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14, 2016

절망과 희망

"희망은 절망이었어"라는 말에서 그가 바라던 희망은
삶 속에서 그가 얻길 바라던 어떤 구체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픈 동생의 병원비를 그만 대고, 원하던 직장에 취직하고, 맘껏 연애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소원들이 희망이라면 아픈 동생이 계속 아프고, 원하던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맘껏 연애할 수 없는 현실은 절망이 된다.

이런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기독교의 희망이 하나님 나라라 할 때,
그 하나님 나라라는 희망은 아직은 순수의 영역에 있다.
그래서 안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구체성의 영역에 놓여져 있다면
그것에 대한 희망도 절망일 때가 많을 것이다.

십자가라는 절망.
그러나
부활도 하나님 나라도 아직은 순수의 영역에 있기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여전하다.
그리고 그 희망 때문에
여타한 소원들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절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파도 위를 타고 싶다면,
하늘에 희망을 두고 보이지 않는 바람에 의지해도 되지 않겠는가.
















(사진은 카이트서핑(kitesurfing)하는 모습)

먹고 난 이후에

내 눈 앞에 당근이 있다고 해봅시다.
내가 그 당근을 먹었을 때 그 당근은 내 몸 속에서 더 이상 내 눈 앞에 있었던 당근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만약 당근이 내 몸 속에 들어와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나는 그 당근 때문에 죽고 말 것입니다.
내 눈 앞에 있던 당근은 내 몸 속에 들어와서 잘게 부서져서 흔적도 없이 그 모양을 잃어야 합니다.
모양을 잃어버린 당근은 어떤 식으로든 내 몸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남는 것은 '나'이지 '당근'이 아닙니다.
먹어서 그 모양을 잃으면 어떡하냐는 걱정하지 마시고 먹어서 없애시기 바랍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내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전부 내 안에서 부서져야 합니다.
내 안에 들어온 내용이 그대로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사라지며 남겨진 것들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그것이 그대로 내 안에 있고 나는 앵무새처럼 그 가르침을 되뇌이고만 있다면 그것 때문에 나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먹고 소화해서 없애버리시기 바랍니다.
남는 건 당근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당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봤자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당신의 몸/삶만 보일 뿐입니다.
소화 불량, 변비, 설사, 복통을 안고 사는 당신의 모습 말입니다.
당근 이야기는 먹고 난 이후에,
당근의 모양이 다 사라진 이후에나 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