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목회자는 아니지만 아직은 설교 요청을 가끔 받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목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내 안에 목사의 정체성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니, 내 아들은 일단 자타 공히 목사의 아들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목사의 아들로 성장했다.
목사의 아들답게 내 아들은 당연히 지금까지 매주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려왔다. 그렇지만 나도 잘 알고 있다시피 현재 내 아이는 신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아이답게 자기 수준에서 보는 성경은 말도 안되는 책이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물리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존재이니 실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자기가 교회에 가서 예배 시간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교회에 관심이 없으니 중고등부 모임에 가서 모르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유도 없고 그냥 자기 학교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다고 하고..
여태까지는 가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가서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싫다고 하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이제 강요가 아니라면 교회에 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결심을 분명히 했고 이제 공은 나에게 넘어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내 신념에 따라 내 아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아이의 기독교 신앙과 성경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고쳐주는 일도 같이 진행하기로 했다. 아이는 아직 내가 도달한, 또는 현대 신학이 도달한 성경이나 신앙의 이해에 당연히 도달하지 못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모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일이다.
내 아이는 만 열네 살로 자기 중심성이 강한 사춘기의 시기에 도달해 있기에, 그 시기의 특성을 존중해 주면서 대화를 해 나가기로 했다. 주일에 교회에 안 나가도 되지만 집에서는 아빠 엄마와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아이는 아직 나와 사이가 좋고 내가 하는 말도 잘 듣는 편이다. 나는 가령 성경의 어떤 사건을 이야기할 때 그냥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고, 현대적 의미에서 설명해주고, 그 사건에 대한 여러 다양한 해석들을 알려주고 그 해석들 중에서 자기에게 합당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나와 다르게 자라고 있다. 이곳은 내가 자랐던 환경, 문화와 전혀 다른 곳이다. 아이는 한 살 때부터 이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내가 자랐던 한국이라는 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 나는 나에게 익숙한 한국 문화 속의 아버지처럼 내 아이를 대해서는 안된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내 안에 자연스럽게 새겨져 있는 엄한 가부장적, 권위주의적 아버지의 모습이 발현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이와 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이에게 기독교 신앙을 설명해/보여 주고 아이가 나처럼 예수님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