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4:13-35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미스테리이다.
물론 제자들이 처음에는 자기들이 처한 문제에 골몰하느라 자기들 옆에 와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할(27)" 때에도, 자신들이 강권하여 함께 유하자고 할(29) 때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셨을 때에서야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부활의 몸은 현재의 몸과는 질적으로 다른 몸이겠지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아본 경우도 있었던 걸 보면 엠마오로 가는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누가는 이 상황을 제자들의 눈이 가려졌다(16)가 밝아졌다(31)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조차도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못할 정도로 미스테리한 상황인 것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저런 설명들이 있어왔지만 어떤 설명도 만족할 만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부분은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는 데 쓴 두 가지 방법이다.
하나는 성경 해석이었고,
하나는 떡을 떼어 주는 일이었다.
예수님이 제시한 성경 해석은 당시의 전통적인 메시아관을 옹호하는 해석이 아닌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26)의 해석이었다. 그 당시에는 비주류적 해석이었겠지만 예수님의 삶과 일치하는 성경 해석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주기는 했어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까지는 못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단계가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두 번째 방법은 식사를 할 때 예수님이 떡을 들고 축사를 하고 떼어주는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만의 특징적 행동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상적인 식사에서부터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을 때나 최후의 만찬에서까지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행동을 보고 자기들과 함께 있는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아보았다.
그 후 이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른 제자들을 만난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와해되었던 공동체가 재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보여주셨던 방법인 성경 공부와 떡을 떼어 주는 행위를 소중하게 간직했고 교회는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떡을 떼어주는 행위는 단순히 예배시에 성찬식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 듯 싶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다가 몸소 떡이 되어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다. 그 나눔과 희생이 떡을 떼어 주는 행위 속에 상징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공생애 시절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셨을 때 그 식탁에 함께한 사람들은 또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제자들도 있었지만 세리와 창녀, 죄인들도 함께 하지 않았었던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런 이웃들을 품어서 함께 떡을 떼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가르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없다면 상처받고 상한 영혼들이 주님을 만날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교회라는 공동체는 재림 때까지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의 몸의 부재를 대신하는 곳이다. 성령님을 통해 내 안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은 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따뜻한 눈 빛이나 애정어린 손길 등을 느낄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서 기능할 때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나 세상에서 상처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그곳에 모인 성도들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Saturday, April 29, 2017
Friday, April 14, 2017
몸의 부활을 믿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7-39)."
의사였던 누가도 신체성이 없는 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다.
누가 뿐만이 아니라 누가에 앞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도 알았을 것이다. 자기들의 경험이 꿈을 꾸는 것과도 다르고 환상과도 다르다는 것을..
그것이 꿈이거나 환상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바울처럼 그렇게 환상(?)으로 보았다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꿈이나 환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 만남은 영적인 체험과는 다른 어떤 신체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확실히 뭔가 다른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은 그들이 그 때까지 해왔던 경험의 틀을 벗어난 것이었기에, 이제까지 없었던 그 놀라운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오직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부활'이라는 말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몸의 부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몸의 부활을 굳이 주장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은 살아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몸의 부활이 없었어도 제자들은 영원히 예수님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몸의 부활을 주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는가. 실제로 그들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장 심플한 설명이다. 만약 그것이 거짓 주장이었다면 그들의 주장은 초기 예수 공동체 내에서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또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경험을 존중하고 싶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자칭 메시아들의 제자들도 그들의 스승이 부활했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그것도 본래 부활의 정의에 따라 몸이 수반된 부활을 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난 것이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있겠는가? 이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부활 경험을 토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확실히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부활 경험이 없었다면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저 예수 선생이었을 뿐 그리스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몸의 부활이 있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무슨 해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몸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해준다. 영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도 중요하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몸과 영혼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면 당연히 우리의 몸도 살리셔야 할 것이다. 몸을 만든 분도 하나님이고 그 몸에 숨을 불어넣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마지막 때 있을 부활이 예수님에게서 선취적으로 일어났다는 이해가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현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2천년 전에도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많았다. 어차피 부활은 현재 시점에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믿음의 영역에 속해있을 수 밖에 없다. 몸의 부활이 있었다고 믿거나 아니면 없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초기 교회가 몸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이나 심리적 부활을 전해주었더라면 그런 부활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전해준 부활 이야기가 몸의 부활이기에 내가 믿는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의사였던 누가도 신체성이 없는 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다.
누가 뿐만이 아니라 누가에 앞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도 알았을 것이다. 자기들의 경험이 꿈을 꾸는 것과도 다르고 환상과도 다르다는 것을..
그것이 꿈이거나 환상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바울처럼 그렇게 환상(?)으로 보았다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꿈이나 환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 만남은 영적인 체험과는 다른 어떤 신체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확실히 뭔가 다른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은 그들이 그 때까지 해왔던 경험의 틀을 벗어난 것이었기에, 이제까지 없었던 그 놀라운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오직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부활'이라는 말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몸의 부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몸의 부활을 굳이 주장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은 살아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몸의 부활이 없었어도 제자들은 영원히 예수님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몸의 부활을 주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는가. 실제로 그들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장 심플한 설명이다. 만약 그것이 거짓 주장이었다면 그들의 주장은 초기 예수 공동체 내에서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또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경험을 존중하고 싶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자칭 메시아들의 제자들도 그들의 스승이 부활했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그것도 본래 부활의 정의에 따라 몸이 수반된 부활을 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난 것이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있겠는가? 이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부활 경험을 토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확실히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부활 경험이 없었다면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저 예수 선생이었을 뿐 그리스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몸의 부활이 있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무슨 해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몸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해준다. 영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도 중요하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몸과 영혼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면 당연히 우리의 몸도 살리셔야 할 것이다. 몸을 만든 분도 하나님이고 그 몸에 숨을 불어넣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마지막 때 있을 부활이 예수님에게서 선취적으로 일어났다는 이해가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현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2천년 전에도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많았다. 어차피 부활은 현재 시점에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믿음의 영역에 속해있을 수 밖에 없다. 몸의 부활이 있었다고 믿거나 아니면 없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초기 교회가 몸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이나 심리적 부활을 전해주었더라면 그런 부활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전해준 부활 이야기가 몸의 부활이기에 내가 믿는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Wednesday, April 5, 2017
홍수를 앞두고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과 내일 내릴 비로 인해 이곳의 강이 범람할 확률이 거의 100%다. 이런 경우 기상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이제 우리는 좀 더 정확한 지점으로 기도를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에는 비가 와서 홍수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지금도 물론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기도는 더이상 공감을 얻기 어려워진 시대다. 지금은 그렇게 기도하면서 집을 지키고 있기 보다는 미리미리 짐을 싸서 대피하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다.
홍수를 앞둔 시점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무엇일까?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고 강이 범람해서 집이 물에 잠겨도 그 일로 인해 그 집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피해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울 자세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좀 더 멀리는 홍수가 일어나는 구역에 있는 집들을 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길 수 있도록 시의 정책을 개선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관련 법이 정비되도록 시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는 항상 해야 하지만 기도의 내용은 현 시대에 얻게 된 과학적 정보들을 잘 적용하는 기도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열심히 기상과학을 발전시키고 미리 홍수경고를 내려준 기상 과학분야의 하나님의 종들의 예언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이 비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리셨던 적이 있었다. 노아의 홍수 때다.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아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비는 이제 자연의 움직임을 따라 내린다. 구름에 물이 차면 비는 내린다. 그 양이 많으면 홍수가 날 것이고, 홍수가 나면 홍수 위험 지역에 있는 집에는 물이 들이칠 것이다.
내려야 하는 비를 내리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홍수 피해를 입은 이웃들을 성심성의껏 도울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한 기도요,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에 가서 청소를 하거나 피해 지역 주민들을 돕는 일에 힘을 쓰는 것이 그 합당한 기도에 일치된 행동이지 않겠는가.
홍수를 앞둔 시점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무엇일까?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고 강이 범람해서 집이 물에 잠겨도 그 일로 인해 그 집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피해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울 자세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좀 더 멀리는 홍수가 일어나는 구역에 있는 집들을 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길 수 있도록 시의 정책을 개선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관련 법이 정비되도록 시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는 항상 해야 하지만 기도의 내용은 현 시대에 얻게 된 과학적 정보들을 잘 적용하는 기도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열심히 기상과학을 발전시키고 미리 홍수경고를 내려준 기상 과학분야의 하나님의 종들의 예언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이 비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리셨던 적이 있었다. 노아의 홍수 때다.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아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비는 이제 자연의 움직임을 따라 내린다. 구름에 물이 차면 비는 내린다. 그 양이 많으면 홍수가 날 것이고, 홍수가 나면 홍수 위험 지역에 있는 집에는 물이 들이칠 것이다.
내려야 하는 비를 내리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홍수 피해를 입은 이웃들을 성심성의껏 도울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한 기도요,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에 가서 청소를 하거나 피해 지역 주민들을 돕는 일에 힘을 쓰는 것이 그 합당한 기도에 일치된 행동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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