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31, 2015

어둠은 빛으로 이긴다

어둠은 빛으로 이겨내는 법.
빛을 얼마나 끊임없이 공급하느냐가 관건이다.
실낱같은 빛이라도 끊임없이 공급되기만 하면 어둠은 뚫린다.
그러나 아무리 폭포수와 같은 빛이라도,
그로인해 모든 어두움이 사라진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 빛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어둠은 다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는 빛의 양보다는 지속적인 공급이 더 중요하다.
어둠은 어둠으로 이길 수 있는게 아니다.
어둠은 빛으로 이긴다.
문제는 얼마나 오랫동안 빛을 비출 수 있는가에 있다.

- 2007년에 썼던 글

삶의 하나님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이 생명은 단순히 목숨만을 뜻하지 않고
삶 전체를 의미한다.
호흡과 동시에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 살아감을 삶이라 한다면
생명은 삶과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과 대립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죽으면 할 수 없는 모든 일들,
즉  살아있는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내 삶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을 생명(삶)의 하나님이라 할 때,
하나님은 내 개인의 소망을
우선적으로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생명(삶)을 먼저 고려하시는 분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주장하시고
그것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그 분의 뜻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 소망이
내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우주적 삶의 균형에 위해를 가하는 류의 것이라면
하나님은 내 소망을 이루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럴 경우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것이 아니라
내 기도가
우주 전체의 생명(삶)의 조화를 깨뜨리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내 생명 내 삶이 귀하다면
다른 사람의 삶 역시 귀한 법이다.
생명에 대해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잘아는 존재가
어디에 있겠으며,
그 생명들이 이루어가는 삶에 대해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있겠는가?

생명과 삶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생명의 하나님은 삶의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도 되시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삶의 주인도 되신다.

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내 삶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당신의 뜻에 일치하는 삶이 되길 바라실 것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인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죽었을 때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 뜻, 내 욕심만 추구하고 살다가,
"죽으면 하나님이 나를 책임져주시겠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살아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삶의 하나님이시다.

- 2008년 10월에 썼던 글

Friday, October 16, 2015

주님의 것

노인들을 돌보며 나는 내 노년을 당겨살아 볼 기회를 얻었었다.
가끔 머리 속으로만 그려보았던 노년을 직접 눈으로 손으로 경험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고, 외롭고, 갑자기 죽고 하는 모습들을 2년간 보았다.
원래 욕심이 없던 나지만 노인들과 지내다 보니 더 욕심이 없어졌다.

내 눈에 노인들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던지 돈이 얼마나 있던지간에 다 같아 보였다.
아기들이 다 같아 보이듯, 노인들도 다 같아 보였다.
나도 40년 후엔 저렇게 될 것이었다.

바닷가 저택에 살든 시내의 정부 아파트에 살든 달라 보이지 않았다.
박사 학위자건 고졸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집이 네 채건 한 채도 없건 다들 같아 보였다.
심지어 자식이 있건 없건 배우자가 있건 없건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차이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냥 한 사람의 노인으로서 그들은 다 같은 존재였다.
오랜 세월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은채 살아온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노인이 되면 모든게 없어진다.
건강도 가족도 친구도 다 없어진다.
생각해보면 원래 없던 것들이다.
잠깐 내 곁에 있었을 뿐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건강이든 돈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내 곁에 머물러 있었을 때 잘 지내고
떠날 때 잘 보내주면 된다.
그리고 그냥 주님 만날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아가면 될 것이다.
원래 내 것은 없지만 나는 본래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Thursday, October 15, 2015

신앙 언어

고민이 많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어서 왔다.
그런데 이들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맞나하는 생각이 든다.

강도 만난 유대인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
자기가 사마리아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나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왜 하필 꾸띰(사마리아인을 이르는 경멸적 표현)이 나를 도왔어.. 재수없게..'
이러지 않았을까?

나는 그들과 다른 크리스천이다.
나는 지금 그들의 '신앙 언어'로 소통하고 있다.
내 말을 하고 싶지만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기에 나는 내 말을 못하고 있다.
내 언어를 가르칠까하는 생각도 있지만,
그들의 언어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내 언어를 억지로 가르치고 싶지는 않다.
나야 스스로 그 언어가 불편해져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되었고
이제는 옛 언어가 불편해졌지만,
그들은 아직 그들의 언어에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을 모셔오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 서기관, 레위인들 중에
이 곳에 오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하여, 사마리아인인 나는 유대인인 저들과 동거를 해야 할 상황이다.
내가 다시 유대인이 될 수는 없으니 저들을 사마리아인으로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렇게 그들의 언어로 소통하며 지내야 하나..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요 8:48 - 49)"

Wednesday, October 14, 2015

차원

예수님은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차원'이다.

세상성

모세가 싸우기 어려웠던 대상은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아니라 자기 동족들이었다.
더 정확히는 자기 동족들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집트성'이었다.
자유를 얻었음에도 그 자유에 감사하지 못하고,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던 히브리인들.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그들에게서 '이집트성'을 벗겨내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노력하셨던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세상성'은 또 어떤가..
서로 나누기보다는 더 많이 가지려는 자세, 나/내 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태도, 나 중심성,
끝없는 소유 지향성...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도 모르고
아직도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님이 살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윗 같은 왕을 원했다.
주변 민족들을 다 없애고 자기들 만의 나라를 완성시켜줄 왕을 원했다.
예수님은 그런 왕이 되길 거부했다.
하나님의 마음은 유대인들의 바람과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권세를 잡은 세력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근원부터 위협하는 예수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예수를,
결국 죽이고 만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오늘도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아닌
예수를 죽인 세상 권세와 그들의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이보다 아이러니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