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October 23, 2013

이제 어디로?

오늘 영주권이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나라에 온지 2년 1개월 만이고, 영주권 신청을 한지 정확히 3개월 만이다.
비자 갱신 없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조건이 주어졌으니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 정말 정신차리고 뭔가 할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일은 사실 이미 정해져 있긴 하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아직 모르겠다.
지금도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고,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시각장애인 부부도 돌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공식적인 목회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나만의 목회를 하며 살아야 하는지..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 이름 없이 욕심 없이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며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하다. 교회도 많고 목사도 많은데, 나같이 제도권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목사는 빠져줘도 괜찮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광야생활, 필요하다면 40년이라도 해야되지 않겠는가..

Monday, October 14, 2013

원목실습1

원목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 공감하며,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내도록 돕는 사람이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필요에 따라 그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모두 고유한 가치를 지닌 그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주인공인, 세상에서 유일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고유한 가치가 담겨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물론 그 가치는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다.
긍정적일 경우 발전시키고 부정적일 경우 반면교사를 삼도록 도와준다.
그러한 과정 중에 성경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에 접속시키면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개별 인물들의 이야기부터 국가와 민족의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놀랍게도 구원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마치 형형색색의 꽃들이 모여 아름다운 꽃꽂이가 만들어지듯이 말이다.
개인의 이야기가 아무리 부정적이고 보잘것 없어보일 지라도,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놓이면 서로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자리를 얻게 된다.
이리저리 부유하던 자신의 이야기가 쉴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성경 이야기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 접속되면,
별볼일 없어보이는 자신의 이야기에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고,
자기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원목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면서 피드백으로 미세하게 각도만 틀어주는 역할.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미리 예상했던대로,
차분히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한 영혼을 찾는 심정으로
꿋꿋이 병실을 헤메고 있다.

성서 해석

성서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일차적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유대인에 의해 기록되었다.
따라서 성서를 '주해'할 때는 가능한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최대한 참조하는 게 옳다. 그러나 성서를 '해석'할 때는 당대의 해석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가령 1세기 성서 텍스트가 쓰여진 당시에 그 텍스트가 해석되던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해석 방식은 동시대를 살아가던 독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해석 방식이었겠지만, 그들의 해석 방식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한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 '2천년전 그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구나' 정도로 끝나지 않겠는가?

성서 해석은 늘 미래를 향해 출렁이며 현재를 넘어서야 한다. 과거에 얼어붙지 않은채 말이다. 그래야 성서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게 아니겠는가. 현재는 고사하고 과거조차 넘어서지 못하는 성서 해석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성서 해석조차 1세기 유대인들의 관점에 붙들어 매어버리면 유대인도 아니고 2천년전 사람도 아닌 우리에게 성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주해는 철저하게 당대의 관점에서 하되 해석은 좀 열어두자. 왜 그리도 과거에 매여있으며, 왜 그리도 과거의 눈으로만 바라보려 하는가.

성찬식

사람은 밥만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먹어야 한다.
말씀의 육화가 예수님이라 할 때,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식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상징적인 행위일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 영혼의 살과 피를 채워야 우리가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예수님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현혹하는 허황된 소리에 귀를 닫고
지며리 성찬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삶을 체화하고 속사람을 살리는 방식만이
참으로 사람이 사는 길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