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anuary 25, 2012

트리거 핑거

청소 일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구부렸다 펼 때 뭔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었다. 아직도 그 증상이 있어서 인터넷을 좀 찾아봤더니 Trigger Finger라는 증상과 일치했다. 손가락에 있는 tendon이 부어서 sheath에 걸리적거리는 증상이었다. 치료법으로는 손을 사용하지 않고 푹 쉬는 게 제일 좋고, 증상이 심하면 간단한 수술을 하면 된다고 한다. 내 경우는 상태가 별로 심하지 않고 초기이기 때문에 손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게만 하면 괜찮을 것 같긴 하다. 오랜만에 육체노동을 하다보니 이런 병도 생기고..
아이 보는 것도 어찌 보면 육체 노동이라 낮과 밤에 계속 육체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아내와 아이랑 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
이 두사람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황량했을까..
내 아픈 손가락으로 안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들이 치료제다.

Monday, January 23, 2012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

신의 뜻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
사랑은 희생.
신의 뜻을 따른다는 말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
그 희생의 최고치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
어렵더라도 그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을 따르는 자의 인생이리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는 곳은 내 삶의 자리.
내 인생 길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 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우면 된다.
그가 외국인노동자일 수도, 장애인일 수도, 비정규직노동자일 수도, 고아일 수도 있다.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도우면 된다.
그들이 나보다 못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들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고 하나님의 아픔이기에, 시혜의 대상이 아닌 이웃이기에 돕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 신의 뜻을 따르는 자의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공동체가 교회여야 한다.
어떻게하면 우리 사회의 낮은 자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교회.
그러나 해도 안된다는 절망으로 무거운 교회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희망으로 기쁘고 가벼운 교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볼 줄 아는 교회.
그 희망을 향하여 절망을 끌고 나아갈 줄 아는 교회.
그런 사람들로 인해 즐거운 교회.
그런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Saturday, January 21, 2012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살다보면 일이 생각/예상/계획했던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나 역시도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보면 그랬던 적이 여러차례 있었던 것 같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걱정이 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것과 걱정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걱정되는 것이 자연적 반응이라면, 걱정하는 것은 의지적이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어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걱정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걱정을 해도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걱정 때문에 몸도 마음도 인간관계도 상하게 되는데 걱정을 왜 하는가?

나 같은 경우는 걱정이 되어도 걱정을 하지는 않는 편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세상의 어떤 일이든 절대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 외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내 계획도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계획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도, 일이 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아도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이것만은 반드시'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되면 좋고 안되면 '다른 길이 또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그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사는 것도 힘든데, 걱정까지 하면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래서 나는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론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이 계획대로 안되었을 때는 변화된 상황에 맞춰서 다시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이지, 아무것도 안하고 걱정만 하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이 내 예상대로 안될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개입이 기대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개입이라는 말은 상황을 내 뜻대로 변화시켜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내 내면/영혼을 감화시켜주신다는 말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러한 개입을 받아들인다면 크리스천이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양식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형식은 말하자면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형식이었다. 만나로 산다는 것, 은혜요 축복이지만 그 형식은 매일 새벽 광야에 나가 허리를 굽혀 그날 먹을 좁쌀만한 양식을 주으러 다니는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서 항아리를 열면 매일 자동으로 밀가루가 가득히 쌓여있는 그런 형식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벌어 하루먹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을 후손에게 전수했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바로 가서 살거라는 예상/계획이 깨어지고 광야에서 살게되었지만, 그 빈궁한 중에도 하나님의 개입을 받아들여 그들 자신을 지키고 후손에게  야훼 신앙을 전수한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는, 그저 옛날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Sunday, January 8, 2012

양과 염소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뉴질랜드 사람들에게 염소의 대표 이미지는 playful하다는 것이었다. 장난기가 많고 높은 곳도 잘 오르내리며 거의 모든 풀을 먹는 동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반대로 양의 대표 이미지는 stupid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염소는 고집센 짐승으로 양은 온순한 동물로 여겨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었다.

양과 염소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의 머리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우리가 어떤 자연/문화적 조건 속에서 자랐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이다. 따라서 성서 텍스트 속에서 양과 염소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는 우리 머리 속의 양과 염소가 아니라 성서 기자의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는 양과 염소의 이미지를 찾아내야 한다. 양과 염소의 이미지가 뉴질랜드와 한국에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성서 시대의 양과 염소의 이미지 역시 지금 우리 머리 속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양은 선택받은 사람들을, 염소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상징하는데, 아마도 키우기 까다로운 양이 아닌, 이풀 저풀 다 잘먹는 착한(?) 염소를 통해 우유와 고기를 공급받는 대개의 저개발 국가나 가난한 지역 사람들에게 성서기자들의 저러한 이미지 선택은 영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일 것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