에게 보여져야 한다. 어떤 환경에 이끌리어 그냥 남들 하는대로 행하는 구별됨이 아니라 실제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인해 보여지는 행동들로 구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실상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보다는 우리 눈에 좋아보이거나 다른 사람들 눈에 좋아보이는 곳 또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구별되어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구별되어 보이는 곳에서 구별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 우리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구별되는 것이다. 모세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Monday, February 29, 2016
수많은 예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나라를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주변과 교류하며 만들어온 자기만의 나라, 저마다 독특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서 각기 다른 가족, 다른 이웃, 다른 사회와 주거니 받거니,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타협하기도 하면서 만들어진 나라, 자기가 왕인 나라를 가지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런 나라들이 서로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하나의 거대한 왕국이 만들어진다. 그 왕국은 국가이기도 하고 초국가이기도 하고 체제이기도 하고 이념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물론 내 나라를 가지고 있다. 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내 나라를 나도 키워왔다. 무역도 하고, 농사도 짓고, 군사력도 기르고,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젊은 날 나는 내 나라의 주권을 예수라는 분에게 넘겨 드렸다. 그 분이 나보다 더 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나는 그 분의 통치에 순종하며 그분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살아오면서 나는 내 주변에서 나처럼 그 분에게 자기 나라의 주권을 양도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기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그 분들 중 다수에게서 내가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섬기는 예수님과 그들이 섬기는 예수님이 다른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말로는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들이 아직도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건가? 아니면 그들이 아니라 내가 잘못인가? 내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건가?
그런데 참 섬뜩한 점은 내가 그들을 보며 했던 생각을 그들도 나에 대해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분명 한 분이신데, 그 분을 따른다는 사람들은 수많은 예수를 섬기고 있다. 섬뜩하다. 나는 내가 섬기는 예수가 진짜 예수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도 그들의 예수가 진짜 예수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예수는 진짜고 당신들의 예수는 가짜라고 싸워야 하나? 아니면 그들의 예수에는 신경끄고 내가 믿는 예수에만 충실하면 되나? 아니면 네 예수 내 예수 다 내려놓고 그냥 적당한 선에서 서로 타협하며 살아야 하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그냥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렇게 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렇게'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상황이 정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나도 잘 모르는 '이렇게'로 사는 수 밖에.. 나는 이렇게, 당신들은 그렇게..
나도 물론 내 나라를 가지고 있다. 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내 나라를 나도 키워왔다. 무역도 하고, 농사도 짓고, 군사력도 기르고,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젊은 날 나는 내 나라의 주권을 예수라는 분에게 넘겨 드렸다. 그 분이 나보다 더 내 나라를 잘 다스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나는 그 분의 통치에 순종하며 그분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살아오면서 나는 내 주변에서 나처럼 그 분에게 자기 나라의 주권을 양도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기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그 분들 중 다수에게서 내가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섬기는 예수님과 그들이 섬기는 예수님이 다른가?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말로는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들이 아직도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건가? 아니면 그들이 아니라 내가 잘못인가? 내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건가?
그런데 참 섬뜩한 점은 내가 그들을 보며 했던 생각을 그들도 나에 대해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분명 한 분이신데, 그 분을 따른다는 사람들은 수많은 예수를 섬기고 있다. 섬뜩하다. 나는 내가 섬기는 예수가 진짜 예수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도 그들의 예수가 진짜 예수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예수는 진짜고 당신들의 예수는 가짜라고 싸워야 하나? 아니면 그들의 예수에는 신경끄고 내가 믿는 예수에만 충실하면 되나? 아니면 네 예수 내 예수 다 내려놓고 그냥 적당한 선에서 서로 타협하며 살아야 하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그냥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렇게 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렇게'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상황이 정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나도 잘 모르는 '이렇게'로 사는 수 밖에.. 나는 이렇게, 당신들은 그렇게..
Thursday, February 11, 2016
뷰티 인사이드
“뷰티 인사이드”라는 영화가 있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남자의 이야기다.
자고 일어나면 그 남자의 모든 외적인 조건이 바뀐다.
외모, 성별, 연령, 인종이 바뀐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속사람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 사람이 한 여자와 결혼을 약속하게 되는데,
그 과정 중에 그 여자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그 남자의 외면이었다.
그녀는 끝없이 변하는 그의 외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사회 관계적 문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잠시동안의 이별 후에 그 여자가 다시 그 남자를 찾아가는데,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 여자가 그 남자의 외모가 아닌 그 남자의 속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외모는 매일 아침 바뀌었지만 그의 속사람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속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외부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내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의 눈을 가진 사람일거라고..
인간의 가치판단은 거의 외부적인 조건 위에 내려지는데
그 외부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내면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만든 상징체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적 자유를 확보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물론 크리스천이라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부적 조건과 상관없이 받아주셨으니 말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8절).”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남자의 이야기다.
자고 일어나면 그 남자의 모든 외적인 조건이 바뀐다.
외모, 성별, 연령, 인종이 바뀐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의 속사람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 사람이 한 여자와 결혼을 약속하게 되는데,
그 과정 중에 그 여자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그 남자의 외면이었다.
그녀는 끝없이 변하는 그의 외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심리적, 사회 관계적 문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잠시동안의 이별 후에 그 여자가 다시 그 남자를 찾아가는데,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 여자가 그 남자의 외모가 아닌 그 남자의 속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외모는 매일 아침 바뀌었지만 그의 속사람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속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외부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내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의 눈을 가진 사람일거라고..
인간의 가치판단은 거의 외부적인 조건 위에 내려지는데
그 외부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내면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 만든 상징체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적 자유를 확보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물론 크리스천이라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외부적 조건과 상관없이 받아주셨으니 말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8절).”
Wednesday, January 27, 2016
탄도
어딘가에서 출발해서 어딘가로 떨어진다.
낙착점은 어디인가.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이제는 관성에 의해 나아가고 있는 중인가..
다큐멘터리에서 힙합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20대의 열정을 힙합에 불태우고 있었다.
일단 그들의 목표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아쉬움을 느끼지만,
그와는 별도로 그들의 에너지를 보면서 나의 20대를 떠올려 보았다.
나 역시 내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탄도의 정점만을 생각했었던 것 같다.
정점을 지나친 포탄이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했을 때 나는 신학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노력했다. 내 에너지를 쏟았다. 열정이 있었다.
좌절이 있었으나 결국 그걸 넘어설 수 있었고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신학공부를 하는 것까지, 거기까지가 내 목표였다.
그 후로 나는 탄도를 따라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러우나 열정이 없다.
목회는 내가 열정을 쏟고 싶은 분야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그려왔던 탄도의 궤적을 거부하지 않았을 뿐...
목회에 열정을 쏟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만났던 예수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성서에서 다른 예수를 만났다면 목회에 열정을 쏟았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만났던 예수는 조직하고 통제하고 교조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도화된 교회의 궤적을 따라갔더라면 나 역시 목회에 열정을 쏟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궤적을 따르길 거부했다.
나는 내 자신에 솔직해져야 한다.
나는 일반적인 한국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는 아니다.
교회라는 조직을 관리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애쓰는 목회자가 아니다.
그런 쪽으로 전혀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 쪽으로 궤도를 수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가고 싶을 뿐이다.
교회와 교회 밖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면서 말이다.
낙착점은 어디인가.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이제는 관성에 의해 나아가고 있는 중인가..
다큐멘터리에서 힙합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20대의 열정을 힙합에 불태우고 있었다.
일단 그들의 목표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아쉬움을 느끼지만,
그와는 별도로 그들의 에너지를 보면서 나의 20대를 떠올려 보았다.
나 역시 내 모든 에너지를 쏟으며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탄도의 정점만을 생각했었던 것 같다.
정점을 지나친 포탄이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가정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했을 때 나는 신학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노력했다. 내 에너지를 쏟았다. 열정이 있었다.
좌절이 있었으나 결국 그걸 넘어설 수 있었고 유학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신학공부를 하는 것까지, 거기까지가 내 목표였다.
그 후로 나는 탄도를 따라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러우나 열정이 없다.
목회는 내가 열정을 쏟고 싶은 분야는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그려왔던 탄도의 궤적을 거부하지 않았을 뿐...
목회에 열정을 쏟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만났던 예수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성서에서 다른 예수를 만났다면 목회에 열정을 쏟았을 지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만났던 예수는 조직하고 통제하고 교조화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도화된 교회의 궤적을 따라갔더라면 나 역시 목회에 열정을 쏟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궤적을 따르길 거부했다.
나는 내 자신에 솔직해져야 한다.
나는 일반적인 한국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는 아니다.
교회라는 조직을 관리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애쓰는 목회자가 아니다.
그런 쪽으로 전혀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 쪽으로 궤도를 수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가고 싶을 뿐이다.
교회와 교회 밖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면서 말이다.
Friday, January 15, 2016
표절 문제
표절 문제로 한국 신학계가 시끌시끌하다.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어떤 교수의 책도 표절로 거론되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표절 논란 이후 그가 보여준 태도에 대한 실망감은 훨씬 크다.
그렇게 밖에 대처할 수 없을까.
그냥 책임을 지면 안될까.. 그 책은 죽이는 걸로 책임을 질 수 없을까..
명예가 문제인가.. 자리가 문제인가..
예수의 제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어떤 교수의 책도 표절로 거론되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표절 논란 이후 그가 보여준 태도에 대한 실망감은 훨씬 크다.
그렇게 밖에 대처할 수 없을까.
그냥 책임을 지면 안될까.. 그 책은 죽이는 걸로 책임을 질 수 없을까..
명예가 문제인가.. 자리가 문제인가..
예수의 제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Friday, January 1, 2016
성탄절과 새해
날씨가 좋다.
최고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오후에는 꽤 더울 것 같다.
아직 성탄절 기간인데 새해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벌써 잊은 것 같다.
한국 교회는 송구영신이라는 이름의 예배로 감사와 기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을 거고..
한국에 있는 동생의 말로는
성탄절 예배 때보다 송구영신 예배에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것과 해가 바뀌는 것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왠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다.
1월 6일 주현절 전까지는 성탄절 기간이다.
세상은 새해를 더 중요시 한다고 해도 교회는 성탄에 더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최고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오후에는 꽤 더울 것 같다.
아직 성탄절 기간인데 새해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벌써 잊은 것 같다.
한국 교회는 송구영신이라는 이름의 예배로 감사와 기복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을 거고..
한국에 있는 동생의 말로는
성탄절 예배 때보다 송구영신 예배에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것과 해가 바뀌는 것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왠지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이다.
1월 6일 주현절 전까지는 성탄절 기간이다.
세상은 새해를 더 중요시 한다고 해도 교회는 성탄에 더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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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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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국에서 방문한 친구가 선물로 탁구 러버를 몇 장 가져왔었다. 내가 써보고 싶은 러버들을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더니 선물로 사 가지고 온 것이었는데 그 중의 1순위가 디그닉스 09C였다. 작년에 한국 방문시 09C를 처음으로 사서, 역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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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탁구 선수들 중에 처음 봤을 때부터 호쾌함이 돋보였던 선수가 일본의 사츠키 오도였다. 사츠키 오도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저 선수가 복싱도 좀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가벼운 스텝이나 빠르고 강력한 스윙을 보고 있자면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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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드디어 새로운 장비를 구입했다. 나름 리서치를 좀 해서 블레이드는 옵차로프 ALC, 전면에는 디그닉스 09C, 후면에는 디그닉스 80을 구매했다. 옵차로프 ALC: 중량은 내가 방문했던 매장에 더 가벼운 것이 없어서 89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