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25, 2013

천국의 빛을 쫓아서

강단을 떠나있는 시간이 오래된 것 같지만 사실 2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이 기간동안 아들 키우고 밖에서 일하고, 교회는 그저 출석만 하고 있는 수준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몸소 체험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다. 사는 데 정답이 없다고 하던데,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보니 정말 어떤 삶을 살아도 다 의미가 있고 ,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사는 이상 그 삶의 형태가 어떻든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었다. 목사든 청소부든 사회복지사든 그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불의에 대항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내가 돌봐야 할 사람도 많고 맞서 싸워야 할 불의한 세력도 많기만하다. 천국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지만, 침노하지 않으면 우리 것이 아니기도 하다. 마지막 날이 되면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천국이 임하겠지만 지금의 우리는 천국을 취해야 한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어느 순간 스치듯 비치는 천국의 빛을 쫓아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성탄절 묵상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날이다.
역사적으로 그 분은 2천여년 전 유대 땅에 태어나셨지만
역사적 예수가 우리 마음 속에 계시지 않으면 그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겠나?

마태복음의 예수가 마굿간에 누이었듯,
그 분은 우리 마음 속 가장 누추한 곳,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곳,
동물적 본성이 꿈틀거리는 곳,
이기심으로 가득찬 곳에 오셔야 한다.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동물들의 여물통에 누이신 예수.
그가 여물통에 누이자,
동물들만 살던 그 곳에
사람들이 찾아왔다.
동방의 고귀한 박사부터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까지.
사람을 부르는 예수.

그 분은 동물적 본성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우리들에게
참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 분의 살과 피를 주셨다.
여물이 아닌 그 분의 살과 피가,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채울 때
우리 역시 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살짜리 아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이야?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오신 날이야.
어디에?
우리 마음 속에.

역사적 예수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예수가 우리의 마음 속에
다시금 신화화되지 않는다면
신앙의 그리스도가 설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Saturday, December 7, 2013

세살 아들에 비친 내모습

아들을 데리고 집 근처 스포츠센터에 갔다. 그 곳에 있는 까페 내부에 실내 놀이터가 있는데, 아들 녀석이 그 곳에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그 까페에서 아이들이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한 20명 정도 모여서 생일파티를 하면서 그 놀이터에서도 놀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보여서, 아들을 데리고 코트로 나가 축구공을 가지고 놀다가 그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가서 놀 때쯤 다시 까페로 들어갔다. 나는 커피를 한잔 시키고 아들 녀석은 혼자서 놀이터로 갔는데, 멀리서 커피를 마시며 보고 있자니 뭔가를 계속 주워담고 있는 게 아닌가. 가서 보았더니 바닥에 온통 어질러진 블럭들을 혼자서 장난감통에 주워담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안해도 될 일을 하는 것 같아서 아들에게 네가 정리 안해도 된다고 했더니, 그 어린 녀석이 지저분하니까 자기가 치워야 한다고 한다. 말려도 한다고 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내 자리로 돌아와서 어떻게 하는지 계속 지켜보았다.

열명도 넘는 형들이 난장판을 벌이고 놀았으니 얼마나 치울게 많았겠는가. 자기가 어지럽히지도 않은 장난감이며 블록들을 고사리같은 손으로 10분이 넘도록 묵묵히, 끝까지 정리를 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저 녀석이 세살 짜리가 맞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저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 때가 많다는 걸 알기에 녀석의 앞날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커서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저런 마음을 잃지 않고 자라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aturday, November 30, 2013

설교란 정말 가능한 일인가..

오늘 어떤 한국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나름 공부도 많이 하시고 입담도 좋아서 대중에게 꽤 알려진 목사님이셨다.
본문에 집중하는 모습도 좋고 간간이 유머를 섞어서 청중들을 배려하는 방식도 괜찮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말씀을 받드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다.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종이 아닌 말씀을 채찍처럼 다루는 독재자처럼 보였다.
말씀이 주인이 아닌 설교자가 주인인 모습이었고,
말씀을 이용하여 청중들을 휘어잡으려는 의도가 보였다.
마치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은 자신의 것만이 절대적인 양 설교하는 모습에서
말씀을 섬기는 자의 겸손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권력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전하지도 못하면서 애꿎은 성도들에게만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대개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이 당대의 권력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하였다.
저 자리, 저 강대상에만 서면 저렇게 되는가?
처음부터 저러진 않았을텐데.. 저 자리에 익숙해져서 저렇게 뻔뻔해진 것인가?
아, 설교란 정말 가능한 일인가..
말씀의 봉사자로서 나를 최소화하고 말씀만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 정말 가능한가..
나는 그렇게 했었는가..
강단에 서지 않아도 되는 이 시기가 실상은 나에게 얼마나 복된 기간인지 모른다.
가능하다면 그냥 이렇게 설교하지 않으며 살고 싶기도 하다.
가능하다면..

Wednesday, November 27, 2013

신앙이란

기독교의 신앙은 신념(belief)보다는 의탁(trust)에 더 가깝다.  또는 신념에서 의탁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신념으로는 하나의 체계(belief system)를 만들 수 있다. 신념들을 끌어 모으고 층위를 나누고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 신앙이 이 수준에 머물면 머릿 속이 그가 옳다고 믿는 지식으로만 가득차게 된다. 삶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멋진 신념체계만 만들면 되고, 그 신념을 되뇌이고 강화하고, 더 나아가 그 신념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까지 저지를 수도 있다. 전인적인 삶의 변화보다는 신념체계라는  골격만 남은 딱딱한 해골처럼 되는 것이다.

의탁으로서의 신앙은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긴 상태를 의미한다. 나의 전 인격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내 삶이 내게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그 상황을 견디고 이겨내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마치 내 아이가 나를 향해 몸을 던지듯, 하나님을 향해 나를 던지는 삶, 환경이 아닌 하나님으로 인해 늘 든든한 삶,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헤쳐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삶을 말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좁은 길로 인도하는 분이시다. 그 분과 함께 가려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참으로 어리석고 힘든 길을 가야만 한다. 가지려하기 보다는 나눠야 하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겨야 하고, 대접받기 보다 대접해야 하고..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분에게 내 삶을 맡기고, 그 분만을 따라 가는 것. 신앙/믿음이란 궁극적으로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 그냥 구구단을 외우듯이 신조들을 되뇌이는 것만이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으로 구원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Monday, November 25, 2013

천주교 시국미사

천주교 시국미사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특히 신부들의 활약이 눈에 띄는데, 그들에게는 요즘 개신교 목회자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야성이 살아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그 소리에 이끌리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진리를 향해 눈을 뜨게 되는, 그런 소리를 내고 있다. 예전에는 개신교회가(물론 일부였기는 하지만) 더 활발하게 이런 목소리들을 냈었는데, 지금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이런 야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진 것 같다. 체제에 포섭되어 순한 양이 된지 오래되었으니.. 목정평에서 금식기도회를 할 것 같기는 하나 천주교만큼 파급효과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이런 단체라도 있다는 것에 위로를 삼는다. 개신교 목회자들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면서도 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침묵하는 경우가 많은데, 천주교 신부들이 세상의 권력과 악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한국 그리스도교의 체면을 세워 주고 있는 것 같다.

Tuesday, November 19, 2013

Trust로서의 신앙

신앙을 맡기는 것(trust)이라 할 때, 맡기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 지 살펴보면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몇 달 전에 만 세 살짜리 내 아들을 처음으로 어린이 집에 맡겼다. 하나 뿐인 아들을 맡기는 것이니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겠는가. 일단 근처의 어린이 집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직접 방문해 보는 것은 물론이고 원장을 만나 어린이 집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교사는 몇 명인지, 식단은 어떻게 되는지, 원비는 얼마인지 등등을 꼼꼼하게 따져보았다. 그러고 나서 한 곳을 선택해 아이를 맡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를 맡기기 시작했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잘 먹고 있는지, 선생님들이나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는지, 교사들이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있는지 등등에 관해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했다. 아이가 잘 적응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과 함께 의심이 점점 줄어들면서 어린이 집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믿음과 함께 아이를 맡기는 것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었고, 특히나 아이가 당면한 문제들(점심 먹기, 화장실 이용하기 등)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을 보면서 어린이집에 대한 신뢰가 더욱 커져갔다. 이 모든 일들이 어느 순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긴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믿으라고 해서 그냥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은 거짓 믿음, 불안하기만 한 믿음일 수밖에 없다. 믿음은 불안을 어느 정도 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불안하기만한 믿음이라면 그것이 내 삶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냥 무조건 믿는 믿음은 가능하지도 않고 특히나 이성적인 사람에게 그런 믿음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방법이다. 아이를 맡기기 전에 어린이집에 대해서 알아본 것처럼, 신앙의 대상에 대한 공부는 필수적인 것이다. 내가 소중할수록 더 열심히 하나님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내 자식이 소중하기에 어린이집에 대한 사전조사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 아니었는가. 

물론 하나님에 대한 공부는 완벽할 수가 없다. 어린이집에 대한 조사도 완벽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공부가 완벽할 수 있겠는가. 일단 이 어린이집이 어느 정도 믿을만하다 판단되면 그 이후는 일단 아이를 맡겨야 한다. 맡기는 일을 미루기만 하면 그 어린이집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는 기회도, 신뢰 관계를 형성할 기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공부만 했지 하나님께 맡기는 결단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공부만 영원히 하게 될 뿐 하나님을 직접 알아갈 기회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도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아이를 맡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가라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이 생겨난다.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은 어떤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께 나를 맡겨야 하나?

아이를 맡겨야 할 때를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부모가 맞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든 아니면 아이에게 친구가 필요한 상황이든)아이를 맡기게 된다. 내가 아이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면 왜 굳이 다른 곳에 아이를 맡기겠는가? 

나 자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 자신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줄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내 생명의 완성을 내 스스로 이루어 낼 수 있는가? 단순히 신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나라는 존재의 통합적 온전성을 나 스스로 이룩할 수 있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속에서 늘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가? 그 최선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인간이란 스스로 선택을 하면서 만들어진다(물론 선택이란 늘 주어진 생물학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의 선택이기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약을 인정한다 해도 사람이 일생동안 선택을 통해서 만들어져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선택은 종류에 따라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고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치명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선택들을 아무런 기준이나 가이드라인 없이 바르게 할 수 있는가?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나를 맡길 때 나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인생을 통해 계속되는 선택들이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질 때 나 역시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역시 필요한 일이다. 내가 내 아이를 혼자서 잘 돌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듯 같은 이유로 나 역시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Friday, November 8, 2013

유진 피터슨의 The Pastor를 읽고

일전에 현재 출석하고 있는 뉴질랜드 교회의 목사님이 빌려준 The Pastor라는 책을 공감하며 읽은 적이 있었다. 유진 피터슨의 책이었는데, 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목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제삼아 자서전으로 쓴 책이었다.

나에게 목사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내 아버지이다. 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3학년부터 목사의 아들로 자랐다. 아버지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나 예기치 못한 어떤 사건을 계기로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즈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신학교육을 받은 후 목회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목회관은 우리집의 가훈이기도 한 "십자가를 지자"였다. 아버지는 고난받는 길을 택해서 다니셨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작은 교회로 가서 그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눈물로 기도하시다가, 기도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만큼 편해질 때면, 그 교회를 떠나 다시 작은 교회로 옮기셨다. 교회가 자립할만큼 성장하면 다시 작은 교회로, 커지면 다시 작은 교회로..

아버지의 기도는 늘 새벽 2시에 시작되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으셨다. 교회당 제단 중앙에 걸린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보낸 시간들은 아버지의 무릎과 발등에 훈장과 같은 옹이들을 남겼다. 그 굳은 살들은 아버지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신학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고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지만 그 흔적은 나를 늘  겸손하고 경건하게 만든다.

유진 피터슨의 아버지는 정육점의 주인이었고, 유진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훗날 목회에 도움이 될 소중한 경험들을 많이 했었다고 한다. 어린시절의 나 역시 아버지와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이제 나에게도 아들이 있고 아직 먼 꿈이기는 하지만 내 아들도 목회자가 되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길 바라고 있다. 훗날 내 아들도 나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어떤 신앙의 유산을 내 아들에게 남겨줄 수 있을까.. 내 몸/삶에는 어떤 흔적이 새겨지게 될까..

Tuesday, November 5, 2013

사랑은 행하는 것

일주일에 하루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하루는 시각장애인과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이 일에 더해 앞으로 2, 3일은 노인들을 돌보는 일도 하게 될 것 같다. 요즘은 또 난민들이 눈에 들어와서 난민 정착 지원하는 일도 하고 싶기는 한데,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교회에서는 딱히 하는 일은 없다. 한인 가정이 한 가정 뿐이라서 주일에 식사 한끼 하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외에 교회 일에 시간을 쓰지는 않고 있다. 담임목사님이 새로운 비전 수립을 위한 팀에 참여해달라고 해서 거기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이 교회에 출석한지 4개월 밖에 안되고, 키위 문화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싶다. 아직은 이 나라와 이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 더 배워야 할 때 아닌가.

복지 국가라 하지만 역시 이나라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일은 예수의 제자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예수의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함이었다. 특히나 우선적으로 율법에 의해, 체제에 의해 죄인으로 규정된 자들을 죄없다 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은 사람이 예수였으며, 그 투쟁과 희생이 그분의 사랑이었다. 말로만 사랑하라 떠들지 않았고, 안온한 삶을 살면서 선지자 코스프레를 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는 거대한 악의 힘과 맞서 싸우며 지극히 작은자 하나라도 구해내기 위해 애썼던 분이었다.   

자기 죄를 회개하는 일은 잘 하면서, 악과의 싸움은 모른척 하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다. 어찌보면 회개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악과의 투쟁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유혹하여 온전한 삶을 파괴하는 세상의 권력들이나 체제와의 싸움은, 지금도 여전히 십자가를 지는 일과 다름아니다. 예수를 미워했던 세상의 미움을 우리도 받아야 한다.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고 그들의 지배가치와 권세에 대항해 치열하게 싸우는 일, 그러면서도 우리가 결국은 이긴다는 희망으로 기뻐하는 자세,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다림으로 설레는 마음 등은 그 나라가 임하는 순간까지 우리가 결코 잊/잃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Wednesday, October 23, 2013

이제 어디로?

오늘 영주권이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나라에 온지 2년 1개월 만이고, 영주권 신청을 한지 정확히 3개월 만이다.
비자 갱신 없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조건이 주어졌으니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제 정말 정신차리고 뭔가 할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일은 사실 이미 정해져 있긴 하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구체적으로는 아직 모르겠다.
지금도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고,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에서 시각장애인 부부도 돌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공식적인 목회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나만의 목회를 하며 살아야 하는지.. 생각 같아서는 이렇게 이름 없이 욕심 없이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만나게 되는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며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긴 하다. 교회도 많고 목사도 많은데, 나같이 제도권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 목사는 빠져줘도 괜찮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광야생활, 필요하다면 40년이라도 해야되지 않겠는가..

Monday, October 14, 2013

원목실습1

원목은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 공감하며,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내도록 돕는 사람이다.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필요에 따라 그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모두 고유한 가치를 지닌 그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주인공인, 세상에서 유일한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고유한 가치가 담겨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물론 그 가치는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다.
긍정적일 경우 발전시키고 부정적일 경우 반면교사를 삼도록 도와준다.
그러한 과정 중에 성경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에 접속시키면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개별 인물들의 이야기부터 국가와 민족의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놀랍게도 구원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마치 형형색색의 꽃들이 모여 아름다운 꽃꽂이가 만들어지듯이 말이다.
개인의 이야기가 아무리 부정적이고 보잘것 없어보일 지라도,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놓이면 서로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자리를 얻게 된다.
이리저리 부유하던 자신의 이야기가 쉴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성경 이야기라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 접속되면,
별볼일 없어보이는 자신의 이야기에도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고,
자기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원목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면서 피드백으로 미세하게 각도만 틀어주는 역할.
하지만 실제 임상에서는, 미리 예상했던대로,
차분히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한 영혼을 찾는 심정으로
꿋꿋이 병실을 헤메고 있다.

성서 해석

성서는 구약이든 신약이든 일차적으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유대인에 의해 기록되었다.
따라서 성서를 '주해'할 때는 가능한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최대한 참조하는 게 옳다. 그러나 성서를 '해석'할 때는 당대의 해석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가령 1세기 성서 텍스트가 쓰여진 당시에 그 텍스트가 해석되던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의 해석 방식은 동시대를 살아가던 독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해석 방식이었겠지만, 그들의 해석 방식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한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 '2천년전 그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구나' 정도로 끝나지 않겠는가?

성서 해석은 늘 미래를 향해 출렁이며 현재를 넘어서야 한다. 과거에 얼어붙지 않은채 말이다. 그래야 성서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게 아니겠는가. 현재는 고사하고 과거조차 넘어서지 못하는 성서 해석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성서 해석조차 1세기 유대인들의 관점에 붙들어 매어버리면 유대인도 아니고 2천년전 사람도 아닌 우리에게 성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주해는 철저하게 당대의 관점에서 하되 해석은 좀 열어두자. 왜 그리도 과거에 매여있으며, 왜 그리도 과거의 눈으로만 바라보려 하는가.

성찬식

사람은 밥만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먹어야 한다.
말씀의 육화가 예수님이라 할 때,
그분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식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상징적인 행위일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 영혼의 살과 피를 채워야 우리가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예수님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현혹하는 허황된 소리에 귀를 닫고
지며리 성찬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삶을 체화하고 속사람을 살리는 방식만이
참으로 사람이 사는 길이다.

Monday, September 23, 2013

원목 실습

Comfort zone에서 나오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로 Clinical Pastoral Education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이제 그 수업이 이번 달로 끝나고 다음 달부터는 병원으로 원목 실습을 나가게 된다. 한국 사람들과 한국어, 한국 문화라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키위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어느 정도나 넘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병원목회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왠지 병원에서 부수적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서였다. 대개의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심방을 올테고,  타종교인에게는 병원 규정상 복음을 전할 수도 없을 거고, 잠깐 며칠 머물다 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말 외에 얼마나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뭐 개중에는 원목의 방문을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지속적인 만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원목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들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목사란 어쨌든 교인들과의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부대끼며 성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원목은 환우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굳이 목사가 원목의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좀 있는 편이다.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 주는 일은 딱히 목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여기까지가 지금 내가 원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생각인데, 실제 다음달부터 현장에서 환자들을 만나게 되면 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내 선입견이 더 굳어질지 아니면 깨어질지.. 내 목사관이 너무 회중(congregation) 중심적인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고..

Thursday, September 19, 2013

책과 거리두기

2년간 책을 거의 읽지 못했었다.
아이 보고 일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학책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거의 읽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 기간이 이제껏 살면서  책을 가장 적게 읽은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좋다.
그냥 사람들을 만나도 더 편하고, 머리 속이 복잡하지 않으니 사람들 얘기도 더 잘 듣게 되고, '이건 이러이러하고, 저건 저러저러해요' 식의 아는척 하는 말도 안하게 되고,
오히려 책이, 지식이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수님은 책을 얼마나 읽었을까? 제자들은?
왜 나는 책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리 문자에 얽매여 있는 삶을 살았을까?
살아있는 말을 듣고,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고, 살아있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도 되는데,
왜 그리 책이라는 죽은 말들의 관을 쓰다듬으며 살아왔을까..
말씀이 몸이 되어야 하는데, 왜 그런 노력은 안하고  죽은 글만 집적이며 살았을까...
물론 책의 유용성을 싸잡아 부인하는 건 아니다.
평생 책 안읽으며 살지도 않을거고..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책에 탐닉하지는 않으련다.
나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문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Monday, September 9, 2013

사도행전 12장 16절

기도를 했으면 그 기도가 실현되고 있는지 집이나 교회당 밖으로 나가서 확인을 해야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혹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고,
기도도 더 하고 그래야하지 않겠는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만 하고 있던 사람들.
문 밖에 나가볼 생각도 안하고 베드로가 왔네 안왔네하면서 옥신각신.
문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운가?
헤롯에게 잡혀 죽을 것 같은가?
기도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해야 하는 것이다.
통전적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 기도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전부로 하나님께 응답해야하는 것이다.

쟈니 에릭슨 타다

2007년 11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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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에릭슨 타다. 현재 57세. 17세때 다이빙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여성 크리스천.
쟈니가 오늘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의 몸이 회복되길 기도하고 있다고..
그런데 진심으로 부탁하는데 그런 기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육체가 건강해지길 원하는 기도보다는
영혼이 건강해지길 기도해 달라고..
자신의 몸은 천국에서 새로워 질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그걸로 충분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다시 팔, 다리를 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몸의 건강이 아닌 영혼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자신은 자기의 외면이 아닌 내면이 온전해 지길 바란다고..

Monday, September 2, 2013

요한복음 3장 16절 - 아빠의 마음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어젯밤 문득 요한복음3장 16절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 구절에 대한 이제까지의 신학적 성과들을  참조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만 볼 때 두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도대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셨을까 하는 점이다. 누군가를 위해 내 아들을 내어주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물론 이 일은 성자 하나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겠지만, 그래도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셨으면 그렇게 하셨겠는가. 세상을 물건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생명으로 보았기에, 너무도 사랑하는 생명이기에 그 생명을 찾기 위함이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사랑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고통에 처해있는 생명을 살리기위해 사지로 들어가려는 아들과 그 아들을 보내야만 하는 아버지의 마음,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제는 절절히 느껴진다.

둘은, 하나님은 정말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구나 하는 점이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들이 세상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사형을 당했는데, 당대 권력의 잘못된 판단을 따르는 대신 그의 의로움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자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간에 영생을 주시지 않겠는가. 칭의개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내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내가 의롭다 칭하심을 얻는다는.. 그러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믿고 따라와준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든, 아버지 입장에서는 고맙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 사람들을 또한 끝까지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나무에 달려 사형당한 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사람들, 아들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고맙게 여겨지겠는가.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끝까지 책임지시지 않겠는가.

Tuesday, August 13, 2013

은총에 기대어 살기

내 노력이 아닌 다른 이의 노력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것. 하나님의 우선적이고 끊임없는 노력 또는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나에게 닿았을 때, 아 은총의 신비여!  은총이 없었다면 내 어찌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으며, 내 어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으리요.

생명도 은총이요, 자연도 은총이요, 부모와 형제, 자매, 아내, 자식도 은총이요, 이사람 저사람도 은총이지 않은가. 모든 것이 다 내 노력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내 노력에 은총이 더해져서, 아니 은총에 내 노력이 살짝 덧대어져 이루어진 것 들이 아니던가. 먼저 나에게 주어진 것이 없었더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삶을 가능하게 했겠는가. 은총이 시작이요 노력/행위가 뒤를 따를 뿐. 그 반대가 아니다. 은총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아, 그러나 은총을 무시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본래부터 자기 것인양 행동하는 오만한 자들이 너무도 많으니, 그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공극, 빈 공간

하나님은 나에게 공극과 같다. 틈, 빈 공간, 그 속엔 아무 것도 없는, 그렇게 아무 것도 없어야 되는,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예전에 그 빈 속을 신에 대한 이론과 개념들로 꽉꽉 채워놓으려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야 내 사유체계가 완성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죽어가고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루아흐(숨)가 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어 두어야 한다. 비워 두어야 한다. 그래야 바람이 드나들고, 숨을 쉴 수가 있는 법이다. 열린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그걸 마시고 내쉬면 된다. 그래야 산다.

Wednesday, August 7, 2013

세계관의 차이

예전 청소 일을 할때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 중에 두명의 인도인이 있었다.
둘다 같은 지역 출신에, 천주교인이었다.
둘 중에 나와 더 오랫동안 일해왔던 B라는 친구가 며칠동안 성경에 대해 물어보았었다.
처음에는 천주교인이니 신부님에게 물어보라고 했었는데, 자기는 신부나 수녀가 싫다며 그냥 나에게 대답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의 질문들을 들어보니 대개는 성서 저자들의 신화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현대인들이 과학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듯 고대인들은 신화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성서 저자들과 우리는 같은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살았던 세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르지 않다. 단지 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요즘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성서의 내용들을 이해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서가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시고 우리도 여전히 그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설명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아빠 하나님

하나님을 아빠라 부른 예수님.
굳이 삼위일체라는 거창한 개념을 끌어오지 않아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있지 않을까.
어떤 유대인이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겠는가.
내 아들만 나를 아빠라 부른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던 그 분.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누가 그렇겠는가.

신성

사람이나 자연물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볼 줄 알고, 그 것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 그 분의 지혜가 반영된 자연, 그 모두에서 신성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비록 그 신성이 온갖 때에 묻혀 숨겨져 있더라도, 살려내야 한다. 신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신과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언제든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지진 경험

두 주일 전 쯤 가까운 바다에서 6.5의 강진이 있은 후 여진이 계속 되고 있다. 지난 주에도 5.4의 강진이 있었고 며칠 전에도 진도 4.7의 지진이 땅을 흔들었다.
땅이 흔들리는 것을 직접 경험해보니, 참.. 할 말이 없다.
자연에 대한 낭만적인 태도를 접은지 오래된 터라 자연재해의 발생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지도 않고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과학자들의 설명대로 뉴질랜드 아래에 있는 두개의 판이 서로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비상물품을 준비하는 정도. 집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서는 별 걱정이 없다. 어차피 이쪽 집들은 나무로 지어져서 무너지더라도 공간이 생길테니.
걱정되는 것은 쓰나미인데, 밤중에 갑자기 바닷물이 불어나면 대책이 없을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산으로  뛴다해도 몇백미터는 뛰어야 하는데, 아이를 들쳐메고 바닷물보다 빠르게 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걱정하는 아내에게,  "우리 잘 살았지 않아? 잠깐 눈 감았다 뜨면 하나님 앞일텐데 뭐가 문제야" 라고 웃으며 말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그렇지 못할 땐 받아들이면 되는거지..
하나님은 늘 재난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그들의 고통을 함께 감당하며 그러면서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우리의 내면을 감화시키시는 분이 아니시던가.
그 분이 그런 분이시니 나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Tuesday, July 23, 2013

유치원에 보내며

아들 이안이 이제 다음 달이면 만 세살이 된다.
집 근처에 있는 유치원 중 형편에 맞는 곳을 골라 3일간 매일 한 시간 정도 유치원에 머물며 적응기간을 가졌었고,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아이가 혼자 유치원에서 여섯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아내와 함께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켜주고 나올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오후에 전화해보니 우리가 나가고 난 후 아이가 한 10분 정도 울었다고 한다.
극히 정상적인 반응이긴 하나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정해진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예의 그 밝은 표정과 흥이 사라진 얼굴로 밖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깐동안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는데, 서서히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었다.
왜 이제 왔느냐는, 자기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는 그런 표정으로 말이다.
말이라도 통했더라면 덜 외로웠을 터인데,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저 혼자였으니 얼마나 더 힘들었겠는가..
그래도 부모없이 여섯 시간을, 말도 안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 견뎌준 아이가 대견했다.
이제 첫 발을 떼었으니 앞으로도 두발, 세발..
거친 세상 속으로 잘 걸어나가길 기도한다.

Thursday, July 18, 2013

서핑을 보며

집 앞 길 건너에 이 지역에서 서핑으로 유명한 해변이 있다. 아들 녀석이 그 곳 해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동안 난생 처음으로 서퍼들이 서핑하는 모습을 맨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남반구인 이곳은 지금이 겨울이기에, 물론 한국의 겨울처럼 영하의 추위는 아니지만, 체감기온이 제법 쌀쌀했고 호기심에 직접 손을 담가본 바닷물도 꽤 차가왔다.

서퍼들은 10대, 20대로 보이는 청년들에서부터 5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었다. 다들 위아래 통으로 몸에 착 달라붙게 만들어진 검정색 서핑복을 입고 있었고, 파도를 타기 위해 해변에서 100미터 쯤 파도를 거슬러 먼바다쪽으로 헤엄쳐 가고 있었다. 보드에 엎드려 두팔의 힘만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헤치고 먼 곳으로 나가는 모습이 사뭇 힘들어 보였다.

서퍼들은 파도의 너울이 시작되는 근방에 도착한 후에는 보드에 앉아 서핑을 할 만한 파도가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드는데, 그들이 바라는 파도는 그다지 많지 않아보였다. 기다리는 파도가 올 때까지 5분이고 10분이고 보드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들은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나는 그저 아무 파도나 올라타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도도 각양각색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파도는 서퍼를 들어올려 앞으로 밀고 갈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런 파도를 골라 올라타려는 서퍼들은 헛 힘만 쓸뿐 맥없이 자빠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좋은 서퍼란 좋은 파도를 골라낼 줄 아는, 또는 그런 파도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잘 잡는 기술이 있다해도 파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역으로 말 할 수도 있겠다. 아무리 좋은 파도가 있다해도 보드를 탈 줄 모르면 어찌 서핑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서핑도 인생처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영역이 맞물려져 있는 것이었다. 파도가 없을 때는 파도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파도가 왔을 때는 그 파도를 잘 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파도가 밀려오면 도망치는 세 살 짜리 아들 녀석도 이 해변에서 자라다보면 겨울 추위에도 보드하나만 들고 하얀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건강하게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좋은 파도를 기다릴 줄 알고, 파도가 왔을 때 휩쓸리지 않고 유유히 물벽을 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혹 인생의 파도도 잘 타고 넘을 수 있지 않겠는가..

Monday, July 1, 2013

이사를 마친 후

새로운 도시로 이사하는 중에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가 살던 집 주인 린다와 베리 부부는 우리에게 싱글 베드와 서랍장, 식기 세트를 주었고, 패트리샤와 티모시 부부는 4개의 식탁의자와 현금 200불을,
그리고 로레인과 피터 부부는 식탁과 각종 부엌 용품을 주었다.
특히 로레인, 피터 부부는 우리를 위해 트레일러를 차에 달고 편도 2시간 거리를 운전하며 거의 모든 이삿짐을 옮겨 주었다. 게다가 다음 날 아침에는 내가 인터넷을 통해 중고로 구매한 냉장고, 세탁기, 소파를 픽업해 주기까지 하였다.
전에 살던 집이 퍼니쉬드여서 언퍼니쉬드인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며 거의 모든 것들을 장만해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세간살이를 마련한 것 같다.
새로 이사온 집의 집주인 조 역시 너무도 좋은 사람이어서, 우리에게 디파짓도 받지 않고 집 열쇠를 내주었다. 처음에 뉴질랜드에 왔을 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는 중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았으니 이런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말을 듣기가 민망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다시 많은 사랑의 빚을 졌으니 이제 또 갚을 일만 남았다.

Friday, June 21, 2013

청종

 
가만히 귀 기울이면
내 안에 말씀하시네
늘 어설픈 나의 우둔한 마음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나의 생애 순간순간
그 자간과 행간 사이
늘 배어 흐르는 수많은 질문과
그 많던 떨림 사이로

고요한 중에 들리는 음성은 나의 주
나의 걸음 비추어 그의 길로 인도하고

또 들은 그 길로 순종하며 걸어 갈 때면
그 빛이 내 안에
그 꿈이 내 안에
참 삶이 내 안에


 

Friday, June 14, 2013

일주일 후면

일주일 후면 청소일을 떠나게 된다.
1년 6개월동안 휴일 외에 매일 저녁을 진공 청소기를 등에 매고 시청과 도서관의 카펫을 훑었더랬다.  오늘 보니 처음에는 어색했었던 그 낡고 시퍼런 청소기가 이제는 내 몸과 하나가 된 듯 했다. 나도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함께 일하는 동료가 내가 진공 청소기로 카펫을 쓸어대는 모습을 보고는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하는 걸 보면 물아일체의 경지가 나만의 생각은 아닌듯하다.

매일 매일 성실하게 일을 하다보니 주변에 좋은 평이 났는지 벌써 두 군데서 관리자로 일해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계속 머물 수는 없는 법. 아내가 취업을 해서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야하기도 하거니와, 나 역시 내 소명을 마냥 제쳐둘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목회 현장을 떠난지 2년이 되어가니 여기저기서 슬슬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 내면의 소리는 아직 날 다그치지 않고 있는데, 관계 속에 사는 인간의 숙명을 계속 모른체 할 수 만은 없지 않겠는가..

작은 교회 공동체를 향한 내 꿈은 아직도 여전하다. 그 공동체를 섬기기위해 자비량 목회를 할 생각도 여전하고.
문제는 늘 그렇듯 사람들인데..  과연 내가 가리키는 곳-십자가, 이웃사랑, 하나님나라-을 바라보고 그 곳을 향해 나와 같이 움직일 사람들이 그 도시에 있을까..

Monday, April 8, 2013

아이 훈육

아이 훈육과 관련하여 Amazon에서 책을 찾다가 "1-2-3 Magic: Effective Discipline for Children 2-12"라는 책이 눈에 띄어서 킨들로 받아 읽고 있다. 아들 녀석이 아직 만으로 두살 반인데,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중지시켜야 할 때, 대화로만 해결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그렇다고 윽박지르거나 손찌검을 하고 싶지는 않고.. 해서 적당한 방법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방법은, 간단히 얘기해서, 숫자를 셋까지 세고 타임 아웃 시키는 방법이었다. 아이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계속 할 때, 그 행동을 멈추기 위해서만 사용하는 방법인데, 의외로 간단하고 효과적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의 행동을 멈추게 할 때, 처음엔 말로 하다가 안되면 소리지르고 그래도 안되면 때리고 이런 패턴을 반복하는데, 이러한 패턴을 끊고 아이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멈추게 할 때 숫자 세기를 하는 거다. 일단 아이에게 왜 멈춰야 하는지 상황 설명을 해주고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조용히 "하나"라고 말한다. 그래도 계속하면 5초후에 "둘"이라고 한다. 그래도 계속하면 또 5초후에 "셋"이라고 하고 "타임아웃 3분"이라고 얘기한 후 아이를 그대로 들고 아이방에 데려다 놓고 3분후에 나오게 한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말을 하지 않기'와  '감정을 보이지 않기'이다. No talking, No emotion. 숫자 세는 중간에 말을 하면 안되고 감정의 변화도 보이면 안된다. 5초의 침묵과 단호함이 아이에게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실제로 이 방법을 아이에게 써봤더니  아이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어서 좋았고, 아이도 아빠의 화내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좋을 것 같았다. 요즘은 숫자를 셋까지 셀 필요도 없이 숫자 하나만 세어도 행동을 멈춘다. 그렇다고 이 방법을 남용하지는 않고 있다. 책에도 나와있지만 이 방법은 행동을 멈추는(stop) 데에만 쓰는 방법이지, 아이의 행동을 유도할 때 쓰는 방법이 아니다. 가령, 옷을 입거나 밥을 먹게 할 때 이 방법을 쓰면 안된다. 어떤 행동을 시작(start)하게 하는 데에는 이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써야한다. 그 방법에 대한 내용도 이 책의 후반부에 있는데 그 부분은 다음 기회에 올려볼까 한다.

Saturday, April 6, 2013

성룡의 말을 듣고

성룡이 토크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해서 찾아봤는데, 아 정말 몸이 좋은 사람이란 저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여기서의 몸은 단지 신체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외면의 통합체로서의 몸을 말한다)
이제 나이가 60에 가까운데도 체력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체력 관리를 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면 역시 깊고 건강해 보였다.
7살부터 경극학교에서 신체를 움직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성룡.
말할 때 그 말이 몸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으로 말한다는 느낌.
단순히 리액션이나 연기가 좋다는 말이 아니라 60평생을 몸을 통해 살아온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기 몸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몸이 없이 나오는 말이 아닌 그 몸을 통해서만 나오는 말.
그런 걸 느꼈다.
김영민이 자주 언급하는 '몸이 좋은 사람'이 이런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직은 뭔가 개념들이 얽혀있고 분화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서..
좋은 몸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오는 좋은 말.
몸과 분리되지 않은 말.
그럼으로 온전해지는 삶.

좋은 무도인들에게서 느껴지는 겸손함이 있는데, 성룡에게서 그걸 느꼈다.
목숨을 걸고 찍는 영화.
천직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이걸 하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서도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내 영화를 보는 관객에 대한 책임감.
그냥 대충 눈속임이 아닌 성룡 영화라는 장르에 충실한 영화.

목회에 빗대어 본다면
내 설교를 듣는 청중에 대한 책임감.
눈속임이 아닌 목숨 걸고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하는 모습이랄까..

Friday, March 29, 2013

고난주간 묵상

고전 11장 2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한다.
주님의 죽으심이라..  the Lord's death..

어떤이들은 성찬식을 통해 선포된 그분의 죽음을 아름다운 내려놓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희생에 감사한다.
어떤이들은 그분의 죽음을 악한 권력에의한 억울한 처형으로 보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그분의 죽음은,
그분이 돌아가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계획대로) 돌아가셨다 아니면,
그분이 처형당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의도치 않게) 악한 인간 권력에 의해 처형당했다 라는 두 개의 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성서에도 이 두 버전이 공존한다.
교회의 역사 속에 공존해왔기도 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건,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의 몸이되어, 그분의 죽으심을 선포할 수 있기를 ..

Tuesday, March 19, 2013

2부에서는

아내의 꿈을 이루기 위해 뉴질랜드에 왔고
벌써 1년 반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이곳에서 주로 아이의 아빠로, 청소부로 살아왔다.
낮에는 거의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고 밤에는 평생 안해봤던 청소일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내를 도왔다.
사랑이라는 말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육아와 청소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 나에게 육체적으로 조금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 버텨온 것 같다.
처음 청소일을 시작하면서 손가락이 문제를 일으켰고,
그 후 발목과 허리가 아팠다가 지금은 팔꿈치가 아픈 상태다.
그래도 좀 쉬면 나아질 만한 강도의 증상들이어서 괜찮다.
평생 몸을 부리며 생계를 해결해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노동 강도에 비하면 내 일은 일도 아닌 것이다.
이제 아내의 일이 거의 마무리를 지어가서
몇 달 후면 뉴질랜드에서의 삶 2부가 시작될 듯 하다.
2부에서는 내가 내 일에 복귀를 해야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일을 전개하실지 사뭇 기대가 된다.
한국에서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신음 소리를 듣게 하셨는데,
이곳에서는 누구의 신음을 듣게 하실런지..
하나님, 제 귀를 열어 주시고,
하나님이 들려주실 누군가의 신음소리를 제가 못들은 척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Sunday, February 24, 2013

아들의 보호를 받다^^

한달 전쯤 허리가 몹시 아팠다.
아이를 너무 오랬동안 안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통증 같았다.
마침 한국에서 놀러온 친구에게 바닥에 엎드려 허리 마사지를 받고 있었는데,
친구가 내 등을 꾹꾹 누르고, 치고 하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가 갑자기
친구에게 "하지마, 하지마" 라고 계속 소리치며
친구의 손을 막고, 내 등 위로 제 몸을 포개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아빠를 아프게 하는 걸로 여겼나보다.
그런데 바닥에 엎드린채 아이가 나를 보호해주려고 애쓰는 소리를 듣고,
내 등에 엎드려 아저씨가 아빠를 못 때리게(?) 막는 몸짓을 느끼며,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까지 아이를 보호해 주기만 했는데,
이제 만 2살 반이 되었다고 아빠를 보호해 주려고 하다니 말이다.
이런 기특한 녀석이 있나..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는 제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줄때 꼭 빼먹지 않는 어떤 일화가 있게 마련인데, 내게는 아마도 이 장면이 그런 일화가 되지 않을까 한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