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31, 2010
2010년의 마지막 날
2010년의 마지막날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온통 눈으로 덮혀있다.
오늘 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 같으면 예배를 취소할텐데 담임목사님은 어떨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길이 얼어붙어도 예배를 취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성도의 안전보다는 예배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아마 둘 다가 아닐까 한다.
맹목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흉기가 될 수도 있는데,
한국에서 신앙생활하다보면 참 무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목사들 중에도 성도들 중에도 있다.
맹목. 보이는게 없는 사람들. 싸울 때 제일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친구가 내일 등산을 하자고 한다.
그러고보니 한국에 온 후 아직 등산을 한번도 못해봤다.
그렇게 바빴나?
2010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주에서 1개월, 서울에서 8개월, 광주에서 3개월
이렇게 지내고 있다.
생각보다 한국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
내년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엇박자를 내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변화될 부분은 변화되어야 한다.
아이는 잘 크고 있다. 이제 5개월째다.
녀석은 착한 듯 슬픈 눈을 가졌다.
아이들 얼굴은 크면서 수도 없이 변한다고 하니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눈에서 슬픈 느낌이 난다.
아이를 위해서 했던 기도가
하나) 욕심이 없고, 둘)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기도였는데,
녀석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 그런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일주일은 휴가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새해 첫 주를 휴가로 시작하다니 감사할 일이다.
Sunday, December 26, 2010
초기 크리스마스
기독교는 본래 부활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보다는
그분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으며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태어나는 것은 누구나 다 똑같지 않은가?
다른 것은 그 후의 삶이다.
어떻게 살았는지가 다르고 어떻게 죽었는지가 다를 뿐이다.
물론 예수님의 경우는 탄생부터 특별했다고 성경이 보도하고 있긴 하지만
그 탄생의 특별함은 그의 부활로 인해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특별한 탄생도 없었을 것이다.
초기 300년 동안 우리와 같은 복음서를 읽었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기념했으면서도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념하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특별하게 여기는 성탄일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념해야 할 만큼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Saturday, December 25, 2010
설교 망치다
이번 설교의 대상을 부모와 함께 예배하는 어린이로 잡았음에도
스토리텔링을 계획대로 해내지 못한 때문만은 아니다.
감정 이입을 하고 약간의 과장된 행동이나 발성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나는 평상시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잘 하는 편이 아니니
설교 때 스토리텔링을 잘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 부분이야 얼마든지 고쳐나갈 수 있으니까..
정작 내가 설교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설교 준비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부분이다.
나는 설교 준비를 얼마만큼 했느냐로 설교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한다.
물론 이 잣대는 순전히 내 설교를 판단하기 위한 잣대이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투여된 시간의 질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자신의 경우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양질의 시간을 설교 준비에 할애했는지..
딱히 정해진 시간의 양은 없다.
10시간도 좋고 20시간도 좋다.
내가 설교할 본문에 대해 나 스스로 충분하다고 여길만큼
연구하고 묵상하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단위에 올라가면
아무리 청중들의 반응이 좋아도 그 설교는 실패다.
엄밀히 말하자면 설교자의 실패라고 얘기해야겠지만
설교자와 설교를 분리할 수 없으니 설교가 실패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그래서 기분이 좀 찝찝하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에게 설교는 시키면서
설교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정말 큰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한국 교회가 망하는 건 시간문제다.
오늘도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단 위에 올라갔다.
그나마 틈틈히 설교문이라도 작성해놨기 때문에
단 위에 설 수 있었지만, 이런 시스템은 하루 속히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교회 일을 줄이든지 공동 설교문을 사용하든지 하면 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현실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데 있을 것이다.
Thursday, December 23, 2010
블로그 이전
글은 다 옮겨졌는데
방명록이랑 댓글들은 제대로 옮겨지지 않았다.
블로거는 한국에서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블로그 서비스인 것 같다.
조금 불편하긴 한데 쓰다보면 익숙해지겠지...
Wednesday, December 22, 2010
크리스마스
한국은 미국에 비해 확실히 크리스마스 느낌이 덜 난다.
미국에 있었을 때는 상점이든 거리든 어딜가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한국은 거의 '지금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맞나'하는 정도이다.
물론 미국의 크리스마스도 너무 상업적이어서 성탄절의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멀긴 하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열심히 준비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한국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다.
모르겠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7년만에 한국에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라서
더 썰렁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원래 이랬었을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때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는데
아이들도 있으니 깊이를 좀 얕게 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려면 역시 이야기가 최고인데
나는 스토리텔러 스타일이 아니라서 스토리텔링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
담임목사님이 내년부터는 중고등부 설교도 해주었으면 하던데
이번 기회에 아이들 설교에 대한 공부를 좀 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사가 설교를 너무 안하는 것도 좋지 않은데
정기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나에겐 좋은 일이다.
내년부터는 센터일도 좀 더 해야하고 교회일도 해야 하고..
다시 바빠지는건가.....
Sunday, December 19, 2010
모금
모금전문가의 강의를 들었는데 나하고는 영 맞지 않았다.
모금계에서 중요한 것은 질보다는 양이었다.
과부의 두 닢 보다는 부자의 1억을 더 대접하는 분위기였다.
기부를 많이 한만큼 대접을 더 해줘야 한단다.
돈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나 접촉하면 안되고
단체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나서야 한단다.
소액기부자는 직원들이 만나도 되고 말이다.
안다. 모금계에서 확실한 효과를 봤던 방법들이라는 것을.
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그런데 어쩌나 나하고는 맞지 않는 것을..
나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부자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
오히려 어려운 형편이지만 한 푼, 두 푼 돕는 손길들에 더욱 관심이 간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돈 많이 내는 사람에게 해야된다는 대접을
액수는 적지만 정성을 다해 내는 사람에게 하고 싶다.
이 바닥에서도 돈의 위력은 실로 엄청나다.
돈 가진 사람, 돈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
예수님은 가진 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들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있는 사람들의 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부의 두 닢과 같은 어린 아이의 도시락으로 가능했다.
그렇지 않은가?
아, 이 놈의 세상 어딜가나 외롭다.
Saturday, December 18, 2010
사격훈련
Thursday, December 9, 2010
데살로니가후서 3:11-12
"그런데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며, 또 권면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
Wednesday, December 8, 2010
오늘의 말씀
오늘 새벽기도 후에 이 말씀이 가슴에 박혔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3-5
Tuesday, December 7, 2010
교회의 리더와 리더십
*2009년 7월에 썼던 글
목사는 교회의 리더가 아닙니다. 목사도 기본적으로 형제입니다. 그 형제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 성례전을 집전하는 역할, 아프고 상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역할 등을 맡은 형제이지 교회의 리더는 아닙니다. 교회의 리더는 오직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리더라는 호칭을 거부하라고 했습니다 (마 23:10). 리더는 오직 한 분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리더라 불리우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교회 운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성도들이 함께 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며 목사는 CEO가 아닙니다.
리더와 리더십은 다릅니다. 리더가 조직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면 리더십은 그 리더의 속성입니다. 교회의 리더는 예수님이시며 리더십은 모든 성도가 함께 지녀야 할 덕목입니다. 그리고 그 리더십은 한 분 리더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리더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 분의 리더십을 배워야 하며 목사도 그렇게 해야 할 사람이지 목사가 리더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다름 아닌 섬김이었습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서로 섬길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은 예수님이 아닌 목사가 교회의 리더인 줄 압니다. 목사에게 계획을 세우고 교회를 이끌어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계획은 목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을 소유한 형제 자매들과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천히 움직여야 합니다. 구원의 길이 좁은 길이듯 구원의 길을 걷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걸어야 할 길도 좁은 길 입니다. 조심조심 한 사람이라도 발을 헛디디지 않을까 조심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시속 백마일로 내달려서는 안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주님 가신 그 길을 교회도 따르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교인들이 그 길을 걷기 힘들다고 불평할 때 같이 기다려 줄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춰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모습을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삼 년간 제자들에게 하신 일들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뇌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세뇌시켜서 자기 사람 만들기는 마음만 먹으면 참 쉬운 일입니다. 심지어 다단계 피라미드 회사에서도 사람을 세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으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유일한 리더이신 예수님의 리더십을 본받아야 합니다.
천지창조
* 2009년 7월에 썼던 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은 천지의 자연물들을 신으로 섬기는 고대의 신관에 강력한 저항을 가하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만들어졌음을 밝힙니다. 태양, 달, 별, 짐승 등 당시 사람들이 그토록 숭배했던 자연물들이 하나님에 의해 손쉽게 창조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모세가 창세기의 기자라고 할 때, 이 이야기를 듣게 될 최초의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모진 핍박과 노동 착취를 당하면서 개인적, 민족적 자존감을 상실한 채 살아갔었던 그들에게 들려진 메시지의 첫마디가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이 놀라운 이유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당시의 종교관을 완전히 뒤엎는 수준의 혁명적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별 감흥 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자연의 많은 개체들을 각기 신으로 모시고 살던 시대에, 일개 탈출 민족의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며 그 신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창조했다는 선언은, 당대 초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종교관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놀라운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이집트는 해와 달을 비롯한 자연물들의 힘을 의인화하고 그것들을 신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에게 멸시 받고 천대받던 히브리인들의 입장에서, 이집트가 섬기던 자연물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그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엄청난 선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구별되게 인간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은,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강력한 힘이 담긴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처럼 살아왔지만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이라는 이 기쁜 소식이 얼마나 그들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을 주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동일한 메시지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창세기의 창조이야기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온 세상을 만드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람들은 나를 무시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는 이 위대한 선포가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Monday, December 6, 2010
영적 건강
목사는 영적 건강을 돌본다는 말을 한다.
몸이 아플 때 아픈 몸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의사이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는 게 맞다.
(물론 의사를 만날 수 없는 지역에 있는 경우, 긴급한 경우,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몸이 아플 때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인가?
만약 이사람이 자신의 몸만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부탁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몸이 아픔으로 인해 영혼의 상처를 입었거나
또는 영적인 힘이 약해질 것 같아서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했다면 제대로 잘 한거다.
병에 걸린 사람들을 찾아가보면
그사람의 영적 건강 상태가 보인다.
몸은 병들었어도 영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
이는 단순히 기분이 좋은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외적 평안함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뿌리내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몸의 아픔과 그로 인한 육체의 고통이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병이 들었을 때 몸이 낫는 것만 생각한다.
몸이 나아야만 평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몸이 나았을 때 평안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불신자들도 다 갖고 있는 생각이다.
신앙인이라면 몸이 병들어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한다.
평안함은 몸이 아프지 않아야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단 몸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학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사업이 잘 안된다고 기도 부탁하는 사람들,
아이 성적이 좋지 않다고 기도 부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단지 그 외적 조건들의 개선(사업이 잘됨, 성적이 좋아짐)만으로
평안함을 얻으려 한다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몸에 병균이 침입했을 때 몸이 병균과 싸우는 과정이 있다.
열이 나고, 기침도 하고, 콧물도 흘리고..
나쁜 것이 아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울고 불고 따지고 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쁜 것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을 떠나면 안된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리면 안된다.
그 무엇보다도 영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적 건강은 내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 힘을 상실해 버리면 이후의 인생은 하나님 없는 인생,
우상에 의해 지배되는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영이 건강하다는 말은 또한
우리 내면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내면의 근간이 하나님께 닿아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지않고 늘상 그 부분을 살피는 사람들이다.
목사들은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고,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목사들에게 영적인 부분이 아닌 외적인 부분,
이를테면 몸, 돈, 사업, 학교 성적.. 등등에 대해 기도해 달라고 할 때는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이다.
몸은 의사에게, 돈은 재테크 전문가에게, 사업은 비지니스 컨설턴트에게,
학교 성적은 교사에게 문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부분의 문제가 영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사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반드시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이런 외적인 문제들이 내 내면을 병들게 한다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꼭 목사에게 부탁해서 진단을 받고 기도와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영적 건강도 한번 잃으면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Sunday, December 5, 2010
혼자서
일주일은 우리집에 일주일은 처가집에 아이를 보내주기로 했다.
오늘 부모님 댁에 먼저 아이를 데려다 주고 왔다.
일주 후에는 처가집으로 가서 또 일주일을 지낼 예정이다.
앞으로 2주동안 아내랑 아이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
좀전에 집에 도착했는데 혼자 운전하고 오는 내내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지..
집에 들어서는데 정말 집이 죽어있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2주를 어찌 버티나..
누구는 나에게 자유가 주어졌다고 하는데
나와 아내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도 아내도 같이 있어야 자유롭다.
아내 없이 혼자 있는 지금 왠지 감옥에 있는 기분이다..
Friday, December 3, 2010
얼굴 빛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아이는 내가 자기와 눈을 맞춰주면 좋아한다.
내 손가락을 잡기도 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기도 한다.
내가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좋은가 보다.
그냥 보고만 있는건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문득 '얼굴 빛을 비춰달라'는 시편의 말씀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이런 구절들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시 67:1)"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등등
내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에게 복인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 내겐 복이요 구원인 것이다.
아이가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기도 하는데,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다.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찌어찌 고개를 돌리다가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되면,
이런,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보고 계셨던 거다.
그 '얼굴 빛'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를 건져내는 구원의 힘이 되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얼굴 빛을 감추는 게 아니라
내가 얼굴을 돌렸던 적이 많았던 거다.
마치 내가 아이를 꾸준히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아이는 계속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대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신체 언어를 통해 표현되었지만
실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어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말씀이라 여겨진다.
하나님이 지금도 날 바라보고 계신다.
아이처럼 절로 환한 미소가 지어져야 진짜 하나님의 자녀 아니겠는가?
Thursday, December 2, 2010
인권
인권이란 건강과 비슷하다.
아프지 않으면 별 관심이 없다.
요즘은 예방적 차원에서 건강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안다.
아프지 않으려고 건강을 지키는 것은 확실히 바람직한 행위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 보다는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인권도 건강과 비슷해서 실제로 자신에게 인권 침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일단 인권 침해를 당하면 그 때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침해된 인권을
살리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그리고 곧 혼자 힘으로는 침해된 인권을 다시 되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인권침해는 자기보다 훨씬 힘있는 존재나 조직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국가 권력으로부터 인권 침해를 당했을 때 그 거대한 권력 앞에서
개인의 혼자만의 힘으로 잃어버린 인권을 찾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사람들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찾는다.
함께 연대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인권 침해를 당한 사람과 함께 어깨를 걸어주는 사람들은
한 사람에 대한 인권 침해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에 대한 인권 침해를 방관했을 때 같은 종류의 인권침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다.
인권이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임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국가 조직 내에 인권을 보호하는
조직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에만 있는 조직이 아니다. 전세계 수많은 나라에 인권위원회가 있다.
인권이란 개인의 문제,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universal)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권 침해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 전 세계인들이 힘을 합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인류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말로 잡아내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인권이라는 말은 그냥 어느 순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이 아니다.
페르시아왕 사이러스의 칙령으로부터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인권 개념이
로마 시대의 자연법 프랑스의 자연권을 거쳐 세계인권선언에 이르러서 인권이라는 말로 표현되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말은 우리에게 현실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장애인들에게, 사회소외계층에게 인권이라는 말은 아직도 실체가 없는 말이다.
인권이라는 말을 현실화 시키는 과제가 우리에게 여전히 주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일이 아니다.
함께 힘을 모아서 지켜야 하고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해 놓은 귀한 진보를 후퇴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극렬히 저항해야 할 것이다.
Tuesday, November 30, 2010
새벽기도
오랜만에 새벽기도에 나갔다.
이 교회는 본래 새벽기도를 안하는 교회지만
일 년에 두차례 대림절과 고난주간 동안에만 새벽기도회를 갖는다고 한다.
덕분에 나도 이번 대림절 기간동안 새벽기도에 나가게 되었다.
대학교때까지는 나도 심심찮게 새벽기도에 나갔었다.
아버지는 하루도 새벽기도를 쉬지 않으셨는데,
나는 주로 주일 새벽기도에만 빠지지 않고 참석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렸을 때는 새벽기도 시간이 네시 반이었는데
요즘은 네시 반에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 교회는 새벽기도를 여섯시에 드린다.
지금은 여섯시도 새벽으로 쳐주나보다.
내가 새벽기도에 흥미를 잃은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뭐 이런저런 객관적인 이유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나 스스로가
새벽기도를 통해서 별 유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새벽기도 체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시끄럽게 기도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싫어지기도 했다.
기도는 모름지기 집중인데
곁에서 시끄럽게 하면 집중이 잘 안된다.
조용히 혼자서 하는 기도가 훨씬 나에게는 맞는 것 같다.
오늘 새벽에 기도를 하면서
이 교회 성도들은 확실히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다른 교회에는 늦게 까지 기도하는 분들이 몇분은 꼭 있는데
이 교회 분들은 한 십분이나 십오분정도 밖에 기도를 안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록 오랜만에 새벽기도에 나왔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기도하던 습관을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그런지
적어도 한시간은 기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리 부산스러운지..하마터면 짜증을 낼 뻔 했다.
내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내가 불끄고 갈테니 먼저 가시라고 했다.
어찌보면 다행이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아무도 없는 텅빈 교회당에서
홀로 기도를 드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오늘 하나님과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깊이있는 대화를 좀 했다.
하나님이 아마 좀 뜨끔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말 안해도 이미 알고는 계셨겠지만..
Sunday, November 28, 2010
북한의 공격
북한이 연평도를 해안포로 공격했고 한국군이 대응 공격을 했다.
그 와중에 한국 군인 2명과 민간인 2명이 북한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한국의 공격으로 북한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국 언론들은 주로 한국군의 대응 공격의 강도가 약했다고 비판을 했다.
여기에 한 일본 언론도 한국군이 생각보다 약해서 놀랐다는 글을 실은 모양이다.
일본은 은근히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길 바랄 것이다.
6.25 전쟁 때도 그들이 얻은 경제적 이득이 상당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지금 일본 경제의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는 한국이
전쟁으로 타격을 입는다면 일본으로서는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미국은 이참에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호를 서해로 진입시켰다.
중국 견제의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다.
중국이 이번에도 미국의 항모 진입을 막을 명분은 없을 것이다.
중국 앞 바다까지 미국의 항공모함이 밀고 들어왔으니
중국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과연 중국이 언제까지 북한을 편들어줄지도 궁금하다.
한반도는 여전히 미국과 중국이라는 대국의 대리 전쟁터가 될 확률이 꽤 높아 보인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면 당연히 미군이 나설 것이고
미군이 나서면 중국군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미국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이번에 북한의 짧은 공격에도 4명이 죽었다. 북한에서도 분명 사망자가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물론 전면전은 아니고 국지전이겠지만, 피해는 불가피하다.
결국 죽는 것은 우리 자식들이거나 우리 동포들이다.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북한 체제의 수뇌부의 잘못으로 그들도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열강들이 있고 그들 사이에 복잡한 힘의 역학이 작용하고 있다.
더 큰 틀에서 이번 사건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맞았다고 때릴 생각만 하기 보다는
때리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 더 큰 이득을 얻어낼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군의 방어능력, 공격 능력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지만
군대 역시 정치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대북정책, 외교정책, 대통령의 의도, 정치권의 계산 등에 의해 군도 영향을 받게 되어있다.
군대만 뭐라고 질책할 것이 아니다.
열강들과 북한, 국내 기득권 세력들의 복잡한 관계망을 잘 살피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한국 정부에 주어진 숙제이다.
Sunday, November 21, 2010
현실로서의 신앙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장이,
자기 회사에 다니는 외국인 근로자가 다쳤는데,
왜 자기나 자기 가족이 다쳤을 때처럼 도와주지 않는 걸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왜 그러는걸까?
그 사람에게 신앙이란 도대체 뭔가?
그 사람에게 있어 신앙이란..
허상이다.
실재가 아니다.
이제 제발 좀 깨어나자.
다음 주면 또 다시 대림절이다.
대림절이면 늘상 하는 첫번째 설교가 '깨어나라'아닌가?
제발 좀 헛된 신앙의 상태에서 깨어나자.
신앙은 진짜다. 허상이 아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밤 중에 울린 전화의 수화기 너머로
본인과 가족의 목숨을 위협하는 백인의 목소리를 듣고,
잠자고 있는 아내와 이제 갓 태어난 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This is real.
그때 비로소 신앙이 현실로 다가왔다고 한다.
신앙은,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현실이다. 장난이 아니고 가상도 아니다.
진짜 내 곁에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외면하면 없어지는 그런 허상이 아니다.
말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다쳤는데 대충 치료해 주고,
다쳐서 일 못했는데, 결근 처리하고, 돈 안주고
그리고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앙은 목사의 설교 속에, 다른 사람들의 간증 속에,
성경 이야기 속에 있지 않다.
내 삶의 현실 속에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신앙을 외면하고
머릿속으로만, 말로만 신앙생활하는 자들이여
이제 제발 좀 깨어나자. 부탁이다.
세계인권선언문
세계인권선언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년 12월 10일 UN 총회 제정)
전문
인류가족 모두의 존엄성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기초다. 인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만행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했던가를 기억해보라. 인류의 양심을 분노케 했던 야만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날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지고지순의 염원은 ‘이제 제발 모든 인간이 언론의 자유, 신념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리라.
유엔헌장은 이미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의 동등한 권리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했고, 보다 폭넓은 자유 속에서 사회진보를 촉진하고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도대체 인권이 무엇이고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유엔총회는 이제 모든 개인과 조직이 이 선언을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지속적인 국내적 국제적 조치를 통해 회원국 국민들의 보편적 자유와 권리신장을 위해 노력하도록, 모든 인류가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기준’으로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4조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한다.
5조 어느 누구도 고문이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모욕, 형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
6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차별 없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8조 모든 사람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당했을 때, 해당 국가 법원에 의해 효과적으로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9조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체포, 구금, 추방을 당하지 않는다.
10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별받을 때, 독립적이고 공평한 법정에서 공평하고 공개적인 심문을 받을 권리가 있다.
11조 범죄의 소추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보장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공개재판을 통해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될 권리가 있다.
12조 개인의 프라이버시, 가족, 주택, 통신에 대해 타인이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서도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된다.
13조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 영토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또한 그 나라를 떠날 권리가 있고, 다시 돌아올 권리도 있다.
14조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타국에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망명할 권리가 있다.
15조 누구나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누구든지 정당한 근거 없이 국적을 빼앗기지 않으며, 자기 국적을 바꾸거나 다른 국적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16조 성년이 된 남녀는 인종, 국적, 종교의 제한을 받지 않고 결혼할 수 있으며, 가정을 이룰 권리가 있다. 결혼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남녀는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
17조 모든 사람은 혼자서 또는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정당한 이유 없이 남에게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20조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20조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21조 모든 사람은 직접 또는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해, 자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의 공직을 맡을 권리가 있다.
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23조 모든 사람은 일할 권리,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실업상태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
24조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정기적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
25조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26조 모든 사람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초등교육과 기초교육은 무상이어야 하며,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우선적으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
27조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즐기며, 학문적 진보와 혜택을 공유할 권리가 있다.
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29조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 의무를 진다.
30조 이 선언에서 말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남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
국가인권위원회 낭독용
Wednesday, November 17, 2010
기독교계 파워 엘리트?
2005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최상위 0.1% 31,800여 명의 종교 비율이
개신교 40.5% 천주교 22.6% 불교 17.7%라고 한다.
기독교계 비율이 60%를 넘는 수치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비율에 속하는 대다수는 이른바 강남 5대 교회라는
소망, 광림, 충현, 온누리, 사랑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것이다.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들이 파워 엘리트들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기 보다
그렇게 많은 기독교계 파워 엘리트가 있는 데도
나라가 이 모양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거다.
지금도 저 비율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최상위에
포진하고 있는 저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따르고 실천한다면
한국 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Tuesday, November 16, 2010
의사소통의 어려움
외국인 노동자들과 상담을 하면서 역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의사소통이다.
여러번 얘기해줘도 잘 알아듣지를 못한다.
충분히 이해했겠지 싶었는데 나중에 또 똑같은 질문을 한다.
통역을 쓰면 좋은데 통역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통역을 구했다 해도 제대로 통역을 하고 있는지 내가 확인할 수도 없고
일단 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최대한 쉽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영어를 좀 알아듣는 사람들도
조금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이해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영어도 정말 쉽게 하려고 한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나도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 할 때가 있었다.
듣고는 있었지만 뭔가 확실치 않았을 때가 많이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데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던 때..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며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어쨌든, 통역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풀어야 할 숙제다.
Thursday, November 11, 2010
아내의 생일
아이의 탄생 순간을 지켜봤기 때문인지
'생일'하니 자연스럽게 그 때가 다시 생각난다.
아내도 그렇게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세상에 나와서
내 아내가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아내가 없는 내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상상이 되지도 않는다.
바울 사도가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랑은 말이나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몸을 돌볼때 말로만 하거나 마음으로만 하지 않는다.
말로만 마음으로만 하면 몸은 벌써 굶거나 병들어 죽어 버렸을 것이다.
눈에 조그만 티 하나만 들어가도 그것을 빼내기 위해 애쓰지 않는가.
말로만 '빠져라 빠져라' 하지 않는다.
말로만 '눈아 사랑한다' 하지 않는다.
직접 손을 움직인다. 온 몸을 움직인다.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만큼 내 몸을 먼저 움직여야 할 것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 사랑, 그것도 사랑이냐?
Sunday, November 7, 2010
'허수아비 춤'을 읽고
그런데도 예수님은 돈의 지배를 경계하는 말을 했었다.
하물며 자본주의 시대인 지금 돈의 위세는 얼마나 막강하겠는가?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심을 돈과 결합해놓은 체제이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듯 돈도 끝이 없다.
한 사람이 억, 십억, 백억, 천억, 조.. 끝없이 부를 축적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가치의 척도는 돈이다.
심지어 사람의 가치마저 돈으로 매김 한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자본주의에서 사람은 돈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이라는
인간의 유한성을 알기에, 흙에서 왔다는 자신의 본분을 알고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창조주에게 감사와 경외를 올리는 삶을 살 줄을 안다.
하지만 돈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돈이 자신의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는 착각 속에 살며, 돈이라는 무한한 그러나 그 자체로는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과 자기를 동일시하며 돈의 액수와 비례하여 자신의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과 그 생각을 공유/강화시키는 체제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산다.
돈이 매력적인 것은 실제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눈앞에서 이루어지게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돈은 내 욕심 보다는 정의와 평화, 사랑을 우선시하는 하나님에 비해
현실 세계에서 훨씬 더 끌리는 존재이다.
이렇게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돈의 힘과 맞서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싸움은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돈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뿐 사실은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심과의 싸움인데
과연 인간의 욕심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교회? 신앙심?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집 두채 가진 집사가 집이 한채도 없는 평신도에게 집 한채를 그냥 주어서 살게하는 일이 교회에서 과연 가능할까..
Thursday, November 4, 2010
내 카운셀러
고민거리가 있어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진지하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얼마전까지 너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으니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을 좀 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이 녀석이 옹알이를 시작하는 것이다.
내 눈을 보면서 계속 뭐라고 옹알거리는거다.
그것도 한 두마디가 아니라 계속 말이다.
한참을 그러다가 오른 손을 제 턱 밑에 대고 씩 웃더니 조금 있다가 잠들어 버렸다.
물론 타이밍이 절묘하게 들어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묘한 느낌이었다.
방언 통역의 은사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들었을텐데 말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긴 하지만
아이가 이제 내 카운셀러다. ^^
Monday, November 1, 2010
예방접종
세종류의 접종을 하고 왔는데 모두 보건소에서 맞힐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일반 소아과에서 접종을 했다.
총 29만원이 나왔다.
주사 세 대에 29만원이다.
그런데 이게 한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보통 3차까지 접종을 해야한다.
예방접종 종류가 12가지나 되는 데
전부 합치면 이게 도대체 얼마인가?
돈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서민들에게는 정말 큰 액수 아닌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정부가
도대체 유아 예방접종도 무료로 하지 않고 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교회와 술
구약이나 신약에서도 특별한 경우 아니고는 금주하라는 이야기는 없다.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는 기장측 교회인데
술을 자연스럽게 마신다.
야외예배에 가서 점심식사 하면서 막걸리도 한잔씩 하고
체육대회나 저녁 식사하면서도 한 잔씩 한다.
괜찮다. 자연스럽고 좋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하면
한국의 술문화다.
한국의 술문화는 술을 권하는 문화가 아닌가.
이 술을 권하는 문화가 교회 안에서도 형성 되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사회처럼 강하게 이런 문화가 자리잡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은근히 그런 성향이 보인다.
나는 술을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닌지라
한 두잔이면 그걸로 좋은데
그 이상 마시기를 권유한다.
담임목사님이 옆에 계셨기 때문에
나에게 더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지만(사실, 담임목사님은 말술이다^^)
남자성도들과 나만 있는 자리였더라면 좀더 세게 권하지 않았을까 싶다.
교회에서 술을 마시게 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아마도 한국의 술 문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교회에서 바른 음주 문화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나?^^
자연신?
환경 관련된 신앙 강좌를 들었다.
자연이 소중하다는 사실, 마땅히 자연파괴 행위를 막아야 하며,
생활 속에서 자연을 보호하고 아끼는 실천들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강연자가 자연을 너무 신격화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연은 소중하지만 신은 아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에는 여러번의 빙하기가 있었다고 한다.
빙하기를 거치면서 정말 엄청난 생명체들이
자신들의 잘못과 상관없이 죽게 된다.
그 생명체들이 자연에 무슨 해를 끼쳤었는가?
자연은 그러한 죽음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정말로 매정한 것이 자연이다.
현재 자연 훼손의 많은 부분이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인정한다.
현재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자연재해가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자연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뭐, 거기까지도 인정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공해를 일으키기 전에도 있어왔던
자연재해들, 빙하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할 건가?
지구 자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태양의 활동에 대해서는 뭐라 할건가?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그냥 항상성을 유지하기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닥치는 대로 없애버린다. 그래서 자연은 어머니도 못된다.
어떤 어머니가 그렇게 무자비 하겠는가..
하여, 자연은 당연히 잘 보존해야하지만 자연이 신이라는 주장이나, 자연에 인격이나 신격을
부여하려는 시도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Saturday, October 16, 2010
사례비의 추억
월급 얼마 주실거냐고 묻는 말은
얼마만큼의 돈을 주면 그 일을 할 것이고
그 만큼의 돈을 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일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돈이 좀 더 큰 목적이다.
사례비는 미리 정해놓는 것이 아니다.
얼마를 주든 상관없이 그저 가서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일에 수혜를 받은 사람들이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사례비이다.
돈보다는 일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목회자들에게 월급을 준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성도들이 볼 때 목회자는 월급을 받으려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 스스로도 월급을 흥정하고 목회지로 가지 않았다.
그냥 가서 사역을 했다.
성도들은 그런 목회자의 헌신에 감사해서 사례비를 드리고
고마운 마음을 쌀, 반찬 등을 가져다 드리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요즘은 사례비라는 말만 사용할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월급과 다를 바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례비 얼마 주실건가요?"
이렇게 묻는다면 그건 사례비가 아니라 월급을 말하는 거다.
액수를 미리 정해 놓고 가는 것이다.
사례비는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라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냥 사역지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사역을 한 후, 그 사역에 감사하여 성도들이 드리는 사례비를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없다.
정 안되겠으면 까마귀를 통해서도 먹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못 믿겠거든 하늘의 새와 들의 핀 꽃을 보면 된다.
상상해보면 멋지지 않은가?
목회자는 돈 문제를 떠나서 성도들을 위해 순전히 헌신하고
성도들은 목회자의 헌신에 감사해서 성심껏 사례하는 모습 말이다.
Friday, October 15, 2010
스리랑카 코끼리
2주 전쯤 부대표님과 내가 올해 전반기에 그렇게 공을 들였던 스리랑카 코끼리가
드디어 한국 땅을 밟았다.
광주에 내려와 있어서 기증식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뉴스를 통해 그 녀석들을 보니 감개무량.
이 일을 성사시키느라 수개월동안 애를 썼더랬다.
나야 주로 영어 통/번역을 맡아서 했었지만 부대표님은 상당히 마음 고생이 심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여기에 쓸 수는 없고..
어쨌든 코끼리 두마리가 무사히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다행이다.
우리가 140여 마리의 희귀 동물도 같이 들여오려고 했는데,
그 동물들도 아마 곧 들어오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 스리랑카 코끼리가 들어오는 걸 보면서
한편으로는 코끼리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생각났다.
코끼리가 아무리 귀한 동물이라지만 사람보다 귀하겠는가..
어제도 몇백만원의 임금을 체불한 사장을 만났다.
중재를 시도했지만 자기는 해줄만큼 해줬기 때문에 더이상 줄 것이 없다고 한다.
언어가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과는 말이 통했는데
언어가 같은 한국인 사장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노동자가 코끼리였다면? 아마도 극진한 대접을 했겠지..
이게 뭐냐.. 슬픈 현실이다..
Sunday, October 10, 2010
좋은 교회
성도들에게서 너무도 깍듯한 대접을 받아서
내 버릇이 나빠질까봐 내심 걱정이 되었었다.
목사가 대접받기에 익숙해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언제나 섬기는 사람이지
섬김을 받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 교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서빙하는 것을 별 부담없이 받아들일 정도니까.
이 정도면 좋다.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교회.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다.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건
어제 밤에 네명의 여자 집사님들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문득 나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부부 생활이 그 분들에 비해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많은 문제들을 안고 어떻게 그렇게 결혼 생활들을 지속해올 수 있었는지
그 분들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별로 해 줄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줍잖게 뻔한 얘기를 해주고 싶지도 않았고..
부부생활 다 힘들다고 하는 데 나는 안 그렇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도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생각해 보면 딱히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내 동생과 같은 나이인데,
다른 사람의 결혼을 말리고 싶다는 말을 듣고
슬펐다.
아, 참 슬펐다.
좀 전에 만났던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인 상사에게 맞았다고 한다.
순진한 시골 청년처럼 생긴 외국인이었다.
자기가 잘못한 일도 없는 데 맞았단다.
뭘 잘못했다고 때리는 일도 있어서는 안되지만,
잘못한 일도 없는 데 때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정신상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그런 행동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내가 도울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새로운 동네에 와서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고 있다.
사람들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이 진심으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Monday, October 4, 2010
인상적인 교회
미국에 있었을 때 내가 구상했던 교회는
새벽기도가 없고, 예배는 주일 오전에 한번, 소모임이 주중에 한번 있는 교회였다.
한국에 이런 교회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번에 일하게 된 교회가 새벽기도가 없고, 예배는 주일 오전에 한번,
수요일 저녁에 성경공부만 있는 교회이다.
30년된 교회인데, 이렇게 오래된 교회가 이처럼 심플하게 교회를 꾸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우선 외국인노동자센터의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서울에 비하면 온전히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다.
주로 상담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 외에도 내가 하기에 따라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친구와 '방가방가'라는 영화를 봤다.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다룬 영화였다.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감사했고,
코믹하지만 마냥 웃고만 있을 수는 없는, 가슴 시린 영화였다.
우리나 외국인이나 모두가 똑같은 사람들이고
국적과 인종을 떠나 서로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냥 사람인것이다.
동등하게 대해주면 된다.
그런데 왜 그걸 못하고 있는 건지 답답할 따름이다.
Saturday, October 2, 2010
광주에 둥지를 틀다
드디어 광주에 방을 얻었다.
투룸인데 서울에서 살았던 반지하 원룸보다는 훨씬 크고 좋은 집이다.
월세도 서울보다 싸고 동네도 조용하고 교회까지 걸어다닐 수도 있는 곳이니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집이다.
서울에서 일을 시작할때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정확히 사역자가 필요한 시기에 교회를 방문했다.
그 교회에서 이미 외국인노동자 사역을 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두번이나 일어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할 뿐이다.
아직 사례비를 얼마나 받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역자란 모름지기 사역을 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월급이 아니고 사례비를 받을 뿐.
물론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당장 월세와 생활비는 어찌할 것인가?
걱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오늘 밥을 먹었으면 그걸로 감사할 따름이다.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길 것.
살려고 하지 않고 죽음으로 그 분의 뜻을 이루려 할 때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 것이다.
사역이란 그런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는 필수이지 옵션이 아니다.
그 짐을 져야만 가벼워 질 것이다.
Monday, September 20, 2010
광주에 다녀오다
광주에 다녀왔다.
교회를 방문해서 목사님을 만나뵙고 왔다.
생각보다 훨씬 온화하고 편안한 분이셨다.
광주 운동권 출신이라서 뭔가 겉모습도 강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의외로 푸근한 느낌을 받았다.
30-40명 정도의 성도들이 모여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당 출입문에 늘어져 있는 강아지가 인상적이었는데
강아지도 쫓아내지 않는 포용성(?)이 인상적이었을까..
외국인노동자들도 함께 예배에 참여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이 전부 스리랑카 사람들이었다.
서울에서 스리랑카 교회를 맡아서 사역을 하고
랑카 관련 사업을 진행하다가 왔었는데
광주에 와서도 스리랑카 사람들을 만나다니
랑카와 나는 참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서울에서 랑카 친구들에게 배웠던 랑카어로 인사를 나눴다.
세상 참 좁다.
할일이 많이 있을 것 같았다.
목사님도 사모님도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처럼 반겨주셨고
꼭 같이 일하자고 말씀해주셨다.
내가 일복이 있기는 한가보다.
9월 마지막 주에 광주에 다시 가서 집을 구하기로 했다.
그 교회 집사님께서 교회 근처에 집을 알아봐 주시기로 하셨다.
여호와이레는 이럴때 쓰는 말일 것이다.
Wednesday, September 15, 2010
아내와 아이
아이도 물론 소중하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아내가 소중하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으면 나도 아이를 더 좋아하게 될거라고 말했었는데
아이를 낳고 난 지금에도 아내를 더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고 있다.
아이가 이쁘고 소중하고 사랑스럽지만 아내보다 더 그렇지는 않다.
왜 많은 사람들이 아내보다 아이를, 남편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된다.
Tuesday, August 31, 2010
산후조리원
산후조리원에 있는데
아내와 함께 있는 남편은 나밖에 없다.
가끔씩 다른 산모의 남편도 방문하지만
대개는 혼자서 2주 동안 조리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함께 있어보니
아무리 산후조리원이라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더 편하다.
아이 젖주고 기저귀 갈고 할 때도 남편이 옆에서 거들어 주면
훨씬 수월하다.
아이를 낳으면 최소 한달은 남편들도 육아휴직을 하면 좋은데
한국 사회는 아직 그 정도가 안된다.
회사별로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남자의 경우 출산휴가가 겨우 하루 내지 삼일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내 아내의 경우 병원에 들어가서 아이 낳는 데만 이틀이 걸렸는데 말이다.
더구나 아이를 낳았다고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특히나 우리나라의 경우 산후조리를 오래하는 편이 아닌가?
남편 없이 어떻게 산후조리가 가능한가?
아이는 혼자 낳는 것이 아니고 혼자 키우는 것도 아니다.
산후조리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 없이 혼자서 산후조리원에 있는 엄마들이 측은할 뿐이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지 않나 싶다.
이 현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한 예가 TV 예능 프로그램인데,
예전 한 10년 전만해도 예능 프로에서 형, 언니 소리를 듣기 어려웠던 걸로 기억한다.
사적으로는 형, 동생하는 사이지만 공중파 방송에서는
시청자 앞에 선 연예인으로서의 공적인 관계를 유지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사적 영역에서의 호칭과 친분 관계가
공중파 방송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일반 대중들이 별 문제없이 이러한 현상을 받아 들이고 있는 걸 봐서는
한국 사회 전체에 이러한 공적 영역의 축소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가 싶다.
사적 영역의 친분 관계가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형 동생/선 후배로 이루어진 끼리끼리 문화가 공고해 지고
이들이 기득권까지 갖게 된다면
그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들 무리에 끼려고 노력할 것이고,
사적 영역을 확장하는 데 갖은 노력과 비용을 다 투자하지 않겠는가.
단지 연예계 뿐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사적인 영역이 너무
비대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권부터 연예계에 이르기까지 무슨 무슨 라인이 있고
형, 동생, 친구라는 호칭 아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문화가
만연해 있는 것 같다.
형 동생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적인 정도 소중하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그러한 정이 공정함이나 정의를 앞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적 영역에서의 진한 우정은 사적 영역안에서만 기능케 하고
공적 영역에서는 공정한 태도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Friday, August 27, 2010
아빠가 되다
15만에서 50만 정도가 정상 수치란다.
촉진제를 투여하고 진통이 심해졌을 때 여섯팩의 혈소판을 수혈했다.
수혈 후 혈액 검사 결과 혈소판 수치는 겨우 5만.
담당의사는 8만대로 올라갈걸로 예상했지만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수치였다.
다시 여섯팩을 더 수혈했다.
5만 2천.
혈소판 수치가 낮으면 무통 주사를 맞을 수 없단다.
무통 주사의 부작용 중 하나가 뇌출혈이기 때문이란다.
25시간 동안 아내는 무통 주사 없이 진통을 견뎌냈다.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고통이 심해지자 산소 마스크를 쓰기도 했지만
아내는 마지막 출산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25시간동안 진통을 참아낸 아내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을 자지 않고 아내가 몸의 다른 부위에 힘을 주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 뿐.
잠깐 한 눈을 팔면 아내는 침대 사이드 바를 움켜 쥐었다.
팔에 무리하게 힘을 쓰면 나중에 산후통증이 생길 수 있다.
진통이 올 때마다 아내의 팔과 손목의 힘을 풀어주었고,
자궁 외의 다른 부분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노력했다.
아이의 머리가 반쯤 삐져나왔다.
다음 번 진통이 오는 순간에
아내는 마지막 푸쉬를,
의사는 회음부 절개를,
레지던트는 아직 자궁 내부에 있는 아이의 엉덩이를 밀기로 했다.
출혈을 최소화하기 위해 위 세 동작이 동시에 일어나야 했다.
마지막 진통의 순간
모두가 동시에 움직였고
순식간에 아이가 밖으로 나왔다.
아이가 나오면서 자궁 내벽을 긁었다.
자궁 내부에서 출혈이 생기면 위험하다.
담당의사는 수련의들과 바쁘게 손을 놀렸다.
나는 막 세상에 나와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아이와
그 아이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는 간호사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간호사가 나를 데리고 신생아실로 나갔다.
아내는 아이를 가슴에 올려놓아보고 싶어 했지만
내부출혈을 막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의사가 제지했다.
신생아실 앞에서 아이를 들여보내기 전에
처음으로 아이를 가슴에 안아보았다.
묘한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어떤 끌림이 느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이 나와 그 녀석 사이를 잇고 있는 듯 했다.
다시 분만실로 돌아왔다.
아내의 온 몸이 부어있었다.
전혈 3팩을 다시 수혈했다.
25시간 동안 혈소판 12팩과 전혈 3팩, 총 15팩을 수혈했다.
긴 밤이었다.
Thursday, August 26, 2010
메가처치 단상
"In other words, we’re not trying to reach God because God reached us. We’re trying to reach people. So we built the church to be able to reach people. We’re all about people because we’re all about God, and God’s all about people. People look on the outward." (Interview with Robert Morris, Vision Magazine, Christmas 2006).
게이트웨이 처치의 로버트 모리스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다.
게이트웨이 처치를 비롯한 많은 메가처치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종의 현상은 그들이 테크놀로지에 굉장한 투자를 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물론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법들을 사용한다. 다른 것은 메시지일 뿐이다. 그런데 잘 들여다 보면 그 메시지조차도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메시지만을 골라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시지가 싫어서 사람이 떠나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술 문명, 자본주의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잘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복음이란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성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비결과 같은 것일 것이다. 성경의 일부는 이러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세상 시스템을 전복하며 들어오는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시스템의 임함이 아니던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도 사람을 사랑해야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현대 메가처치의 입장과 내 입장은 사뭇 다르다. 사탕의 달콤함에 빠져있는 그들에게 사탕을 계속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사탕의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사탕이 아닌 다른 음식에 익숙해 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 주는 것이 옳은 일인가? 설령 그 길이 좁은 길이고 힘들고 어려운 길,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도 그 길을 걷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아니겠는가?
Monday, August 23, 2010
아이를 기다리며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원래 예정일은 지난주 일요일이었는데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엄마 뱃속이 그리도 좋은지..
내일 유도분만을 한다고 한다.
나오기 싫어도 억지로 나와야 할 상황이다.
살다보면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할 상황이 제법 있는데
이 녀석은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하기 싫은 걸 해야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아이들은 본래 엄마 뱃속에서 삼개월은 더 있어야 한단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머리가 너무 커져서 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에 삼개월 일찍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Fourth Trimester는 밖에 나와서 가지게 되었고 이 기간동안은
최대한 엄마 뱃속과 동일한 조건에서 키워줘야 한다고 한다.
일주일동안 진통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진통이 오지 않았다.
진통, 정말 우리 남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고통을 겪어야지만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고 한다.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옛사람들은 이것을 하와의 죄 값이라 불렀을까..
창세기 기자에게 남자의 죄값이 노동의 고통이라면 여자의 죄값은 해산의 고통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역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나은 존재다.
많은 남자들이 노동의 고통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여자들은 해산의 고통과 함께 노동의 고통까지 감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일이면 아내의 몸이 가벼워지게 된다.
그동안 참 고생 많았다.
순산하기를 빌 뿐이다.
Sunday, August 15, 2010
천생 유목민
이제 이곳을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 행사를 끝으로 나는 이곳을 떠날 예정이다.
다시 돌아오게 될까?
지금 마음으로서야 다시 돌아오고 싶지는 않지만
랑카 관련 쪽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뭔가 배운 것은 많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행사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배울 수 있었고,
한국 사회에서 일을 추진해나가려면 어떤 식으로 해야하는지도 알게 되었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배운 것들을 써 먹을 것이냐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노"라고 대답할 것 같다.
배운대로 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의 나는 배운 것을 비판적으로 사용할 수준은 되는 것 같다.
어쨌든 또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된다.
외할머니가 아내에게 그랬단다.
"가가 한 군데 오래 있지를 못혀"
천생 유목민이지..
Monday, August 9, 2010
누구를 위한 행사인가
내일이 행사인데 대표는 아직도 순서 담당자를 확정하지 않고 있다.
이런 식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데도 행사를 잘(?) 마쳐왔다니 할 말이 없다.
그 밑에서 헌신적으로,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찌 행사를 치뤄낼 수 있었겠는가.
이런 행사는 누구를 위한 행사이며, 이런 행사를 위해 무리하게 힘을 쏟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보상 받아야 하는가..
제대로 계획을 세워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일을 추진해왔다면 이렇게 밤 늦게까지 힘들여 일하지 않아도 될텐데, 왜 이 분은 이리도 계획도 없이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굳어진 스타일을 과연 누가 바꿀 수 있을까..
Thursday, August 5, 2010
보여주기식 행사
보여주기식 행사는 이제 좀 그만 맡았으면 좋겠다.
급하게 연락해서 뭐 부탁하기도 지겹다.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해도 행사가 잘 마쳐지는 것을 보면,
그것도 한 두번의 요행이 아니라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 전체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우리 보스에게 면죄부를 주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거리를 좀 두려고 한다.
내가 중심을 잃지 않도록..
Saturday, July 31, 2010
벌거벗은 임금님
벌거벗고 다니는 임금님에게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는 중압감.
그러나 그 중압감을 이겨내고,
그 중압감을 주는 체제와 불화하며,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부터가 시작이다.
여전히 그 말을 하길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그 잘못된 면을 말로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하거나
임금에게 옷을 입히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리더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리더의 모습 중 하나는
책임을 져야하는 때가 왔을 때 그 책임을 남에게 또는 부하직원에게 떠넘기지 않고
진심으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명예와 업적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숨김없이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며
백의종군하는 자세를 갖는 사람말이다.
이미 너무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았고
너무 많은 명예를 얻어서,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내가 바라던 리더의 모습은 아니다.
그런 리더를 따르고 싶지도 않고..
Sunday, July 25, 2010
피스메이커
많은 경우에서 그렇듯
이번 사건도 서로 간에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누군가 말을 잘못 전달한 것이다.
물론 그 말이 전달되기 이전에 이미 상대방에 대한 안좋은 선입견이 있었고,
그 선입견의 형성에 일조한 사람이 또 있었다.
가뜩이나 인상이 안좋은 사람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을 테고
이 말을 남편에게 옮기니 남편이 분노하고
그 남편이 상대편 여자에게 찾아가 따지고
그 여자는 이 사건을 또 자기 남편에게 이야기 하고
이 남편은 상대편 여자의 남편에게 항의하고
두 남편의 친구들이 가세하고 험한 말이 오고 가고 했던 모양이다.
말을 옮길 때는 참 조심해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옮기는 일은 자제했으면 좋겠다.
그냥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 말하면 좋을 텐데,
왜 "누가 이렇게 말하더라"라는 말을 하는지..
하여튼 화해 시도가 이번 한번으로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다.
주여 지혜를 주옵소서.
정의의 잣대
"나는 이 지평을 이른바 ‘외부성의 사회’ 속에서 찾는다. 그것은 전체를 통제·규율하는 구실로서 선택된 일부를 관용하는 ‘관용성의 사회’도 아니며, 결국 상품 자유주의에 함몰된 ‘다양성의 사회’도 아니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의 이념에서 그 정의의 잣대를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의 자리와 시선에 두는 태도와 실천을 말한다. 부자와 강자의 스펙트럼에서 빠져 나온 여광(餘光)으로 빈자와 약자를 돌본다는 헛소리를 뭉개고, 국민전체를 잘 살게 하겠다는 헛소리를 잠재우고, 무조건, 제일 못 사는 극소수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한다." - 김영민 http://www.jk.ne.kr/main-01.htm
교회가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돈을 벌어서 나누겠다는 헛소리를 집어치우고
돈이 없을 때나 돈을 버는 과정에서부터 사회적 약자를 섬기는 자세와
바람없는 나눔의 실천을 잃지 않는, 그런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건가?
여기서 일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본다.
자기가 가진 많은 것들 중 극히 일부를 주면서 생색내는 사람들,
우리의 필요가 아닌 자기의 필요(이를테면, 새것을 샀는데 헌것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헌것을 치워야 되는), 에 의해 "주(실제로는 버리)는"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
필요가 없어서 받지 않으려하면 배가 불렀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런 '척'하는 사람들 정말 혐오스럽다.
예수님이 위선자들을 싫어한 이유를 몸소 느끼고 있다.
반면, 몇 억을 기부하면서도
한사코 자기의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어렵게 모아온 돈을 기부하면서
더 기부하지 못해 죄송스러워 하는 분들,
이런 분들에게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Friday, July 16, 2010
Gestalt Prayer
I am not in this world to live up to your expectations,
And you are not in this world to live up to mine.
You are you, and I am I, and if by chance we find each other, it's beautiful.
If not, it can't be helped.
(Fritz Perls, 1969)
Wednesday, July 14, 2010
기도시간
내가 목표로 하는 기도 시간의 양은 2시간 반이다.
하루가 24시간이니 그 십분의 일인 2시간 반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아버지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나 역시 그 정도는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기도를 강요하시는 분은 아니다.
나도 강요한다고 할 사람도 아니고..
기도는 양화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바울 사도의 권고대로 기도는 쉬지 않고 하는 것이라 하면,
그것은 우리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리라.
크리스천에게 기도는 호흡과 마찬가지이며 늘상 함께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나는 기도를 양으로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2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정했는가.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냥 뭔가 분주한 삶 속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아내를 떠나 집 바깥에서 일할 때도 늘상 아내를 생각하지만
집에 들어와서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 역시 중요한 것처럼,
늘 하나님을 생각하며 산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겨우 2시간 반이냐, 더 오래 할수록 더 좋은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물음에는, 음.. 할 말이 없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냥 나는 2시간 반에 끌린다.
지금은 그만큼 못하고 있지만 점차 2시간 반에 가까이 갈 거라 믿는다.
Sunday, July 11, 2010
집에 다녀오다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다.
부모님을 만나 뵈었고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환대를 받았다.
내가 부모님을 초대하고 환대를 베풀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아직 나에겐 사치이며 꿈이다.
늘 변함없으신 부모님.
두 분이서 참 행복하게 살고 계셨다.
비록 세상 관점으로는 가진 것이 없는 분들이시지만
늘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을 얻는 분들이시다.
내 신앙의 사표가 되시는 분.
신학적 정치적으로 나와 많은 부분이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목회하는 30여년간 한결같이 유지해오고 있는
모습은 나에게 한마디로 경이이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저렇게 겉과 속이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환경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굴하지 않고
주님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는 저 모습,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평안함을 잃지 않는 저 모습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
수십년 후 내가 노 목회자가 되었을 때
내 모습이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늘 아버지를 보면서 했다.
Saturday, June 26, 2010
스리랑카 교회
스리랑카 교회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다.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사람 수는 불과 네 다섯명 정도이고 그마저도 일요일에 일이 있으면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
대부분 영세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또 돈을 벌어서 스리랑카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부쳐야 하기 때문에 야근이든 초과근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하려고 한다.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해야하는 경우에 처해 있는 사람도 많고..
언어의 문제도 있다. 한국말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한 두명 정도 있고 나머지는 일상적인 회화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하거나 아예 한국말을 못한다.
영어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우선 한국말을 모르다보니 찬송을 부르기가 어렵다.
발음도 안되고 의미도 모르고..
반주도 없이 나 혼자서 기타치며 불러야 하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발음부터 하나씩 가르쳐 주자니 예배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궁여지책으로 한국어와 영어로 되어 있는 악보를 몇개 구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모르니 내가 영어 발음과 뜻까지 알려줘야 한다. 설상가상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렇다.
영어로만 할 수도, 한국어로만 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한국어를 이해 못하고 어떤 사람은 영어를 이해 못하고..
통역을 시키자니 통역과 따로 만나서 설교 내용에 대한 선이해를 시키는 시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매일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게다가 가끔씩 지방에 있는 스리랑카 친구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 친구들 중에는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된 사람도 많아서 말 그대로 복음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설교 내용을 이해시키기가 더 어려워진다.
지금으로서는 혼자서 기타치며 찬양 가르쳐주고 설교하고, 찬양할 때도 설교할 때도 한국말 뜻 알려주고 영어로 설명해주고 이러고 있다.
동역자가 한명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찬양만 맡아주어도 내가 좀더 말씀 선포에 신경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둘다 하려니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주변에 외국인 사역을 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
무보수라서 어렵기는 하겠지만 나도 무보수로 하고 있으니 재정적으로 희생할 각오가 있으신 분이라면 평신도든 신학생이든 함께하면 좋을 듯 싶다.
사람 수는 많지 않지만 정말 귀중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먼저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해야 되지 않겠는가?
Wednesday, June 23, 2010
아내 사랑
현재 내가 관여하고 있는 사업은 스리랑카 사업과 이주아동학교 설립사업이다.
처음에는 학교 쪽 일을 해야하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스리랑카나 아니면 영어권 국가쪽으로 움직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내가 한국에서 본인의 일을 아무런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스리랑카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스리랑카 일이든 학교 일이든 둘다 외국인을 돕는 일이고, 스리랑카에서 일을 하든 학교에서 일하든 한국적 시스템 속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굳이 스리랑카까지 다시 나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내가 아니라면 스리랑카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장소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곳에 가든 내가 할 일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내의 경우는 다르다. 아내의 라이센스는 사용 가능한 곳이 있고 불가능한 곳이 있다.
열심히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했는 데 그 걸 써먹을 길이 없다면, 그것도 본인이 그렇게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데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좀 더 여유가 있는 내가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처가에서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도 상당하고..
내가 유일하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내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가 나를 무방비 상태로 열어두기로 작정한 단 한명의 사람이 아내이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만약 내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게 싫다면 얼마든지 스스로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부모든 가족이든 친척이든 친구든 어느 누구라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그게 된다, 나는. 그런데 아내에게만은 나를 그냥 열어놓는다. 열어놓고 그의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사랑은 있고 없음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도의 문제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정도인데 상대방에게 자신을 여는 것을 사랑이라고 본다면 상대방에게 자신을 열어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이 자신의 사랑의 정도이다. 정도의 차이로 볼 때 내가 할 수있는 사랑의 최대치가 바로 아내에 대한 사랑이다. 아내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야말로 100의 수준이다. 하나님에게 배운 사랑, 예수님에게 배운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하듯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지 않는가. 아내를 위해 죽으라는 말이 아닌가! 정말 그정도로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도 아내보다 앞설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일이 성직이라고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나에겐 더 귀한 성직이다. 아담처럼 하와와 같이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아담은 하와가 이미 그 열매를 먹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와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는다. 어쩌겠는가. 아담도 그 열매를 먹었다. 그것이 사랑이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다. "당신이 내게 준 여자가 그 열매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와 한 몸이된, 내가 사랑하는 그 여자가 죽습니다. 나도 같이 죽겠습니다." 그 사랑을 누가 막겠는가? 아담은 하와와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누가 아담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아담이 사랑하는 하와를 위해 죽는 길을 택했듯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는가. 사랑은 그런 것이지 않는가? 상대방을 위해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의 가치로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는 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은 이 사랑이 가족을 넘어 이웃에게로 흘러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을 말이다. 아담은 단지 자기 아내를 위해/사랑해 죽었고 그것이 그의 한계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사랑해 죽음으로 아담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사랑은 그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아직 예수님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아내를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고 사랑의 그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있다.
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설파해야하는 사람이다.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웃 사랑을 입에 담을소냐..
Wednesday, June 9, 2010
쉼터 예배
지금 내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는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남자 쉼터와 여자 쉼터가 있는데 합치면 아마도 백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을 것이다. 이분들을 위해서 하루에 세번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데(개인적으로 예배 횟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몇 주 전부터 내가 월요일 저녁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주중에 하는 일이 많아서 가급적 저녁 예배 인도는 안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목사가 예배 인도할 사람이 없는 데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어서 맡기로 한 것이다.
첫날 예배 인도를 할 때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사람들이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이제껏 설교했던 대상들 중에 가장 이해력이 떨어지는 분들 같았다.
교육 수준이 낮기도 하지만 타문화권에서 온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준비한 설교문을 덮고 그 분들의 반응을 주시하며 설교의 난이도를 맞추기 시작했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핀트를 맞추는 작업이랄까..
최고의 렌즈를 가지고 있는 카메라(성경)가 있어도 핀트를 맞추지 못하면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법이다.
핀트가 미리 맞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현장에서 뷰파인더를 보았을 때 초점이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핀트를 재조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 있느냐는 것이다.
핀트를 제대로 다시 맞출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의 도우심에 나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심리적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쌓아온 내공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이라도 너는 너일 수 있는가.
너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가. 이제껏 공부하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너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가. 성령님과 매 순간 동행하고 있는 너로서의 자신감이 있는가.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순간 성경 말씀과 청중들에게 집중하며 네 전부를 열어젖힐 수 있는가. 그런 자신감이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Saturday, June 5, 2010
Lectio Divina
초기 수도사들의 성경 읽기 방법.
내가 아닌 성경이 나를 읽게 하는 방식.
네 단계.
1. Lectio 본문을 소리내어 여러번 읽는다. 천천히 묵상하듯이. 말씀의 침잠.
2. Meditatio 생각, 반추, 특별히 와닿는 문구나 단어에 주목
3. Oratio 마음 열기. 직관적인 하나님과의 대화. 묵상을 통해 얻어진 것을 하나님께 말하는 단계.
4. Contemplatio 경청하는 단계. 모든 생각을 털어냄.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을 들음.
렉티오 디비나는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성경 읽기 방법이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를 돌아보며 내 삶을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재 조준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렉티오 디비나만 집중하여 공부를 등한시 하면 안된다.
잘못하면 과도한 주관성에 갇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렉티오 디비나 역시 몸을 얻어야 한다.
몸을 얻은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몸과 삶의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명상의 수준에서 멈춘다면 이 역시도 헛된 놀음에 불과할 것이다.
아내와 함께 있으려면..
아내와 함께 있지 못할 상황에 대해서 미국에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당연히 임신, 출산 기간 동안 아내와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에 온 후 이 일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크다.
서울 물가가 워낙 비싸니 산후조리원도 비싸고..
게다가 아내는 대학병원급에서만 애를 낳아야할 상황이니 병원비도 많이 나올거고..
산후조리원에 가지 않으려면 집이 좀 커서 장모님이 와계서도 될 정도는 되야 하는데,
두사람 누우면 꽉차는 원룸에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 두 칸짜리를 얻을 돈도 없고..
결국 별 수 없이 전주로 내려가서 그 곳에서 애를 낳아야 할 것 같다.
장모님 몸이 편찮으시니 어쩔 수 없이 산후조리원에 가야할 것 같고..
문제는 그 기간동안 내가 아내와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 달 말에 내려가서 8월 중순에 애를 낳고 삼개월 쉰다고 하면
한 5개월 정도를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거 심하게 고민된다.
더더구나 다른 일도 아니고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뜻깊은 순간/기간이 아닌가!!
과연 출산, 산후 기간동안 내가 아내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게 맞는가?
함께 있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내가 이런 분리를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 들여야만 하는가?
결혼 할 때가 생각난다.
그 때 난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했었고 아내는 전주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남들은 다들 주말 부부로 살아야지 어떻게 하냐고 말했고,
우리는 헤어져 있으려면 뭐하러 결혼하냐고 했었다.
단지 같이 있으려는 이유 하나로 난 엘지를 그만뒀고
회사를 옮겨 전주로 내려갔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아내와 같이 있고 싶다.
일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일은 언제나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때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 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선택이 모두가 말리는 일이어도 그 가치를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Sunday, May 30, 2010
예수의 흔적
말씀이 육신을 입을 때, 오직 그때에만 구원은 가능하다.
예수님은 온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셨고,
제자들은 그런 그분을 말씀 그 자체로 보았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것도 다름아닌 자신의 살과 피이다.
십자가 죽음 후의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닌 몸의 부활이었다.
그 새로운 몸에도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손에 못자국, 허리에 창자국-을 보고 부활을 믿었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고 싶은가.
당신의 손을 내밀라.
거기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가?
당신의 삶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가?
나눔의 흔적이 있는가?
낮아짐의 흔적이 있는가?
사랑의 흔적이 있는가?
세상의 악과 싸운 흔적이 있는가?
있다면 그 흔적으로 주님을 전하라.
없다면 조용히 입 닥치고 먼저 그 흔적을 당신의 몸/삶에 새기라.
제발, "입"은 그 후에 열자.
Wednesday, May 19, 2010
그 방법 밖에 없는건가..
아, 결국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가..
대기업 재단이 매년 십억씩을 대주는 방향으로..
그래서 힘있는 자들, 돈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고
섬겨주고 그래야 하나보다.
그래야 돈을 얻어 낼 수 있으니까..
우리 학교 아이들도 최고로 교육을 시켜서 부자 만들고
유명한 정치가 만들고 그래야 하나보다.
그래야 이 아이들도 커서 돈 좀 쓸테니까..
어리석구나..
대자본의 힘을 빌어서 밖에 할 수 없더냐..
그 안에서 어떤 교육이 이루어 지겠는가..
그 돈을 대주는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을 만들어내는 교육 아니겠는가..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입시 교육 아니겠는가..
기득권 세력에 편입하려는 교육 아니겠는가..
그런 학교를 또 뭐하러 만드나..
입시 지옥과 인종 차별적인 학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심신을 치유하고 건강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키워내는 그런 학교를 만들면 안되나..
규모가 작고 허름하고 학생 수가 몇명 안되더라도
학교에 갈 수 없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봐주는
그런 학교면 안되나..
답답하구나..
필요하면
"Preach the gospel constantly and, if necessary, use words"
- Francis of Assisi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라. 그리고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라"
-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말이 아닌 몸/삶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
몸이 앞서고 말이 뒤를 따르는 상태.
끊임없이 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으려면
내 삶이 어떠해야 하겠는가.
말로하는 복음 전파보다 훨씬 어렵지 않겠는가.
프란체스코는 왜 그 어려운 길을 갔는가.
그래야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프리칭은 단순한 전파가 아니다.
프리칭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를 하는 데
말이 아닌 몸/삶을 사용한다.
Incarnation.
프란체스코도 말씀이 몸을 입어야만 구원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Tuesday, May 18, 2010
돈을 받아야만 하나?
이 동네에서 요즘
사람들에게 돈을 내게 해야 자립심도 생기고
스스로 당당해지게 된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공짜로 주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돈을 내도록 해야
자본주의 훈련도 되고 자존심도 생긴다는 이야기 말이다.
돈 몇 푼에 자기 자존심을 일치 시키는 사람이 있을까?
설령 그런 사람이 있다손치더라도
그러한 생각을 바꿔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어떻게 돈과 자존심을 연결하려고 하는가..
3천원짜리 밥을 5백원 주고 먹게 해주면 그 사람이 떳떳해하고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가?
차라리 돈을 주고 받아야만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에서
돈이 없어도 사랑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의 예를
보여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은 사람들이
그 정도의 은혜도 베풀지 못하는가?
돈으로가 아닌 은혜로 그들을 감화시키고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자본주의 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그 나라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그들을
동참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공짜로 먹으니까 감사함을 모른다고?
그럼 돈 몇백원 내고 먹으면 감사해 할까?
감사할 줄 모르는 몇 명도 있지만
감사해 하는 몇 명도 있다.
공짜로 열명을 먹였는데
그 중의 한사람만이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그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녹일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은혜도 주는 것이다.
받기 시작하면 사랑도 사라지고 은혜도 사라지는 법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뭔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주었듯
그들도 남들에게 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Wednesday, May 12, 2010
허위의식
지식인의 허위의식 이라는 말이 있다.
말로는 민중, 소외자 들을 외치지만 정작 자신은 소외계층이 아닌 사람들.
갈 곳이 있고 뒤를 받쳐줄 사람들이 있으면서
마치 자기들도 소외계층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입으로는 마르크스와 사회주의를 외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그 곳에서 몸을 빼 떠났던 사람들.
신앙인의 허위의식이란 어떤가.
말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돌아갈 집이 있고 쌓아둔 돈이 있고 뒤를 봐줄 사람들이 있으면서
말로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 사람들.
입으로만 하나님나라를 외치는 사람들.
포즈는 좋다.
사진이외에 남는 게 무엇이냐.
Monday, May 10, 2010
Saturday, May 1, 2010
아들
오늘 아이의 성별을 알았다.
아들이란다.
아들이든 딸이든 첫번째 아이를 위해 해왔던 기도가 있다.
욕심이 없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욕심이 없는 아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
이거면 된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드러날때는 몸이 필요한데
이 아이가 그 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
자연 속에서 살게 해주는 것.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흙과 풀이 있는 곳
빌딩이 아닌 산과 나무와 개울이 있는 곳
그런 곳에서 살게 해주고 싶다.
아이의 교육?
나중 문제다.
우선은 놀아야 한다.
맘껏 즐겁게, 놀 수 있는 만큼 놀아야 한다.
엄마 아빠와 친구와 자연에게서 배우는 것이 먼저이다.
글을 통한 지식 전달은 그 후여야 한다.
어떻게 이걸 현실로 만들지 생각중이다.
현재 나에게 가능한 대안은 네가지이다.
1번이 될지, 2번이 될지, 3번이 될지, 4번이 될지..
아직은 나도 모른다.
그러나 조만간 결정이 나긴 할 것이다.
Friday, April 30, 2010
김규항 강연회
강연회에서 김규항을 만났다.
사진으로 본 적이 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질문을 하나 했고 답변을 들었다.
나는 외국인 근로자 특히 미등록 근로자 자녀의 교육 소외 문제에 대해 질문했고
그는 아직은 그 문제까지 다룰 여력은 없어보였다.
그의 생활반경 안에 아직 이주아동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주변에서 이주아동, 특히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않는 이주아동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 아직 그런 아이들을 직접 만나 본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아이들이 실제로 있다면,
누군가는,
아직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정도의 힘도 지니고 있지 못한,
그 아이들의 입이 되어주고, 팔다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정주민 아이들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이주민 아이들, 그 중에서도
더욱 소외받고 있는 미등록 이주민 아이들의 교육 역시 중요하다.
내 아이와 그 아이 모두 똑같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밖으로 나올 힘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좌파 지식인이라면 자기 밥벌이 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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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에게는 그의 삶의 자리가 있고 그 곳에서 그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나 역시 나의 삶의 자리가 있고 그 곳에서의 내 역할이 있다.
관건은 연대 가능성인데,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예수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 연대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믿는다.
Wednesday, April 28, 2010
신앙의 확실성
"신앙의 확실성은 이론적인 확실성이 아니어서 우리가 단번에 얻을 수가 있거나 그 후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의 실천적 확실성이어서 한 인간의 활동적인 삶 속에서, 행위와 고난 속에서, 전체적인 체험 속에서 항상 새롭게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 때문에 신앙의 확실성은 또한 과거 지향적인, 즉 과거에 얻은 지식에 근거를 둔 확실성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확실성이요, ‘기다림’의 확실성이다.
하나님 신앙에 확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항상 신적인 현실성의 새로운 실증을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한 번쯤은 하나님 사상 및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어서 실존적인 부담력을 경험했고,
이제는 비록 전적으로 새롭고 놀라운 형태로 될지는 몰라도 이러한 확증을 항상 새로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둘수 없다는 데에 그의 확실성이 놓여 있는 것이다" (하인리히 오트,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 나라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다. Utopia: ou (
not)+ topos (place)
현실에 없는 곳, 아직 아무것도 아닌 곳.
하나님 나라 역시
이 세상/체계/system에는 없는 곳이며,
김영민이 말하듯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실천과 연대 속에서만,
그리고
글·사유, 말·대면, 생활양식, 희망이라는
네개의 존재양식이 엮어지는 구체적인 일상의 열매 속에서만
얼핏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곳이다.
성경은 세상/체계와의 불화를 요구하는
예수님의 수많은 말과 행동들을 기록해 놓았다.
체계친화적인 이들에게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실로 체계와의 불화 없이
하나님나라를 체험할 기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Sunday, April 25, 2010
전도
갑작스럽게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상황이 왔다.
짧은 시간이었다.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었다.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가서
악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다.
하나님은 결국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
하나님은 아들을 죽인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대신 아들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로 작정하셨다.
그 징표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아들 안에 있는자, 아들과 연합한 자.
그런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생명을 주는 방편으로 삼으신 것이다.
선으로 악을 갚으시고 사랑으로 덮으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가 당신들을 돕는 이유이다.
그리고 당신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Saturday, April 24, 2010
부와 권력의 힘
장관, 국회의원, 대사 등등..
얼마전에는 청와대 모 수석 보좌관과 통화도 했다.
기업체 사장이나 이사급들과도 만나고
고위급 검사도 만났다.
대형교회 목사와 직접 통화도 했다.
아시아 모 국가의 대통령 비서관과 그 나라 고위 경찰 간부와
근 일주일 째 통역으로 같이 다니고도 있다.
그나라 주한 대사도 만났다.
다들 내가 평생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같이 대화하고 식사하고 통역도 해주고 하면서
역시 나는 그들과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뭔가를 가지고 있거나 가졌던 사람들, 그 뭔가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거나 확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 뭔가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나는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그저 경험이나 쌓는 셈 치자 하며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진다.
저 멀리 변방에서 일하고자 하는 데 점점 중앙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
역시 이 나라에서, 아니 인간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힘이라는 인력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인가.....
그들의 도움이 없이 사업은 불가능한 것인가...
Saturday, April 17, 2010
갈렙
사십년간
광야에서, 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몸소 체험했던 그가,
나이 여든 다섯에,
길르앗 산지를 차지하러 가면서 했던 말,
"혹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
하나님의 선택권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
내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이 옳음을 믿는 것.
진짜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듯
하나님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있고
우리가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지듯
하나님 역시 그분의 선택에 책임을 지신다.
갈렙의 믿음은 닫힌 믿음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안에 갇힌 믿음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열린 믿음,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대화 상대가 된다.
자유로운 두 인격체가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다.
설득과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런 과정을 기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설득하고 나도 하나님을 설득하고..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설득당하는 쪽은 항상
내 쪽이 되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고 내 영혼은 더욱 섬세하게
다듬어질 것이다.
팔십오세의 갈렙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물론 그 역시 그가 속한 시대적 상황과 세계관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의 믿음은 화석화된 믿음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었다.
Sunday, April 4, 2010
부활과 갈릴리
무덤 안에 앉아있던 한 청년을 만난 이야기를 전해준다.
흰 옷을 입고 있던 그 청년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대로
갈릴로 먼저 가셨다는 사실을 여인들에게 전한다.
이 일을 겪은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떨며 무덤에서 나와 도망하고 무서움으로 인하여 아무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가복음은 여기에서 끝난다 (그 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첨부된 내용으로 초기 마가복음 사본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여인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도 정신을 차린 그들이 한 일이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러 갈릴리로 달려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기록에만 의존하다면 부활한 예수님이 처음으로 한 일은 갈릴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한 말을 지키려 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마가복음 14장 28절에는 예수님이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있겠다고 말씀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나를 만나려거든 갈릴리로 오너라."
이것이 부활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한 첫번째 메시지이다.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여제자들이 무덤을 찾고 있을 때,
12명의 남자 제자들이 두려움과 실망으로 뿔뿔히 흩어져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갈릴리로 오라고 하신다.
내가 먼저 가있을테니 너희들도 오라고 하신다.
무덤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있는 곳, 기쁨과 슬픔이 있는 곳, 땀과 애환이 있는 곳, 좌절과 아픔이 있는 곳
그 곳에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마가복음 기자는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이 거기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침묵한다.
여인들이, 제자들이, 그 후에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이 벌써 갈릴리에 가 계시고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
두려움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를 삶의 현장 속으로 부르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자 갈릴리로 가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무덤도 예루살렘도 아닌 갈릴리이다.
Wednesday, March 31, 2010
이주아동권리보장
국회의원 김동성 정책토론회 『이주아동권리보장, 일시 : 2009년 12월 15일(화) 오후 14:00 ~ 16:30 |
주제발표
국제인권기준에 비추어 본 한국의 이주아동의 권리 실태
김 성 천 (중앙대 아동복지학과 교수)
I. 들어가는 글
•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이주노동자가 들어 온 지 벌써 역사가 20년이 되면서, 이주노동자의 수 뿐만 아니라 이주아동의 수는 전반적으로 증가 추세에 있음.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 2009년 최초로 100만명을 넘어서 5월 1일 현재 110만6884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같은 시점 주민등록인구 4959만여명의 2.2% 수준이며, 작년 89만1341명보다 21만5543명(24.2%) 증가한 숫자임.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통계에 의하면 2008년 3월 기준 16세 미만 체류 외국인은 3만 8466명에 달하며 이중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 아동 약 1만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 2-3만 여명의 외국인 아동들이 대부분 불법체류자 신분 상태로 국내 체류하고 있을 것으로 추산함.
• 이주민의 문제는 ‘이주노동자의 거주권과 노동권의 문제’에서 이주민의 ‘가정과 자녀의 권리문제’로 확장되고 있음.
• 더구나 가족 동반이 허락되지 않는 국내 외국인근로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동들은 아예 통계에도 잡히지 않고 있음. 미등록 이주아동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부터 한국에 장기체류한 아동으로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이 이미 한국인인 경우도 많음(관련전문가들은 미등록 이주아동의 약 1/3 정도로 추산함).
•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에서 살게 된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기본적인 생계보장, 학업, 의료 및 보건, 문화 및 여가, 사회관계 형성 등의 권리와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어서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음. 미등록 이주아동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부터 한국에 장기체류한 아동으로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이 이미 한국인인 경우도 많음. 그러나 속인주의정책과 이주민에 대한 통제정책을 시행하는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보장 실태는 매우 미약함.
• 다문화사회에서의 속인주의 중심의 현행법과 제도는 우리사회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 태어나자마자 불법체류자가 되는 상황, 무국적 신생아의 존재 상황, 2만 명 이상의 미등록 이주아동의 방치 상황 등의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프랑스 사태와 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할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있음.
• 한국 이주아동의 법률적 지위: 이주노동자의 자녀는 외국인이므로, 그 지위는 그들이 가진 체류자격에 의하여 규정되나 아동은 성인과는 달리 불법체류자라 할지라도 불법행위를 저지른 주체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는 달리 규정됨. 그것은 국내법 또는 대한민국이 가입한 국제협약의 규정에 따르게 되어있음.
• 외국: 체류신분에 관계없이 이주아동 지원
미국, 호주, 일본, 독일 등의 국가의 이민정책은 자국의 인구와 노동정책이 고려되면서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으나 이주아동의 체류신분과 상관없이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며 자국의 인적자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음. 즉, 이주민의 미등록 신분은 법적으로 명명된 하나의 틀로만 인식될 뿐, 이주민의 권리, 특히 이주아동을 위한 권리는 인격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보장하고 있음.
• 이미 국제사회는 이주노동자의 권리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아동을 위한 권리보장을 강조하는 협약을 채택함. 대표적인 것은 ‘유엔아동권리협약’과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임.
• 한국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가볍게 여기고 국내 체류 이주아동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은 국가임. 국내 출생 이주노동자의 자녀들도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어서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음.
• 증가하는 이주노동자와 이주아동은 사회적으로 쟁점화되고 있으나 정부나 대다수 국민의 차별적인 기존 인식은 큰 변화가 없는 것이 현실임. 더욱이 최근의 경기침체로 인해 기존의 온정적인 시선조차도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 특히 이주아동의 경우, 이들의 한국체류는 한국이 비준한 국제법상 합법적 체류라고 보아야 하는데, 불법체류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임.
•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6년 156개 한국의 이주자 지원단체들이 연대하여, ‘약 2만 여명의 국내 무국적 혹은 불법체류 이주청소년들도 우리나라에서 그들의 부모와 함께 살아가며 국내 청소년들과 동일하게 대우받을 수 있게 하자’라는 취지로, 「이주아동권리보장법(안)」을 국회에 입법 촉구하였으나 결실을 얻지 못함.
• 2009년, ‘이주 아동·청소년 권리보장을 위한 시민행동’이 결성되어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을 추진하고 있음.
Ⅱ. 국제인권기준과 아동권리
1. 아동권리 개념의 발전
• 인권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출생과 더불어 소유하는 자연법적 보편적 권리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적용됨. 따라서 인권은 특정한 상황이나 정치적 체계에 상관없이 항상 존중되어야 하며, 어떤 특정한 개인의 권리 또는 특정한 상황에 있는 집단의 권리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또는 필적하는 권리를 빼앗기 위해 위협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될 수 있음.
• 인권이란 개념은 억압에 저항한다는 소극적 단계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물질적․비물질적 욕구가 충족될 권리와 자원의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 평등하게 참여할 권리 등을 긍정하는 적극적 단계로 발전되어 왔음(이혜원, 2006).
• 아동의 권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성인의 권리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아동기라는 발달적 특성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국제적인 관심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시작됨.
• 아동은 물론 전체 인류의 존엄과 평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유엔헌장(1945)과 비록 선언적 규정이기는 하지만 세계인권선언(1948)이 공표되어 모든 인류를 위한 기본 규칙과 자유를 규정하는 획기적인 발판이 마련되었고, 이후 유엔은 1959년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보완하고 확대하여 아동권리선언을 채택하게 됨.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괄적 인권보장의 관점으로 전환되면서 인권차별철폐조약(1965), 인권에 관한 국제규약(1966)등을 통해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다뤄지기 시작함. 그러나 아동 고유의 권리보장은 197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어 제44차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유엔아동권리협약(1989)이 채택됨.
•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주요 이념으로 채택한 이 협약은 아동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 보호수단으로의 접근 그리고 최저한도의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인지적․윤리적․영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차별금지를 강조하고 있음. 따라서 아동은 아동 및 그 부모 또는 법적 대리인의 인종, 피부색, 성별, 언어, 출신, 재산, 장애, 출생 또는 다른 지위 등에 관계없이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받지 않고 모든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함. 또한 이 협약은 아동을 돌보고 보호함에 있어 가족과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고 동시에 국가는 가족과 부모가 그들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줄 책임이 있음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음(Ife, 2001).
•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도상국의 열악한 아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세계정상회담에 참석한 158개국 대표들이 아동의 생존․보호․발달을 위한 세계선언과 국가행동계획(1990)을 만장일치로 채택함. 이 외에도 유엔에는 국제적 아동유괴의 민사적 측면에 관한 협약(헤이그국제사법회의,1980), 소년범 사법행정을 위한 유엔의 표준최소규칙(베이징규칙, 1985), 아동보호 및 국가 간 입양 관련 협력에 관한 협약(1993), 응급 및 전쟁 상황에서 여성과 아동보호를 위한 선언(1974), ILO협약 및 권고 등이 있음. 특히 이주민과 관련해서는 이주민인권선언(1985),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1990) 등이 있음.
2. 한국이 가입한 국제인권조약
|
일 시 |
국제기구 가입 및 국제협약비준내용 |
|
1950년 |
대량학살범죄의 처벌과 방지를 위한 협약 |
|
1978년 |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 |
|
1984년 |
모든 형태의 여성차별 철폐에 관한 협약 |
|
1985년 |
체류국의 국민이 아닌 개인의 인권에 관한 선언(외국인인권선언) |
|
1990년 |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
|
1991년 |
유엔아동권리협약 |
|
1992년 |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정서 |
|
1995년 |
고문 및 그 밖의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협약 |
|
1998년 |
고용과 직업상의 차별에 관한 협약(ILO협약 111호) |
|
2001년 |
노동자의 재해보상에 대한 내․외국인 노동자의 동등한 대우에 관한 협약(ILO협약 19호) |
Ⅲ.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 추계
• 미등록 이주아동 수 추계의 어려움. 정확한 통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고 단지 추계만이 가능함.
•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 추계 방법 : 첫째, 출입국ㆍ외국인 정책본부의 출입국
통계연(월)보와 교육과학기술부 및 각 지방자치단체의 관련통계, 둘째, 해당 대사관에 등록된 국내출생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 및 입국한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와 출국한 미등록 이주아동 수의 통계, 셋째, 대한의사협회에 집계되어 있는 국내 출생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통계. 현실적으로 첫 번째 방법 외에는 자료수집이 불가능한 상태임.
•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의 추계
기존 통계에 의한 추계: 2009년 법무부의 공식적 통계(추정치)에 의하면 18세 이하 불법체류아동은 5,623명. 그러나 다양한 통계의 분석에 의하면 17,950명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방치되는 이주아동으로 추계됨. 여기에 기존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국에서 태어난 이주아동을 더한다면 적어도 20,000-25,000명 이상으로 추계할 수 있음.
<표 1>미등록 이주아동 수 추계(관련 통계)
|
구 분 |
아동, 청소년 수 |
|
24세 이하 체류외국인 아동, 청소년 |
199,336 |
|
24세 이하 장기체류 아동, 청소년 |
153,900 (77.2%) |
|
24세 이하 단기체류 아동, 청소년 |
45,436 (22.8%) |
|
24세 이하 불법체류 아동, 청소년 |
22,092 (11.08%) |
|
18세 이하 체류 아동 |
50,787 |
|
18세 이하의 장기체류 아동 |
39,208(추정치) (153.900의 77.2%) |
|
18세 이하 불법체류 아동 |
5,623(법무부 추정치) (50,747의11.08%) |
|
6세 18세 초, 중등교 학령기 아동 |
34,402 |
|
6세 18세 장기체류 아동 |
26,558(추정치) (34,042의 77.2%) |
|
한국내 외국인학교(초,중등교)재학생 |
7,397 (2008, 9, 1) |
|
한국학교에 재학 중인 외국인 아동 |
1,209 (2007, 4) |
|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장기체류아동 |
17,950 (추정치) |
▣ 2009, 3. 교육부, 법무부에서 김동성 국회의원실에 제출한 자료
• 미등록 이주아동 인원 수 증감에 대한 전문가 견해
미등록 이주아동의 수를 추계하기 위해 관련 전문가 조사의 결과는 대부분 향후 이주아동의 수는 점차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응답함.
Ⅳ. 이주아동을 위한 국내 대책의 현황
• 현 한국의 이주아동을 위한 대책은 매우 소극적인 교육지원정책을 제외하면 전무하다고 볼 수 있음. 2001년 3월 교육인적자원부는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 자녀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행정지침을 마련했으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2003년 1월“UN아동권리위원회”로부터 “모든 외국인어린이에게도 한국 어린이들과 동등한 교육권을 보장하라” 는 권고를 받은바 있음. 그 후 2003년 1월19일 개정된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19조 1항은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의 학교 입학을 가능하게 하였고 또 2005년 5월 교육인적자원부는 참여정부 교육복지 종합계획에 의거, 외국인 근로자 자녀교육 지원계획을 수립하어 외국인근로자 자녀 입학상담센터 운영, 담당장학사지정,한국어반설치운영,학습자료개발 및 보급, 국제이해교육을 실시할 계획을 추진한바 있으며 2006년 상반기에 외국인근로자 자녀들에 대한 실태파악을 하고 ‘초․중․고'에 다니는 외국인근로자자녀들을 위한 한국어(KSL)반을 설치 운영하고 이를 담당 할 한국어교사를 양성하는 등 종합 대책을 확정 발표하기로 함. 그런데 교육부는 2006년 돌연 전자정부 구현을 목표로 미등록자를 부모로 둔 이주아동들에게는 어려운 각종 신분증명서-출입국증명서, 외국인등록 증, 거주자 증명 -를 요구함으로서 이들의 입학절차를 오히려 까다롭게 하여 입학여부가 학교장 재량에 맡겨져 있어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입학여부가 결정되게 되됨. 그러다가 2008년 2월에 이르러서야 초. 중등교육법 시행령 19조의 ①항의 개정으로 ‘외국인이 보호하는 자녀 또는 아동이 국내의 초등학교에 전입하는 경우「출입국에 관한 사실 증명서, 외국인등록 사실증명서」대신 「전월세 계약서나 이웃의 거주확인 보증서」등의 제출로 거주사실만 확인되면 학교입학이 가능하게 함.
• 2006년 이후 외국인정책 기본방향 및 추진체계, 중장기 외국인 정책 기본방향 등이 발표되면서 미등록 이주아동에 관한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2007년 10월 외국인정책위원회의 정책목표 및 추진과제에서는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지 않고,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에는 보다 강경한 단속조치가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
• 한편,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대책은 일관된 정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부분적인 교육지원, 보육지원, 의료지원, 일상생활지원, 경제적 지원, 문화활동 지원, 상담 서비스, 인식개선 활동 등이 파편적으로 시행되고 있음. 그러나 서비스가 행사 중심이고 아동중심이라기보다 성인중심의 서비스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문제가 됨.
• 민간단체는 지방자치단체와 유사한 수준에서 이주민과 가족 및 아동을 위한 지원을 실시하고 있음. 이주민과 가족 및 아동을 위한 지원은 교육지원, 일상생활지원, 문화활동 지원에 치중되어 있는 경향을 보였고, 보육지원과 경제적 지원 등은 매우 미약한 실정임. 지방자치단체에서 두드러진 활동은 일상생활지원사업인 반면 민간단체에서는 문화활동 지원을 상대적으로 많이 하고 있으며, 지엽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서비스는 대부분 중복되거나 분절되어 비효율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경향이 있음.
Ⅴ.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 문제
•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문제는 발달단계별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남.
• 이주아동의 권리문제를 아동권리협약 조항과 대응한 결과, 아동의 발달단계별 제기되는 문제는 유엔아동권리협약 조항에 위배되는 사항으로, 협약의 일반적 원칙인 ‘무차별 평등의 원칙(제 2조)’과 ‘아동 최선의 이익원칙(제 3조)’에 공통적으로 위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표 2>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문제와 유엔아동권리협약
|
욕구 |
아동권리협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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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내기~ 영유아기 |
․ 출생 영아수 미파악 ․ 보육서비스 부재 ․ 모성보호 문제 ․ 의료․건강문제 ․ 열악한 주거문제 |
출신이나 성별 포함한 무차별의 원칙(2조) 아동의 최선의 이익원칙(3조) 아동의 생명권(제 5조) 성명(이름)․국적권(7조) 신분보장권(8조) 부모양육지원(18조) 건강․의료지원(24조) 사회보장권(26조) 소수민족아동의 보호(30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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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령기 |
․ 교육권 관련 법적근거 ․ 부모와 살 권리 미보장 ․ 일관성 없는 정부대책 ․ 개인정보 노출 ․ 경제적 어려움 ․ 질병 및 건강관리 문제 ․ 다문화 이해부족 문제 |
부모로부터의 비분리(제 9조) 가족재결합 출입국(10조) 의사표현권(12조) 개인의 발달(5조, 6조, 13조, 14조, 15조) 사생활의 보호(16조) 건강․의료지원(24조) 사회보장권(26조) 생활보장권(27조) 피교육권(28조) 교육의 목표(29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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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 |
․ 상급학교 진학문제 ․ 노동환경 문제 ․ 일탈문제 ․ 불확실한 미래 ․ 신분증 차용문제 |
개인의 발달(5조, 6조, 13조, 14조, 15조) 국외불법이송금지(11조) 의사표현권(12조) 정보접근권(17조) 피교육권(28조) 교육의 목표(29조) 휴식․여가보장권(31조) 기타 착취로부터 보호(36조) |
• 태내기부터 영유아기의 권리문제와 욕구: 숨어있는 아동들과 어린시기부터 발생하는 건강 및 인지 발달상의 문제
첫째, 보육서비스의 부재로 인한 영유아발달지연의 문제 혹은 기초학습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에 진학하게 되는 문제 등이 제기됨.
둘째,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에서 출생하는 미등록 이주아동 수의 증가를 체감하고 있었으나 정확한 통계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현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음.
셋째,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의 문제가 제기됨.
넷째, 산전관리, 예방접종 등의 의료서비스 지원이 부족하여 발생하는 초기 영유아기 의료ㆍ건강상의 문제가 제시됨.
다섯째, 어린 아동이 살기에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주거의 문제 등이 보고됨.
• 학령기의 권리문제와 욕구: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교육권과 다문화이해부족으로 인한 차별과 소외
첫째, 학교입학부터 학교생활 적응, 진로 등에 이르기까지 미등록 이주아동의 학교생활 지원이 부족하여 문제가 발생함. 그리고 법적 근거가 부재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교육권과 관련한 문제 등이 제기됨.
둘째, 미등록 이주아동은 부모와 함께 살 권리가 보장되지 않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일부 아동의 경우 부모가 강제출국 후에도 한국에 남아 생활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함.
셋째, 일관성 없는 정부대책으로 인해 미등록 이주아동과 부모는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음.
넷째,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보장받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개인정보로 인해 결국 이주아동과 부모는 학교도 믿지 못하여 아동을 등교시키지 않는 등의 문제가 제기됨.
다섯째, 미등록 이주아동 대부분은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었음.
여섯째,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제공되는 형식적인 건강검진, 잦은 인스턴트 음식 등으로 인해 건강상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특히 입국 시부터 질병관리가 되지 않아 전염병 등 감염의 문제도 제기됨.
일곱째, 학교와 지역사회 내 다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미등록 이주아동의 대부분은 교사나 또래들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으로 나타남.
• 청소년기의 권리문제와 욕구: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
첫째, 미등록 이주청소년은 체류의 불안정으로 인해 상급학교 진학 등이 어려워 학교를 중도 탈락하는 경우가 많음.
둘째, 학교를 중도 탈락한 청소년들은 대부분 부모처럼 3D 업종에서 일을 하고 노동환경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지내는 것으로 나타남.
셋째, 미등록 이주청소년은 한국에서 대학 진학이나 취업 등 하고 싶은 활동이 있으나 현 상황에서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여 힘들어하고 있었음.
넷째, 체류의 불안정과 차별 등의 문제를 경험하게 되는 미등록 이주청소년은 일탈을 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남.
다섯째, 미등록 이주청소년은 학교 및 지역사회에서 기본적인 신분보장이 되지 않아 다양한 불편함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남.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친구의 신분증을 차용하면서 학교 및 지역사회 참여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남.
Ⅵ. 미등록 이주아동 권리의 대책 모색
1. 대책 모색의 배경
1) 한국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함으로써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나라임.
국제연합 아동권리협약에 따라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이주아동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 없는 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
• 이주아동은 부모의 국적, 인종, 언어, 종교, 신분, 재산 및 정치적 의견, 체류자격 등에 관계없이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받지 않아야 한다.
• 이주아동은 국내에서 거주하는 동안 교육적, 신체적, 사회적, 정서적, 도덕적으로 건강하고 안전하게 성장하는 데 필요한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다.
• 이주아동을 포함한 아동의 이익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공공기관·단체 등의 아동 관련 정책 및 활동 등을 수행함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2) 미등록 이주아동정책에 대한 관점의 변화 필요성
• 이주노동자의 역사가 20년 되면서 국내 출생아동이 증가할 것으로 추산됨
• 미등록 이주아동은 국가정책 방향에 따라 한국사회와 국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재로 양성될 수 있음.
• 이주노동자와 이주아동의 포용정책은 국가 브랜드를 높일 뿐 아니라, 경제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오히려 한국인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함.
• 한국의 인구 구조 상 국내 출생 이주아동의 포용은 매우 필요한 정책임. 2050년이 되면 필요 복지인구의 1천만 명이 부족한 상황임. 매년 20만 명씩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어야 적절한 복지인구의 비율을 유지할 수 있음.
3) 미등록 이주아동 권리보장의 쟁점
• 한국정부가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비준하고서도 이를 이행하지 않게 되면 국내외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음. 이제 어떤 인권사안도 국제적인 인권감시망을 피해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압박에 의해 국내의 인권 입지가 강화될 수밖에 없는 부메랑 효과를 직시해야 함. 국제사회는 인권 위반국에 대해 ‘대놓고 창피주기(naming and shaming)’식 접근을 취하기도 함.
• 한국정부는 이러한 국제인권보장의 추진 메카니즘을 인식하고 현명하게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문제에 대처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함. 따라서 이제 이주아동의 문제를 등록인가 미등록인가 하는 체류자격의 관점에서 접근할 사안이 아니라 “한국이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충실하게 적용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고, 이 문제를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임.
•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등록 이주아동의 대책은 체류자격의 문제의 관점에서 아동권리보장의 관점으로 변화되어 접근될 필요성이 있고, 국내출생 이주아동과 국내에서 일정 기간 이상 체류한 아동의 경우는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접근이 이루어져야 함.
• 체류자격을 떠나 외국의 경우와 같이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정부대책은 부서에 따라 다양할 필요가 있음. 체류권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의 문제는 옹호될 수 없지만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이행해야 하는 부서의 정책은 다를 수 있음. 보건복지가족부, 교육과학기술부 등의 부처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따라 이주아동의 체류자격에 상관없이 기본 인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 국제적인 추세임. 이주민과 그 가족에 대한 외국의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등의 정책은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적극적인 정책이 특징적임.
• 국내법의 근거가 필요한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
유엔아동권리협약은 협약 당사국에 있어서 국내법과 동일한 법적 구속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국내법에는 반영되지 못하고 있음.
한국정부는 최근에 ‘재한외국인 처우기본법’과 ‘다문화가족지원법’을 제정하는 등 이주민 증가에 대해 나름대로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으나 대부분 국제결혼가정과 이주노동자 등의 성인 중심의 대책으로 이루어져서 미등록 이주아동을 위한 대책은 교육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상황이고, 이로 인해 유엔아동권리위원회와 유엔인권이사회 등의 개선권고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현실임.
• 미흡한 한국의 미등록 이주아동 복지정책
이주민과 가족 및 아동을 위한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민간단체의 지원을 살펴본 결과 중앙정부는 법무부와 교육과학기술부를 중심으로 등록 이주민과 그 가족 및 자녀를 위한 대책들을 시행하고 있는데, 주로 국제결혼가족이 대상이고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정책은 매우 미흡함. 또한 프로그램들이 성인중심의 이벤트성의 성격을 지닌 것이 많았고, 통합적인 서비스 지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한계점이 있음.
• 이주아동 관련단체들의 운동과 국제적 연대의 활성화
이주아동 관련 NGO 단체의 결성과 활동이 활성화되고 국제이주아동단체들과의 연계활동을 통해 한국의 미등록 이주아동 권리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권고와 압박은 점차 거세질 것으로 예측됨.
• 한국 이주아동 전문가들이 보는 미등록 이주아동 권리의 중요성과 해결 가능성
본 연구에서 미등록 이주아동 관련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나타난 중요한 권리와 해결 가능한 권리의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이 나타남.
· 중요한 권리: ‘체류할 수 있는 권리’ → ‘부모와 살 권리’ → ‘교육받을 권리’ → ‘보호받을 권리’ → ‘차별받지 않을 권리’ → ‘사회복지의 권리’
· 해결 가능한 권리: ‘교육받을 권리’ → ‘보호받을 권리’ → ‘부모와 살 권리’ → ‘차별받지 않을 권리’ → ‘사회복지의 권리’ → ‘체류할 수 있는 권리’
2.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별 대책
1) 교육받을 권리의 대책
제28조: 당사국 정부는 모든 아동이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초등교육을 의무화해야 하는 한편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발전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 한국은 2003년에 초ㆍ중등교육법의 개정이 아니라 시행령 개정을 통하여 미등록 이주아동의 초등학교 입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음. 그러나 학교장 재량에 맡겨진 전ㆍ입학처리문제와 상급학교 진학의 어려움이 있고, 일부 학교에서는 졸업장이 아닌 수료증만을 주고 있으며, 졸업장에 표기된 인적사항의 불일치의 문제, 15세 이상의 자녀인 경우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 교육권 보장의 범위에서 제외되는 등의 문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함.
• 모든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실질적으로 보장이 되는 초ㆍ중등교육권이 법률로서(시행령으로는 미흡) 보장되어야 하고, 아동이 원할 경우에 고등교육기관에도 진학할 수 있는 근거 마련이 필요함. 이주아동은 교육기본법 8조에 따라 무상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져야 하고,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만으로 국내 학교에 전·입학할 수 있어야 함. 이주아동은 외국에서 이수한 학교교육의 과정에 상응하는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함.
• 미등록 이주아동의 학교 입학이 불허되거나 정규 학업과정을 이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료증만을 수여하는 경우에 이를 규제하는 법이 필요함.
• 관련 법 조항에 미등록 이주아동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체류권자격의 비밀보장 등 아동의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가 명시되어야 함. 초중등학교 교원 공무원은 출입국관리법 제84조 제1항에도 불구하고 전입학절차상 취득한 이주아동에 관한 신상 정보를 보호하여야 함.
2) 보호받을 권리의 대책
제37조: 모든 아동은 고문이나, 잔혹행위, 위법적인 체포나 구금, 사형이나 종신형 등의 형벌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당사국은 구금된 아동을 성인수감자와 격리시켜야 하며, 가족과 접촉할 권리, 신속하고 적절한 법적 판결을 받을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 간혹 이루어지고 있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단속되어 강제 출국되는 조치는 금지되어야 함.
•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자격과 관련된 비밀이 보장되어야 함.
• 미등록 이주아동의 불법노동을 예방하기 위한 소득지원과 불법고용에 대한 단속이 이루어져야 함.
• 지역사회 안전망의 연계를 통해 위기 시 긴급 미등록 이주아동 지원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음.
3) 부모와 살 권리의 대책
제9조: 모든 아동은 아동의 이익이 침해당하는 경우가 아닌 한 부모와 함께 살 권리를 지니며, 부모와 떨어져 살 경우 부모를 만날 권리를 가진다.
제10조: 당사국 정부는 아동 또는 부모가 서로간의 면접을 위해 출국이나 입국을 신청할 때 이를 신속히 받아들여 부모와 자녀 간에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 부모와 자녀간의 상호 면접권이 보장되어야 함.
• 부모 및 보호자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은 다시 보호자의 보호를 받을 때까지 한시적 아동 후견인의 조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음.
•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에 가입하게 되면 미등록 이주아동은 부모와 살 권리의 근거가 강화됨.
4) 차별받지 않을 권리의 대책
제2조: “자국의 관할 내에 있는 모든 어린이”가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을 받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
제30조: 소수민족의 아동은 그들 자신의 문화와 종교를 누리고, 고유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
• 다문화 민족사회에 대한 차별인식 변화 노력의 제고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현재 국제결혼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다문화교육의 대상에 미등록 이주아동을 포함시키고, 잘못된 차별을 불식시키기 위한 학교와 지역사회 중심의 다문화교육을 강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음.
• 미등록 이주아동이 학업을 원활히 수행하고 학생으로서의 다양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신분증(청소년증)의 발급과 장학금 수혜 기회 평등과 같은 학생권리의 차별 없는 보장이 필요함.
• 다양한 청소년 수련시설들을 활용한 활동프로그램을 통해 미등록 이주아동의 의식제고와 역량개발지원이 필요함.
5) 사회복지의 권리의 대책
• 사회복지의 권리에 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의 관련 주요 조항
제26조: 모든 아동은 사회보험을 포함,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 미등록 이주아동의 사회복지권리 보장을 위한 국내법의 근거 마련
‘의료급여법’,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아동복지법’, ‘다문화가족지원법’, ‘영유아보육법’에 미등록 이주아동을 지원할 근거조항이 명시되어야 함.
• 거점 미등록 이주아동복지센터를 통한 맞춤형 통합서비스
효율적이고 통합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이주민 밀집지역에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센터의 설치가 요망됨. 거점 센터는 ‘외국인주민센터’나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종합사회복지관’ 등의 기존 전달체계를 활용할 수 있음. 이 센터를 통하여 사례관리, 상담지원, 본국으로의 복귀지원, 결연 혹은 후원 연계, 방과 후 보호시설 및 프로그램을 이용한 학습 및 돌봄 지원 등의 다양한 서비스가 효과적으로 제공될 수 있음.
• 무연고 미등록 이주아동 보호 및 자립지원 추진
다양한 이유로 인해 무연고가 된 미등록 이주아동은 한국의 국적을 부여 받고 입양, 그룹홈, 가정위탁, 생활시설 등의 보호를 받고 자립할 수 있도록 조치가 필요함.
6) 체류할 수 있는 권리의 대책
제7조: 모든 아동은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를 지니며, 부모가 누군지 알고, 부모로부터 양육 받을 권리를 지닌다.
• 국내에서 출생한 이주아동, 국내에 입국하여 계속하여 3년 이상 체류한 이주아동에게는 체류자격을 부여하여야 한다.
• ‘재류특별허가(在留特別許可)’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음. 특히 한국에서 태어나고 적응하고 있으며, 돌아 갈 나라도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경우에 적극적으로 재류특별허가를 우선적으로 시행하는 동화정책이 필요함.
• 한국 실정에 맞는 그린카드제의 도입
한국의 노동시장은 중간 관리급의 인력이 부족해져가는 상황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간 관리급에 해당하는 미등록의 생산기능직 노동자들에게 한시적으로 그린카드를 발급하는 것은 인력부족의 문제와 미등록 이주아동의 권리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조치가 될 것임.
• 미등록 이주아동을 대상으로 한 자발적 귀환 지원 프로그램의 활성화
자발적 귀환지원프로그램은 이주성인을 대상으로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나 아동을 대상으로는 시행하지 않고 있음. 귀국 의사를 갖고 있는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자발적 귀환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미등록 이주아동이 본국에 귀환하여 적응하도록 돕고, 이를 통해 반복적인 미등록 입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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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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