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24, 2017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5-37)

유대교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인자/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나타나기만 하면 그를 믿고자 하였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메시아는 신적 능력을 행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예수가 수많은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심지어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가 기적을 일으켜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기적을 보이지 않은 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피 흘리며 죽어갔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했던 메시아는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였다.
기적을 행하지 않는 예수는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에게서 기적을 원한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무리들은 많지만 제자는 여전히 드물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점은 요즘은 그가 누구신지 묻는자도 별로 없고, 그를 믿고 싶어하는 자도 별로 없다는 점이다.

Tuesday, March 21, 2017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점

C 목사는 이 곳에서 알게 된 목사다. 남아공에서 이민 온 백인 목사인데, 근처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이다. 이민을 왔어도 영어가 모국어고 또 백인이라 나와 처한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이민을 왔다는 공감대가 있어서 친해졌다. 신학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나와 신학적으로 할 얘기는 많지 않지만, 같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만나서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이다.

C 목사가 올 초에 모텔을 구입해서 운영을 하고 있다. 부부가 본래 교사였고 C 목사의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그간 모아둔 재산이 좀 있었나 보다. C 목사 부부에게는 약간의 지적 장애가 있는 딸이 있는데 나중에 자기들이 죽은 후에도 그 아이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고 싶었다고 한다. 교회에는 다른 목사를 청빙해도 된다는 의사를 표명했는데 교인들이 계속 있어달라고 했단다. 

서양 교회들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주일 예배 한번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목사들이 그렇게 바쁘지는 않다. 주중에 성경 공부 한번 정도 하고 나머지는 신앙 상담이나 병문안을 비정기적으로 한다. 큰 교회 같으면 각종 위원회 회의나 스태프 회의에 시간을 더 쓰게 되겠지만 규모가 큰 교회가 그리 많지 않으니 대부분 목사들은 한국 교회 목사들에 비해 한가하다.

나는 요즘 주일예배 설교, 어린이 설교, 청년부 성경공부, 금요 성경공부를 하고 있고 매주 한번씩 이곳에서 50 Km 떨어져 있는 동네로 가서 그 곳에 있는 두 가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키위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의 3분의 1만 받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 이 불균형은 하나님이 나중에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 주시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이 불균형은 아내가 채워주고 있다. 

물론 나와 아내는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아내의 커리어를 준비해왔지만 실제로 몇년간 이런 삶을 살아오면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음을 깨닫고 있다. 바로 내 안에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성도들이 교회에 애정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나 주변에 있는 키위 목사들이 나보다 낮은 학력과 나보다 낮은 헌신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더 많은 서포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질 때마다 아내에게 더 미안해진다. 물론 한국 교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나도 아내도 잘 알고 있기에 버텨내고 있지만 나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면 목회를 계속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카톨릭의 신부들과 달리 개신교 목회자에게는 가정이 있다. 교회가 목회자에게 나라에서 정한 최저 생계비도 주지 못할 정도라면 그 교회는 목회자를 불러올 생각을 하지 말고 다른 교회와 합하는 게 낫다. 그것이 상식적이다. 만약 그런 교회에 가고 싶어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 목회자는 반드시 자비량을 통해 그 부족한 부분을 메꿔야 하고 성도들은 그 부분을 미안하게 받아들여서 목회자에게 풀타임 사역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지만 성도들이 그 희생을 강요하고 당연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Sunday, March 19, 2017

그저 기다릴 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 왜 가야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교회에 왜 가야할까..
마지막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
이 전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교회에 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사랑, 섬김, 나눔, 봉사.. 다들 좋은 가치들이지만
교회가 아니어도 그런 가치를 실현할 곳들이 많이 있다.
성도간의 교제.. 역시 다른 사람들과도 충분히 교제할 수 있다.

그 분은 교회를 아주 안다녔던 사람은 아니기에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대충은 안다.
죄, 회개, 죄사함, 사랑, 섬김, 심판, 천국..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서 알긴 아는데
그게 자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몇명 있다.
그냥 교회의 가르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저 그런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아예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대화하기가 쉽다.
왜 싫어하는지를 알아서 그 부분에 대한 처방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심드렁한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별로다.
하는 수 없이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릴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Saturday, March 18, 2017

이사를 마치고

새로운 월세집으로 이사를 왔다.
1920년대 집인데 내부를 리모델링해서 생각보다 괜찮다.
우리 집과 벽을 맞대고 있는 옆 집에 사는 노부부는 우리보다 일주일 먼저 남섬에서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다.
십 여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좋은 사람들일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전에 살았던 동네보다는 여러모로 환경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초등학교 옆에 있는 집이라 조금 낫지 않을까 싶다.
좀전에는 한집 건너 옆 집에서 부부싸움이 나서 경찰차가 왔었다.
길거리에는 아이들끼리 놀러 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가난한 동네에서는 부모없이 자기들끼리 노는 아이들이 좀 있는 편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친구들끼리 놀러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
미국이나 이 나라에서는 가난한 동네 외에는 아이들끼리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이를 부모의 엄격한 보호 아래 키우는 것과 자유롭게 키우는 것 중 어떤 방식이 더 나은걸까..

서재가 이층이어서 책을 옮기느라 다리에 힘을 많이 썼더니 다리 근육이 아프다.
내 소원은 이 책을 다 처분하는 것이다.
그래도 많이 줄여서 이제는 책장 두개 분량 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것도 많게 느껴진다.
내 소임이 끝나는 날 나는 미련없이 이 책들을 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 나에게 그런 복을 주실지 모르겠다.

새로운 가정이 이 도시에 정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 곳이 시골 같아서 좋다고 하는데 요즘 강화된 이민법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카톨릭 신자인데 교회에 나오긴 할 것 같다.
우리 교회에 카톨릭 신자 또는 카톨릭 출신이 네 명이나 된다.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그냥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면 된다.

이제 곧 또 한 가정이 이 도시를 떠난다.
나는 로컬에서 이사를 했지만 그 가정은 여기서 다섯시간이나 떨어진 도시로 간다.
로컬 이사에서는 잔 짐들을 대충 싸서 자기 차로 운반하면 되지만
다른 도시로 갈 경우는 모든 짐을 꼼꼼하게 다 싸야 한다.
우리 집 이사는 마쳤으니
이제 그 집 이사나 도와줘야 할까보다..

Thursday, March 16, 2017

우물가의 예수

요한복음 4장을 읽은 후
마음 속에 남겨진 단상을 적어본다.

우물물은 길어 올려야 하나(노력)
샘물은 그냥 떠서 마실 수 있다(은혜).

우물물은 외부에서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뚜껑을 덮어놓아야 하지만(닫힘)
샘물은 계속 흐르고 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열림).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지만(죽음)
샘물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생명).

사람은 스스로 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물을 얻으려면 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내 속에 샘물이 있어서 물의 공급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면
물이 없는 곳에서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물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려면
내 안에 샘물이 있어야 한다.

우물은 물을 가둬 담고 있지만
샘물은 물을 흘려보낸다.
나를 넘어서 내 주변에 생명력을 공급할 수 있다.
척박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었고 생수처럼 사셨다.
인종, 성별, 계층,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이 어떠함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신자는 생수처럼 흐르는 물이 되어 살 것이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세상의 더러움을 씻고 새 힘을 불어 넣어주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Wednesday, March 1, 2017

이사

이 집에서 일년 반을 살았다.
집주인이 들어온다고 해서 이제 곧 집을 비워줘야 한다.
다음 집은 어디가 될지,
어느 동네 어떤 이웃과 함께 살게 될지 기대가 된다.

가구류가 생기다보니 짐이 많아졌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 외에 내 짐은 가방 하나 정도면 좋겠는데,
옷이랑 책 때문에 가방 하나로는 턱도 없다.
나중에 목회를 그만 두게 되면 옷도 책도 다 버리고 싶다.

원래 욕심이 많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어 갈 수록 더 욕심이 없어져 간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냥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가 이 땅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주님 품에 안기고 싶다.

이번 주일에 오랜만에 키위 교회와 연합예배를 드린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나누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길 바란다.
그들과 우리 교우들의 삶이 조금씩 더 겹쳐졌으면 좋겠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인사하는 사이, 그 이후가 필요하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