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1, 2012

손 대접하기

몇달간 집에 사람들이 자주 찾아왔다.
그냥 편하게 이사람 저사람 와서 이야기도 하고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유학시절, 내게도 밥을 주었던 사람들,
또는 부담없이 같이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아직까지 많이 생각난다.
편하게 아무때나 찾아가서 밥 한끼 얻어먹을 수 있는 사람,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체면 차리지 않고 나눠먹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서 좋기는 하지만, 문제는 없는 살림에 손님 대접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없으면 없는 대로 먹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출이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
약간 과장해서 사르밧 과부의 심정으로 손님들을 대접하고 있다.
엊그제도 장을 보면서 '이걸로 일주일 버티자' 했는데, 그날 점심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한방에 훅!
그래도, 음식보다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먹는 것보다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하고,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크리스천인 이상,
내가 조금 굶는 한이 있더라도 손 대접하는 일을 멈추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희생없이 사랑을 한다? 당치도 않는 소리다.

Thursday, April 12, 2012

가족의 탄생

"가족의 탄생"(2006)을 보았다.
김영민 선생이 '빼어난 계보학'이라 평한 영화라서 한번 찾아보게 되었는데, 가족이라는 구성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 간략히 서술하자면 가족은 혈연 공동체라는 닫힌 계가 아니며, 핏줄하나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서로 관심을 가져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열린 공동체라는 것.

예수님 역시 가족을 혈연 공동체로서의 닫힌 구성체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 외적 한계를 허문, 즉 중심은 있으되 경계가 없는 열린 공동체로 보았다. 교회란 이런 모습을 현실 세계 속에서 실현해 나가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데, 이의 실현은 이 영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 관심과 돌봄, 나눔, 희생 등을 통해서만 가능해 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생의 귀환은 불필요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왜 그 장면을 불편하게 생각했을까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미 그 어려움 -- 모르는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가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비용--을 겪어내며 만들어진 가족 공동체에 또 다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내가 부지불식간 불편하게 여기고 있음이 그 이유였다. 영화를 보는내내 '아, 가족은 이렇게 열린 공동체여야 해'라는 생각으로 보다가 마지막에 다시 새로운 인물이 가족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나도 모르게  문 - 가족으로 편입되는-을 닫으려는  마음이 생긴 것이었다. 그 문은 늘 열어놔야 하는데 말이다.

Sunday, April 8, 2012

아버지의 편지

예전 신학 공부를 위해 유학했던 시절 초기에 한국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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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향한 부모의 눈물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으나, 내가 흐르는 눈물의 의미는 일반 부모들의 눈물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 아버지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후 흘리셨을 눈물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 당하는 그 광경을 지켜 보시던 하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그 때부터 너를 향하여 눈물 흘릴 때 마다 더욱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고 절제하고 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하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 할 때가 너무 많다. 나도 너를 미국에 보내고 난 후 눈물 속에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던 것이다.


미국 생활을 하다가 때로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네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면 주님께서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


또 다른 눈물의 의미는 주님이 30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눈물이다. 30세에 느닷없이 집을 떠나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는가 하면,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3년 반만에 끝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던 주님을 지켜 보시고 가슴 아파 몸부림치시던 마리아와 요셉의 눈물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너를 미국으로 보낸 후 흐르던 눈물의 의미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너무 너무 감사를 드리고 있다. 아들아, 이제 부터는 육신의 정을 멀리하고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으로 멀리서 너를 지켜보고 너를 위하여 간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너도 이제 부터 육신의 부모 보다는 주님이 그러셨던 것 처럼, 오직 하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죽도록 하늘 아버지께 충성하기를 바란다.


물은 곧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공급하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비유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주님은 실로 물과 같이 살다 가셨다. 물은 가장 낮은 자리에 존재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 십자가의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다. 십자가는 바로 가장 낮은 자리, 자기 자아를 죽이고 욕심을 버린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바다에 이르러서야 물은 다시 하늘로 승천한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의 자리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최고 영적 성숙을 이룬 영광의 자리가 될 것이다.


아들아! 이제는, 일거수 일투족, 생각하는 모든 것,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존재하여라. 주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 하여라. 오직 하늘 아버지의 영광만을 생각하여라..

Tuesday, April 3, 2012

목사와 아내

2007년 8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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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아내와의 사랑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그 분은 아내보다 성도들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아내는 성도 아닌가..
성도가 만 명이면 아내는 만 한 번째 인가..

사역에 장애가 되면 아내를 버릴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결혼을 했는가..

아내를 사역의 도구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다. 사랑은 사람을 도구로 삼는 게 아니다.
아내는 나와 한 몸이다. 아내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이다.

결혼 생활은 또 하나의 성례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혼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나가기 때문
이다. 성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를 결혼 생활을 통해 직
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내를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교회를 위해서 그런다고? 성경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성경이 추구하는 궁극적 지향점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
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자체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하위
개념이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일 뿐이다.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가족이 없
으면 교회도 없고 인간 세상도 없다. 하나님은 교회가 초월적 가족
공동체가 되길 원하시지, 해체적 가족 공동체가 되길 원하시는 게
아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기 가족 만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
님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구성원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다. 이는 가족을 해체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족 간의 사
랑이 밖으로 흘러 넘치는 것을 말한다. 가족을, 아내를 희생시키라
는 말이 아니다.

성도들도 아내도 다 같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아내도 성도이
다. 아내를 희생시킬 이유가 없다. 왜 아내를 희생시키는가..

성도들은 당신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돌보신
다. 그것을 믿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아내는 다른 남자가 아닌 "오직 당신만이" 돌볼 수 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성도들이 싫어하는가?
교회가 싫어하는가?
그 교회를 떠나라. 그것이 사랑이다.
당신의 사랑에 책임을 지라. 당신의 결혼 서약에 책임을 지라. 그렇
지 못할 것이라면 목사의 자리에서 물러서라. 그것이 떳떳하다.

사랑은 자기 기만이 아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고난주간

올해도 어김없이 고난주간이 돌아왔다.
예년에도 이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번 고난주간은 왠지 더 무거운 느낌이다.
이 무거움의 정체가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의 악은 활개를 치고 있고, 그로인해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고, 그런데도 대개의 사람들은 다들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 없어 보이고..
나 역시 내 가족 먹여 살리느라 정신이 없고..
이런 와중에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은 자기 것 없는 삶을 사시다, 외려 자신의 목숨을 세상을 위해 내어 놓기까지 하셨으니.. 아, 참 맘이 무겁다.
생존문제가 차꼬처럼 내 발목을 잡고 있으니 수난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만 볼뿐, 현재로선 달리 그 고난에 동참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아니다...

핑계다.

전복과 욕심

얼마전에 여행을 다녀왔다.
북섬 끝자락에 있는 펠리서 베이라는 곳이었는데, 바다에서 자연산 전복을 잡을 수 있고 야생 물개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복은 규정상 12.5센티미터 이상 크기로 일인당 열 마리만 잡을 수 있었다.
나는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해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같이 간 동료들이 허리까지 물에 잠긴채 바위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더듬더듬 전복을 찾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가을이라 바닷물이 차가운 편이었지만,
자연산 전복을 먹어보겠다는 동료들의 일념을 꺽지는 못했다.
결국 그분들의 수고로 나도 덩달아 자연산 전복을 처음으로 맛보았는데,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크기로 인해 한번 놀라고, 그 싱싱하고 쫄깃한 맛에 또 한번 놀랐다.
해변에서 즉석으로 회를 쳐서 먹고, 남은 것은 숙소로 가지고 와서 볶아먹고, 데쳐먹고, 삶아먹고, 라면에 넣어먹고, 죽도 쑤어 먹고.. 그 귀하다는 자연산 전복이 나중에는 같이 상에 올라온 삼겹살에도 밀리는 신세가 될 정도로 질리도록 먹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이런 생각이 스친다.
'우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귀한 생명을 빼앗은 것일까..'
전복이 10센티 이상 크려면 10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먹은 것은 단순한 조개가 아니라,
그 차가운 바다 밑 바위에 붙어서 10년 동안 버티고 살아온 귀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10년, 그 귀한 10년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과연 나에게, 정당한 이유없이, 한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나는 왜 그걸 먹은 것일까..
먹을 것이 없어서, 몸이 아파서, 배가 고파서 먹은 것이 아니고 그냥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 귀한 생명을 먹어버린 것이다.
동료들은 왜 그리 욕심을 부렸던 것이며, 나는 왜 그들을 제어하지 못했을까..
그냥 한마리씩만 잡아서 맛만 봐도 되었을 터인데, 왜 그토록 많은(물론 1인당 10개 이하이긴 했지만) 전복을 잡았던 것일까..
예전에 마구잡이로 고래를 잡아들이는 사람들을 TV에서 봤을 때 그들을 비난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들과 내가 다를게 뭐가 있나..
나는 과연 전복을 먹은 것인가 내 욕심을 먹은 것인가..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