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1, 2017

2017년의 마지막 밤

2017년의 마지막 밤이다.
왠지 이곳에 뭔가를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의식적으로 오늘 밤이 2017년의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밤도 여느 밤과 다를 바 없는 밤일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송구영신 예배로 분주한 밤이겠지만
나는 송구영신이라는 명목으로 성탄절 기간을 망치고 싶지 않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 의미에 대해 집중할 시간이 교회에 좀더 필요하다고 본다.
교회 전통에서 성탄절을 12일 동안 기념했듯이
지금도 2 주 정도는 오롯이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연말연시는 그냥 가정이나 밖에서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보내도 되지 않을까..
굳이 왜 교회에서 성탄절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뒷전으로 밀어내면서까지
송구영신 예배를 드려야 할까..

2017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별다른 큰 일없이 보냈던 것 같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있었어도 내 머리 속에 특별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올 한해는 그냥 잘 지냈던거다.

감사하다. 아이도 잘 크고 있고
아내도 건강하고 성도들에게도 큰 우환이 없었고..
한국의 가족들도 잘 있고..
일단 내 바운더리 안에서는 큰 일이 없어서 감사하다.
하지만 세상을 보면 여전히 어려운 일들이 가득하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로 가득찼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길 기도한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들 자기들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좋겠다.

2018년은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모른다.
이제 더이상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산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대로 움직이며 산다.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졌다.
몸에 힘이 빠졌다.
그냥 성령에 기대어 산다.

얼마 전에 작은 집을 하나 마련했다.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에서 제일 가난한 성도의 집보다 싼 집을 살 수 있었다.
내가 교인들보다 더 좋은 집에 살면 미안했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의 짐을 덜어주신 주님께 감사하다.
예수님보다 더 잘 살고 있다.
주님께 죄송한 마음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내 믿음이 이 정도 밖에 안된다..

Saturday, December 16, 2017

마리아의 찬가

충분한 어려움을 예상하고도
하나님의 아들을 품겠다는 어려운 선택을 했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헤롯왕에 쫓겨 이집트로 피난을 가고
돌아와서도 계속 나사렛이라는 깡촌에 살게 되고
남편마저 잃은 과부가 되어
일곱명이 넘는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살다가
아무 죄도 없는 큰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

아들의 부활 소식을 접한 후
그 아들을 기억하고 아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곁에 남아 아들의 영이 임할 때까지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한다(행 1:14).
어린 나이에 두려움 속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엘리사벳에게서 들었던 위로의 메시지를 승화시킨 자신의 찬송가를
똑같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그 찬송가는 누가의 손에 의해 성경에 남게 된다(눅 1:46-55).

자신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자신이 품었던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두려워하는 자가 긍휼을 얻고,
교만한 자가 흩어지고,
권세있는 자가 심판을 당하고,
비천한 자가 높아지고,
주리는 자가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고,
부자가 빈 손으로 보내졌으니..

맞습니다.
당신의 찬송대로
당신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Wednesday, December 13, 2017

반성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박해를 받을 것인가..
박해는 선한 자가 악한 권력에 저항할 때 받는 것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악한 권력은 선한 자를 박해하지 않는다.
선하기만 해서는 박해를 받지 않는다.
박해를 받으려면 저항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려면 악한 세력에 저항해야 한다.
저항의 최전선에 있을 수록 십자가를 지기 쉽다.
악은 개인 속에도 자리를 잡지만
집단 속에도 자리를 잡는다.
성경은 개인의 악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 속에 자리잡은 악을 고발하기도 한다.
그러한 악에 저항하면 즉시 박해를 받을 수 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죄다.
그것을 알기에 대개는 악을 스스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방관한다.
박해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악한 권력을 방해하지 말라는 악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진다.
예수 사건을 통해 악의 작동원리가 만천하에 공개된 후에도 인간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다.
그 유혹 중의 하나가 편안함이다.
편안함에 빠지면 박해를 피하려 한다.
박해받는 삶보다 편안한 삶을 택하려 한다.
나도 지금 편안한 삶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맡은 일에서 오는 어려움은 박해가 아니다.
그냥 모든 직업인이 갖는 어려움과 다르지 않다.
그 어려움을 박해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나는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십자가를 바라만 보고 있지 지려고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박해받는 자들과 연대하고 있지 않다.
천국에서 누려야 할 편안함을 이 땅에서 누리려 하고 있다.
이 땅에서는 영혼의 평안만을 누리면 되는데,
육신의 편안함까지 누리려 하고 있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웃들이 가득찬 이 세상에서 말이다..
주님 이 연약한 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이 배은망덕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 이 입에 발린 기도..
말 뿐인 기도..
왜 이리 약해진건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Friday, November 10, 2017

문자보다는 사람

성경의 자구에 너무 매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성경은 쉬운 그리스어로 써졌다.
물론 바울의 몇몇 글들은 어려운 내용들이 있지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그리스인들이 보기에 대부분의 신약성경은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어렵지 않게 써졌고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초등학생이 읽는 수준의 책을 가지고 너무 분석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1세기 크리스천들이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돌려 읽던 글이나 편지를 읽으면서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랄 것 같다. 그들은 그 글들에 매달리기보다 그 글이 전하는 내용을 가슴에 품고 삶속에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일에 더 애썼을 것이다.

글자에 매달리면 죽는 것이고 글자에서 자유로워져서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영을 보게 되면 사는 것이다. 성경은 소중하지만 성경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자 하나하나에 너무 매달리기보다는 성경이 기록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문화나 정치 사회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는가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그 시대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할 것이다. 예전에 한국에서 살때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던 영어책들이 미국에 살면서 좀더 선명하게 이해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사람들이 처한 환경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자 그들이 쓴 글들이 쉽게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2천 년 전에 써진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어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것 보다는 그 글이 기록된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2천 년 전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현대인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그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서 그 귀한 양피지에 굳이 기록을 남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들을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지식을 2천 년 전 그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그들도 알고 있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해석을 할 때도 있다.

우리는 그들보다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 너무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하여 성경 공부를 하고 싶다면 글자에 천착하기 보다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게 나을 것이다.

Monday, November 6, 2017

가난한 교회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다.
그 가난한 삶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셨다.
그 삶을 따르라 하셨다.
제자들에게 돈버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냥 가난하게 사셨다.
부자한테 자기 공동체에 헌금 많이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당시 기득권 세력의 호의를 얻으려 하지도 않으셨다.
그냥 가난하게 사셨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면
교회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교인들이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가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웃을 돕는데 재정을 다 써서 교제 시간에 먹을 것이 변변치 않으면 어떤가..
주일학교에 좋은 학용품이 없으면 어떤가..
교회 버스가 없으면 어떤가..
유명 강사 초청하지 못하면 어떤가..
값비싼 장비가 없으면 어떤가..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자발적 가난을 참지 못한다.
교회도 자기들 생활 수준으로 또는 부자 교회 수준으로 키우려 한다.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 밖에 많다.
못먹고 못입는 사람들, 슬럼가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선교사들..
교회 재정?
그냥 계속 나눠주고 가난하게 살면 안되는걸까..
뭐가 아까운걸까..
예수님의 정신은 어디로 가버린걸까..

Friday, October 20, 2017

지금 느끼는 답답함

종교개혁 500주년이라한다.
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을 파문했다.
파문된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종교개혁자들은 이단이고 개신교는 이단 종파였다.
유대교도 처음에 크리스천들을 파문했었다.
유대교에서 파문당한 사람들이 만든 것이 교회였다.
유대교의 교권에 충실한 사람들이 교회를 파문했고
가톨릭 교회의 교권에 충실한 사람들이 개신교회를 파문했다.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이 흐름을 보면
어떤 특정 종교나 교파의 가르침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진리들은 잠정적인 진리일 뿐이다.
그 잠정적 진리들을 절대화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할 필요가 있을까..

종교의 가르침은 과학처럼 실증적이지 않다.
반증 자체가 불가능한 가르침이 대부분이다.
과학에서는 하나의 수식에 하나의 답만이 존재한다면
종교에서는 하나의 문장에 수십가지의 해석이 존재한다.
이 해석들 중에 틀린 해석은 없다.
동시대인들에게 더 공감을 얻는 해석이 더 많은 지지를 받을 뿐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지지를 얻었던 해석이 지금은 소수의 지지 밖에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과학적 세계관에 길들여져 있는 현대인들에게 종교의 가르침이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토대가 객관적이지 않고 반증을 할 수도 없는 가르침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과학이 발전해가는 지금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이 시들할 수 있다고 해도 종교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여긴다.
종교에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로봇이나 프로그램에서 느낄 수 없는 빈 공간이 종교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숨을 쉴 수 있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아무리 삶이 갖은 정신적, 물리적, 사회적 억압으로 쪼그라들어도 종교적 가르침 안에는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신앙인들조차 그 빈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공간을 보존하려하기 보다 각종 교리나 전통이나 아니면 최신 트렌드로 채우려한다.
어리석은 일이다.

나에겐 그 빈 공간이 하나님이다.
그 안에서만 나는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고 그 안에서만 새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빈 공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지만
내가 복이 없어서인지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없다.
사람들이 대부분 욕심이 많다. 그 욕심들을 교회에서도 놓지 못한다.
가이사의 것도 가지려 하고 하나님의 것도 가지려 한다.
비어있는 곳이 보이면 채우려고만 한다.
숨이 막힌다.
예수님이 삼년을 버티신 것이 대단하다.

Thursday, October 19, 2017

부족한 목사

이제 곧 이 교회에 온지도 만 3년이 된다.
만 3년이 되면 이 교회를 떠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물론 이곳에 올 좋은 목회자가 있다는 가정하에 그렇다.
성도들의 취향에 맞게 나보다 더 교회 중심적인 목사가 왔으면 좋겠다.
나처럼 교회보다 삶을 더 중요시 하는 목사는 제도권 교회에 맞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교회를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내가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점과 성도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다르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몇몇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모임이나 행사들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나는 교회 안에서의 모임들은 최소한으로 하고 삶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할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밖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자선단체에 가입해서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며 그렇게 살길 바란다. 성도들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늘려가기를 바란다. 필요하다면 술자리도 가져주면서 그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공적인 예배는 일주일에 한번 차분하게 교회에서 정성을 다해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나머지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싶거나 성경 공부를 하고 싶거나 그러면 나에게 요청해서 시간을 정해 만나면 된다.
나는 성도들 곁에 늘 가까이 있다. 언제든 부르면 가서 이야기 할 수 있고 예배 드릴 수 있고 말씀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참여하는 사람도 얼마없는 공식적인 교회 모임을 만들어 놓고 그 때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이 성도들과 함께 있듯 목사도 성도들과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목사는 교회당에만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튼 성도들이 원하듯 교회 행사도 많이 하고 모임도 많이 만들어서 교회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좋은 목사님이 오셨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쪽에는 달란트가 별로 없으니 다시 세상 속에서 내 도움이 필요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게 좋을 듯 싶다.

Wednesday, September 20, 2017

청소년 사역자

청소년 사역자가 필요하다.
교회에 중고등학생이 많지는 않다. 현재 두 명, 내년이면 네 명이 될 것 같다.
두 명은 한어권, 두 명은 영어권이다.
영어권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이 좋지 않아서 아이들과 대화나 성경공부를 하려면 영어가 필수다. 나도 몇 번 아이들과 성경공부를 하려고 시도해 봤는데, 내 영어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그 아이들이 하는 말도 잘 못 알아 듣겠고.. 애들 영어는 왜 더 어렵게 들리는지..
물론 아이들도 나랑 성경공부하기를 부담스러워 한다.
아마도 아이들 입장에서는 나와 이야기하는 게 교장 선생님과 대화하는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사역자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분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영어도 잘해야 되니..
초중고 다 합치면 열 명 정도인데 이 정도 아이들을 보고 이 시골에 오실 분이 있을까..
사례비라도 많이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상황도 안되고..
아무튼 기도한다.
나도 어른들 열 명의 부름에 응답해서 왔는데, 누군가 아이들 열 명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약자의 음성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역자가 어딘가엔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안타깝다.
하나님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으실테니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분을 보내주시길 기도한다.

Tuesday, September 12, 2017

설교도 고된 일이다

신학 공부를 하기 전에도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는 설교를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그냥 말씀 읽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주면 되는 걸로 여겼다.
설교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부터이다.
성경책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수천년의 시간과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과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정경화된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가며 이 책을 연구하여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설교는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깨달은 내용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의 깨달음이 있었다.
성령님은 나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임한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다른 이들은 어떤 해석을 했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주석을 읽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이도 있었고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해석을 내놓은 이도 있었다.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다양한 음식들을 먹었다.
그리고 내 속에서 소화되는 만큼 종이 위에 써나갔다.
일주일에도 여러번 설교문이 바뀐다.
쓰고 읽고 녹음하고 녹음한 걸 들어보고 다시 고치고..
그래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설교문이 많다.
설교도 고된 일이다.
매 주 마감이 있기에 늘 시간에 쫓긴다.
수많은 생각들과 질문들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성도들의 일상과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냥 성경을 붙든다.
성도들은 지루하게 들릴지라도 설교 시간이기에 성경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설교는 연설이 아니고 예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간이 아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인이고 나는 그저 말씀의 종일 뿐이다.

Saturday, August 5, 2017

오병이어

마태복음 14:13-21

예수님이 떡을 클라사스 했고, 클라스마톤이 남았다.
예수님이 떡을 떼었고(나눴고), 조각들이 남았다.
예수님이 떡을 broke 했고, broken piece들이 남았다.

남은 것은 조각들이었다.
떡 덩어리가 남지 않고 물고기들이 남지 않았다.
떡을 나누고 물고기를 나눈 조각들이 남았다.

예수님은 떡을 5천개로 만들거나 물고기를 5천마리로 배가시킨 것이 아니었다.
개수는 변하지 않았다. 그대로 떡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였다.
제자들에게 받은 그대로 제자들에게 주었다.
차이가 있었다면 감사기도를 드리고 그 떡을 나눴다는 것뿐.
숫자에 개의치 않고 나눔을 시작했다는 것.
그것이 기적의 시작이다.

어떻게 5천명이 나눠 먹을 수 있는가? 모른다.
그러나 나눔이 시작되었고 나눔이 끝났을 때 열 두 바구니의 조각들이 남았다.
기적은 나눔으로 시작되고, 배고픈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손에 주어진 조각을 더 많은 조각으로 나눈 사실로 끝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너희는 나누어라. 기적은 내가 일으킬 것이니..

그러나 사람들은 나눔에 관심이 없다.
예수의 능력에만 관심이 있다. 그 배가의 능력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은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신다 (요6:15)."

Wednesday, July 26, 2017

은퇴 이후

요즘은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좀 하는 편이다.
몇 년 전에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1년 반정도 하면서 노인들의 삶을 당겨서 살아볼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 역시도 간접적인 경험이었지만 책을 통해서가 아닌 내 몸을 통해서 그 분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가보았기 때문에 상당히 현실감 있었던 체험이었다.

뉴질랜드는 노후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집을 가지고 은퇴하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노후복지가 설계되어있다. 만약 은퇴시점에 자기 집이 없다면 국가에서 제공하는 노령연금만으로 사는 것이 상당히 힘들어지게 된다.

내 경우 아직 은퇴까지는 이 나라 기준으로 20년 정도의 기간이 남아있지만 아직 집을 사지 못하고 있다. 모기지 상환 기간을 생각하면 늦어도 지금쯤이면 집을 사야 하는데 아직 집값의 20퍼센트에 달하는 미니멈 디파짓이 없기에 집을 사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우리가 살만한 저렴한 가격의 집 값이 25 - 30만불정도임을 감안하면 약 5, 6만불의 디파짓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 가정의 수입으로는 저 금액을 저축하는데 아마도 수 년은 더 걸리지 않을까 한다.

나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이 은퇴 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의지할 자녀들이 있는 경우는 그나마도 괜찮은 경우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대부분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교회는 그 분들을 신경쓰지 않은지 오래이다. 내가 현재 사역하고 있는 교회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의 사정도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교인들 수가 줄어가고 있는 상황이고, 한인 교회들은 지금도 현직 목회자에게 적정 사례비를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데 은퇴 목회자까지 돌볼 여력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하여 노후는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목회를 하면서 할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데... 단순한 생계 해결이 아니라 직업으로서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뭔가를 새로이 배워야 하는데 이곳이 시골이어서 뭘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다. 대책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Tuesday, June 20, 2017

안일함

사람들은 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면서 이상으로 점프만 하려는 것일까..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이상을 향하여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쉽게 순간 이동으로 이상향에 도착해 있길 원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를 늘 읽고 보고 듣는 이들이 어쩌면 그리도 안일할까..

Sunday, June 11, 2017

의도

화살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다.
제 아무리 조준을 잘하고 계산을 잘해도 제멋대로 흔들리는 과녁을 맞출 수는 없다.
과녁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 그것이 문제이다.

의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당기되 쏘지는 말라.
자세를 보여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Wednesday, May 10, 2017

스데반의 죽음

스데반의 죽음.
세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스데반이다.
스데반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닥치면 당당하게 죽어야 한다.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고 그렇게 죽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아버지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에게 돌을 던지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며 그렇게 죽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
아마 많은 크리스천들은 스데반보다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이 될 확률이 더 크다.
지금은 물리적으로 돌을 던지지는 않겠지만
마음으로 말로 태도로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의 폭력에는 맞서 싸워 스데반 같은 사람들을 구해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막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양의 우리를 벗어났던 사람들이 도착한 곳은 순교의 현장이었다.
예수님은 어디로 그들을 인도했는가..
내가 믿어야 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계실 뿐 순교의 현장에 직접 개입해서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막지는 않으시는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십자가를 예상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 옆 자리에 서계신 예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실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나는 너희를 모른다" 일 것이다.
고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면
나를 향해 날아드는 돌들을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 우편에 일어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길만이 진정으로 사는 길이다.

Friday, May 5, 2017

목자의 음성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목자와 양의 비유가 나온다.
우리 안에 양들이 모여 있다.
그 우리 안에는 한 목자의 양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동네의 다른 목자의 양들도 섞여 있다.
여러 양들이 섞여 있는 그곳에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들의 무리를 떠나 목자 앞으로 나아온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목소리에 반응하는 자기 양들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문맥상 양 우리를 유대교라 한다면 유대교인들 중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바로 앞장인 9장에서 나오는 시각장애인의 경우처럼 예수님을 믿고 유대교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양들은 무리로 생활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양들에게는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목자가 부르면 양들은 그 무리를 떠난다.
목자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병을 치료해 주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고, 포식자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해 주는 분이 목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10장의 예수님은 양을 우리로 넣기 위해 양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신다.
양의 우리에서 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양의 이름을 부르신다.
예수님은 양의 우리(유대교, 율법, 세상…) 바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양의 우리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 바깥에 풍성한 생명이 있다.
양의 우리가 안전할 것 같아도 그곳은 도둑이나 강도들이 언제든 담을 넘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고, 먹을 것이라고 해 봐야 주인이 던져 주는 마른 풀밖에 없는 곳이다.
풍성한 생명을 누리려면 목자를 따라 우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이 문 앞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를 떠날 것인가..
험한 골짝 빈들이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는가..
아니면 그냥 우리 안에 남아 있을 것인가..

Saturday, April 29, 2017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누가복음 24:13-35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미스테리이다.
물론 제자들이 처음에는 자기들이 처한 문제에 골몰하느라 자기들 옆에 와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할(27)" 때에도, 자신들이 강권하여 함께 유하자고 할(29) 때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셨을 때에서야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부활의 몸은 현재의 몸과는 질적으로 다른 몸이겠지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아본 경우도 있었던 걸 보면 엠마오로 가는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누가는 이 상황을 제자들의 눈이 가려졌다(16)가 밝아졌다(31)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조차도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못할 정도로 미스테리한 상황인 것이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저런 설명들이 있어왔지만 어떤 설명도 만족할 만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부분은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는 데 쓴 두 가지 방법이다.
하나는 성경 해석이었고,
하나는 떡을 떼어 주는 일이었다.

예수님이 제시한 성경 해석은 당시의 전통적인 메시아관을 옹호하는 해석이 아닌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26)의 해석이었다. 그 당시에는 비주류적 해석이었겠지만 예수님의 삶과 일치하는 성경 해석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주기는 했어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까지는 못했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단계가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두 번째 방법은 식사를 할 때 예수님이 떡을 들고 축사를 하고 떼어주는 모습이었다. 이 모습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만의 특징적 행동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일상적인 식사에서부터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을 때나 최후의 만찬에서까지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행동을 보고 자기들과 함께 있는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아보았다.

그 후 이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른 제자들을 만난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와해되었던 공동체가 재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초기 교회는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보여주셨던 방법인 성경 공부와 떡을 떼어 주는 행위를 소중하게 간직했고 교회는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떡을 떼어주는 행위는 단순히 예배시에 성찬식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 듯 싶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다가 몸소 떡이 되어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다. 그 나눔과 희생이 떡을 떼어 주는 행위 속에 상징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공생애 시절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셨을 때 그 식탁에 함께한 사람들은 또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제자들도 있었지만 세리와 창녀, 죄인들도 함께 하지 않았었던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런 이웃들을 품어서 함께 떡을 떼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가르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없다면 상처받고 상한 영혼들이 주님을 만날 곳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교회라는 공동체는 재림 때까지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의 몸의 부재를 대신하는 곳이다. 성령님을 통해 내 안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은 영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따뜻한 눈 빛이나 애정어린 손길 등을 느낄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서 기능할 때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나 세상에서 상처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그곳에 모인 성도들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Friday, April 14, 2017

몸의 부활을 믿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7-39)."

의사였던 누가도 신체성이 없는 영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다.
누가 뿐만이 아니라 누가에 앞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도 알았을 것이다. 자기들의 경험이 꿈을 꾸는 것과도 다르고 환상과도 다르다는 것을..
그것이 꿈이거나 환상이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바울처럼 그렇게 환상(?)으로 보았다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꿈이나 환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 만남은 영적인 체험과는 다른 어떤 신체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확실히 뭔가 다른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은 그들이 그 때까지 해왔던 경험의 틀을 벗어난 것이었기에, 이제까지 없었던 그 놀라운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오직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부활'이라는 말을 가져다 쓴 것이었다.

몸의 부활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몸의 부활을 굳이 주장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은 살아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몸의 부활이 없었어도 제자들은 영원히 예수님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몸의 부활을 주장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는가. 실제로 그들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가장 심플한 설명이다. 만약 그것이 거짓 주장이었다면 그들의 주장은 초기 예수 공동체 내에서 이미 생명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또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경험을 존중하고 싶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부활했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자칭 메시아들의 제자들도 그들의 스승이 부활했다는 증언을 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님의 제자들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그것도 본래 부활의 정의에 따라 몸이 수반된 부활을 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난 것이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있겠는가? 이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부활 경험을 토대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확실히 그리스도가 된 것이다. 부활 경험이 없었다면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저 예수 선생이었을 뿐 그리스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몸의 부활이 있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무슨 해가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몸의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의 몸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게 해준다. 영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몸도 중요하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몸과 영혼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면 당연히 우리의 몸도 살리셔야 할 것이다. 몸을 만든 분도 하나님이고 그 몸에 숨을 불어넣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마지막 때 있을 부활이 예수님에게서 선취적으로 일어났다는 이해가 무슨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현대의 문제만이 아니다. 2천년 전에도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많았다. 어차피 부활은 현재 시점에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건이기에 믿음의 영역에 속해있을 수 밖에 없다. 몸의 부활이 있었다고 믿거나 아니면 없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초기 교회가 몸의 부활이 아닌 영적인 부활이나 심리적 부활을 전해주었더라면 그런 부활을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전해준 부활 이야기가 몸의 부활이기에 내가 믿는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Wednesday, April 5, 2017

홍수를 앞두고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늘과 내일 내릴 비로 인해 이곳의 강이 범람할 확률이 거의 100%다. 이런 경우 기상 과학의 발달로 인해 이제 우리는 좀 더 정확한 지점으로 기도를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에는 비가 와서 홍수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면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지금도 물론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기도는 더이상 공감을 얻기 어려워진 시대다. 지금은 그렇게 기도하면서 집을 지키고 있기 보다는 미리미리 짐을 싸서 대피하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이다.

홍수를 앞둔 시점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무엇일까?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고 강이 범람해서 집이 물에 잠겨도 그 일로 인해 그 집 사람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피해자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울 자세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좀 더 멀리는 홍수가 일어나는 구역에 있는 집들을 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길 수 있도록 시의 정책을 개선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관련 법이 정비되도록 시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도는 항상 해야 하지만 기도의 내용은 현 시대에 얻게 된 과학적 정보들을 잘 적용하는 기도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열심히 기상과학을 발전시키고 미리 홍수경고를 내려준 기상 과학분야의 하나님의 종들의 예언을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이 비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리셨던 적이 있었다. 노아의 홍수 때다.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아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비는 이제 자연의 움직임을 따라 내린다. 구름에 물이 차면 비는 내린다. 그 양이 많으면 홍수가 날 것이고, 홍수가 나면 홍수 위험 지역에 있는 집에는 물이 들이칠 것이다.

내려야 하는 비를 내리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홍수 피해를 입은 이웃들을 성심성의껏 도울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한 기도요, 홍수 피해를 입은 지역에 가서 청소를 하거나 피해 지역 주민들을 돕는 일에 힘을 쓰는 것이 그 합당한 기도에 일치된 행동이지 않겠는가.

Friday, March 24, 2017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5-37)

유대교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인자/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나타나기만 하면 그를 믿고자 하였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메시아는 신적 능력을 행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예수가 수많은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심지어 그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가 기적을 일으켜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기적을 보이지 않은 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피 흘리며 죽어갔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접었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했던 메시아는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였다.
기적을 행하지 않는 예수는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지금도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에게서 기적을 원한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다.
무리들은 많지만 제자는 여전히 드물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점은 요즘은 그가 누구신지 묻는자도 별로 없고, 그를 믿고 싶어하는 자도 별로 없다는 점이다.

Tuesday, March 21, 2017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점

C 목사는 이 곳에서 알게 된 목사다. 남아공에서 이민 온 백인 목사인데, 근처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이다. 이민을 왔어도 영어가 모국어고 또 백인이라 나와 처한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이민을 왔다는 공감대가 있어서 친해졌다. 신학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어서 나와 신학적으로 할 얘기는 많지 않지만, 같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만나서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이다.

C 목사가 올 초에 모텔을 구입해서 운영을 하고 있다. 부부가 본래 교사였고 C 목사의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그간 모아둔 재산이 좀 있었나 보다. C 목사 부부에게는 약간의 지적 장애가 있는 딸이 있는데 나중에 자기들이 죽은 후에도 그 아이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고 싶었다고 한다. 교회에는 다른 목사를 청빙해도 된다는 의사를 표명했는데 교인들이 계속 있어달라고 했단다. 

서양 교회들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주일 예배 한번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목사들이 그렇게 바쁘지는 않다. 주중에 성경 공부 한번 정도 하고 나머지는 신앙 상담이나 병문안을 비정기적으로 한다. 큰 교회 같으면 각종 위원회 회의나 스태프 회의에 시간을 더 쓰게 되겠지만 규모가 큰 교회가 그리 많지 않으니 대부분 목사들은 한국 교회 목사들에 비해 한가하다.

나는 요즘 주일예배 설교, 어린이 설교, 청년부 성경공부, 금요 성경공부를 하고 있고 매주 한번씩 이곳에서 50 Km 떨어져 있는 동네로 가서 그 곳에 있는 두 가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키위 목회자가 받는 사례비의 3분의 1만 받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 이 불균형은 하나님이 나중에 하늘의 상급으로 갚아 주시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이 불균형은 아내가 채워주고 있다. 

물론 나와 아내는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아내의 커리어를 준비해왔지만 실제로 몇년간 이런 삶을 살아오면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음을 깨닫고 있다. 바로 내 안에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성도들이 교회에 애정을 갖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나 주변에 있는 키위 목사들이 나보다 낮은 학력과 나보다 낮은 헌신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더 많은 서포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질 때마다 아내에게 더 미안해진다. 물론 한국 교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나도 아내도 잘 알고 있기에 버텨내고 있지만 나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면 목회를 계속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카톨릭의 신부들과 달리 개신교 목회자에게는 가정이 있다. 교회가 목회자에게 나라에서 정한 최저 생계비도 주지 못할 정도라면 그 교회는 목회자를 불러올 생각을 하지 말고 다른 교회와 합하는 게 낫다. 그것이 상식적이다. 만약 그런 교회에 가고 싶어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 목회자는 반드시 자비량을 통해 그 부족한 부분을 메꿔야 하고 성도들은 그 부분을 미안하게 받아들여서 목회자에게 풀타임 사역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지만 성도들이 그 희생을 강요하고 당연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Sunday, March 19, 2017

그저 기다릴 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교회에 왜 가야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교회에 왜 가야할까..
마지막 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
이 전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교회에 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사랑, 섬김, 나눔, 봉사.. 다들 좋은 가치들이지만
교회가 아니어도 그런 가치를 실현할 곳들이 많이 있다.
성도간의 교제.. 역시 다른 사람들과도 충분히 교제할 수 있다.

그 분은 교회를 아주 안다녔던 사람은 아니기에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대충은 안다.
죄, 회개, 죄사함, 사랑, 섬김, 심판, 천국..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서 알긴 아는데
그게 자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경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몇명 있다.
그냥 교회의 가르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그저 그런 정도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아예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대화하기가 쉽다.
왜 싫어하는지를 알아서 그 부분에 대한 처방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심드렁한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별로다.
하는 수 없이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릴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Saturday, March 18, 2017

이사를 마치고

새로운 월세집으로 이사를 왔다.
1920년대 집인데 내부를 리모델링해서 생각보다 괜찮다.
우리 집과 벽을 맞대고 있는 옆 집에 사는 노부부는 우리보다 일주일 먼저 남섬에서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다.
십 여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좋은 사람들일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전에 살았던 동네보다는 여러모로 환경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초등학교 옆에 있는 집이라 조금 낫지 않을까 싶다.
좀전에는 한집 건너 옆 집에서 부부싸움이 나서 경찰차가 왔었다.
길거리에는 아이들끼리 놀러 다니는 모습도 보인다.
가난한 동네에서는 부모없이 자기들끼리 노는 아이들이 좀 있는 편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친구들끼리 놀러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
미국이나 이 나라에서는 가난한 동네 외에는 아이들끼리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이를 부모의 엄격한 보호 아래 키우는 것과 자유롭게 키우는 것 중 어떤 방식이 더 나은걸까..

서재가 이층이어서 책을 옮기느라 다리에 힘을 많이 썼더니 다리 근육이 아프다.
내 소원은 이 책을 다 처분하는 것이다.
그래도 많이 줄여서 이제는 책장 두개 분량 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것도 많게 느껴진다.
내 소임이 끝나는 날 나는 미련없이 이 책들을 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 나에게 그런 복을 주실지 모르겠다.

새로운 가정이 이 도시에 정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이 곳이 시골 같아서 좋다고 하는데 요즘 강화된 이민법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카톨릭 신자인데 교회에 나오긴 할 것 같다.
우리 교회에 카톨릭 신자 또는 카톨릭 출신이 네 명이나 된다.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그냥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면 된다.

이제 곧 또 한 가정이 이 도시를 떠난다.
나는 로컬에서 이사를 했지만 그 가정은 여기서 다섯시간이나 떨어진 도시로 간다.
로컬 이사에서는 잔 짐들을 대충 싸서 자기 차로 운반하면 되지만
다른 도시로 갈 경우는 모든 짐을 꼼꼼하게 다 싸야 한다.
우리 집 이사는 마쳤으니
이제 그 집 이사나 도와줘야 할까보다..

Thursday, March 16, 2017

우물가의 예수

요한복음 4장을 읽은 후
마음 속에 남겨진 단상을 적어본다.

우물물은 길어 올려야 하나(노력)
샘물은 그냥 떠서 마실 수 있다(은혜).

우물물은 외부에서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뚜껑을 덮어놓아야 하지만(닫힘)
샘물은 계속 흐르고 있기에 그럴 필요가 없다(열림).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죽을 수도 있지만(죽음)
샘물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생명).

사람은 스스로 물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물을 얻으려면 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그런데 내 속에 샘물이 있어서 물의 공급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면
물이 없는 곳에서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물이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으려면
내 안에 샘물이 있어야 한다.

우물은 물을 가둬 담고 있지만
샘물은 물을 흘려보낸다.
나를 넘어서 내 주변에 생명력을 공급할 수 있다.
척박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었고 생수처럼 사셨다.
인종, 성별, 계층,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이 어떠함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신자는 생수처럼 흐르는 물이 되어 살 것이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세상의 더러움을 씻고 새 힘을 불어 넣어주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Wednesday, March 1, 2017

이사

이 집에서 일년 반을 살았다.
집주인이 들어온다고 해서 이제 곧 집을 비워줘야 한다.
다음 집은 어디가 될지,
어느 동네 어떤 이웃과 함께 살게 될지 기대가 된다.

가구류가 생기다보니 짐이 많아졌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 외에 내 짐은 가방 하나 정도면 좋겠는데,
옷이랑 책 때문에 가방 하나로는 턱도 없다.
나중에 목회를 그만 두게 되면 옷도 책도 다 버리고 싶다.

원래 욕심이 많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어 갈 수록 더 욕심이 없어져 간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냥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가 이 땅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주님 품에 안기고 싶다.

이번 주일에 오랜만에 키위 교회와 연합예배를 드린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나누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길 바란다.
그들과 우리 교우들의 삶이 조금씩 더 겹쳐졌으면 좋겠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인사하는 사이, 그 이후가 필요하다.

Wednesday, February 8, 2017

화해하라

이번 주 본문 말씀(마 5:21-26)은 화해에 관한 내용이다.
교회에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분 다 교양있는 분들이라 서로를 못마땅해하는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서로 화해하려 하지는 않는다.
누가 특별한 잘못을 저질러서라기 보다는
그냥 둘의 성향이 맞질 않는다.
서로 인정해주면 괜찮을텐데 한쪽이 좀 자기 주장이 강하다.
자기는 다 옳고 상대방이 다 잘못했다고 여기는 부류다.
교회도 오래 다녔고 나이도 많은 분이지만
마음 속에 사람을 품을 여유가 없다.

"예수님은 이러저러하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교회를 다닌다는 것.. 뭘까..

Thursday, February 2, 2017

세상의 소금

소금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짜다는 것이다.
소금이 맛을 내는 용도로 사용되건, 방부제로 사용되건, 비료로 사용되건 아무 상관이 없지만 어떤 용도로 사용되건 소금은 짜야 한다.
그리고 소금이 짠지 짜지 않은지는 소금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소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판단한다.
소금이 제 아무리 자기가 소금이라 외쳐도
맛을 본 사람들이 짠 맛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소금이 아닌 것이다.

제자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그에게 예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제자들이 무슨 일을 하건 그 일과 상관없이
일단은 그들에게 예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가 있는지의 여부는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이 판단한다.
제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눈물을 흘리고 목청을 돋우어도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예수를 느낄 수 없다면
아마 예수님도 그를 모를 것이다.

Wednesday, January 25, 2017

팔복

2 주 간의 휴가를 끝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휴가 기간 동안 함께 있었던 친구가 없으니 어딘가 허전하다.
이제 다시 평범한 일상의 시작이다.
아이는 아직 방학 기간이라 아내가 일하는 시간 동안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아내가 돌아오면 내 일을 한다.
설교 준비와 성경 공부 준비가 내 일이다. 그 외에 가끔 성도들을 따로 만나기도 한다.
몇몇 성도들은 좀 더 큰 도시로 이주를 계획하고 있다.
다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떠난다.
그들과 달리 나는 이 작은 도시를 떠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처한 현재 상황에 이번 주 교회력 본문 말씀(마 5:1-12)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팔복을 보니 천국의 복은 현재형인데 나머지 복들은 전부 미래형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에게 천국은 미래에 주어질 복이 아닌 현재적 복이다. 그들은 이미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다.
욕심이 없이 하나님만 의지할 수록,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살아갈 수록, 천국은 선명한 현실이 될 것이다.
가난한 심령에 하나님을 채우고 의를 위해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에 미래의 복은 이미 주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들이 많다.
'착하면 당한다'는 말처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이 땅에서 어려움을 당하며 살아갈 확률이 크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약속된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지금 어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더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2)."
주님을 따르며 그 분 앞에 나아와 그 분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있는 너는 이미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blessed)이기 때문이다.

Tuesday, January 3, 2017

마태복음 3:17

세례 요한과 함께 한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먼저 헌신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을 찾아 가셨다.
물론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같은 방식으로 활동하진 않았지만 함께 연대하고 힘을 실어주는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아보였나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하나님은 예수님을 칭찬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마태복음 기자의 관점에서도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다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둘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동역자들 아니겠는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길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설령 세부적인 부분에서 나와 다름이 있더라도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배척하지 않고 응원하고 격려하며 함께 가는 모습을 예수님도 원하실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 그런 모습을 먼저 보여 주셨지 않는가.

Monday, January 2, 2017

슬픈 소식

나에게 전해진 2017년 새해 첫 소식은 이 지역의 저명한 의사이자 활동가였던 한 사람의 죽음이다. 2016년의 마지막 날 홀로 마운틴 바이킹을 하다가 추락사 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늘 슬프지만 특별히 이렇게 세상의 불의와 싸워왔던 사람의 죽음은, 그것도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의 이른 죽음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나는 활동가들을 응원한다. 나 역시 활동가로 살았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하는 일들이 세상을 좀더 나은 세상으로 바꿔가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현상에 안주하지 않고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과 소외에서 벗어나서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가상한가.

2017년 초부터 우리 지역의 유능한 활동가 한 분을 잃었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