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23, 2013

원목 실습

Comfort zone에서 나오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로 Clinical Pastoral Education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이제 그 수업이 이번 달로 끝나고 다음 달부터는 병원으로 원목 실습을 나가게 된다. 한국 사람들과 한국어, 한국 문화라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키위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어느 정도나 넘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병원목회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왠지 병원에서 부수적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에서였다. 대개의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심방을 올테고,  타종교인에게는 병원 규정상 복음을 전할 수도 없을 거고, 잠깐 며칠 머물다 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말 외에 얼마나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뭐 개중에는 원목의 방문을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지속적인 만남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원목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들 때문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목사란 어쨌든 교인들과의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부대끼며 성장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원목은 환우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굳이 목사가 원목의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좀 있는 편이다. 환자와 가족들을 위로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 주는 일은 딱히 목사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여기까지가 지금 내가 원목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생각인데, 실제 다음달부터 현장에서 환자들을 만나게 되면 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내 선입견이 더 굳어질지 아니면 깨어질지.. 내 목사관이 너무 회중(congregation) 중심적인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고..

Thursday, September 19, 2013

책과 거리두기

2년간 책을 거의 읽지 못했었다.
아이 보고 일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학책 뿐만 아니라 다른 책들도 거의 읽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 기간이 이제껏 살면서  책을 가장 적게 읽은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좋다.
그냥 사람들을 만나도 더 편하고, 머리 속이 복잡하지 않으니 사람들 얘기도 더 잘 듣게 되고, '이건 이러이러하고, 저건 저러저러해요' 식의 아는척 하는 말도 안하게 되고,
오히려 책이, 지식이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수님은 책을 얼마나 읽었을까? 제자들은?
왜 나는 책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리 문자에 얽매여 있는 삶을 살았을까?
살아있는 말을 듣고,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고, 살아있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도 되는데,
왜 그리 책이라는 죽은 말들의 관을 쓰다듬으며 살아왔을까..
말씀이 몸이 되어야 하는데, 왜 그런 노력은 안하고  죽은 글만 집적이며 살았을까...
물론 책의 유용성을 싸잡아 부인하는 건 아니다.
평생 책 안읽으며 살지도 않을거고..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책에 탐닉하지는 않으련다.
나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문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Monday, September 9, 2013

사도행전 12장 16절

기도를 했으면 그 기도가 실현되고 있는지 집이나 교회당 밖으로 나가서 확인을 해야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혹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고,
기도도 더 하고 그래야하지 않겠는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만 하고 있던 사람들.
문 밖에 나가볼 생각도 안하고 베드로가 왔네 안왔네하면서 옥신각신.
문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운가?
헤롯에게 잡혀 죽을 것 같은가?
기도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해야 하는 것이다.
통전적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 기도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전부로 하나님께 응답해야하는 것이다.

쟈니 에릭슨 타다

2007년 11월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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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에릭슨 타다. 현재 57세. 17세때 다이빙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여성 크리스천.
쟈니가 오늘 라디오 방송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걸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자신의 몸이 회복되길 기도하고 있다고..
그런데 진심으로 부탁하는데 그런 기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육체가 건강해지길 원하는 기도보다는
영혼이 건강해지길 기도해 달라고..
자신의 몸은 천국에서 새로워 질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그걸로 충분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다시 팔, 다리를 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몸의 건강이 아닌 영혼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자신은 자기의 외면이 아닌 내면이 온전해 지길 바란다고..

Monday, September 2, 2013

요한복음 3장 16절 - 아빠의 마음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어젯밤 문득 요한복음3장 16절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 구절에 대한 이제까지의 신학적 성과들을  참조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만 볼 때 두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하나는, 하나님은 도대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셨을까 하는 점이다. 누군가를 위해 내 아들을 내어주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물론 이 일은 성자 하나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겠지만, 그래도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셨으면 그렇게 하셨겠는가. 세상을 물건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생명으로 보았기에, 너무도 사랑하는 생명이기에 그 생명을 찾기 위함이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사랑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고통에 처해있는 생명을 살리기위해 사지로 들어가려는 아들과 그 아들을 보내야만 하는 아버지의 마음,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제는 절절히 느껴진다.

둘은, 하나님은 정말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구나 하는 점이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들이 세상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사형을 당했는데, 당대 권력의 잘못된 판단을 따르는 대신 그의 의로움을 믿고 신뢰하고 따르는 자에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간에 영생을 주시지 않겠는가. 칭의개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내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내가 의롭다 칭하심을 얻는다는.. 그러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믿고 따라와준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든, 아버지 입장에서는 고맙고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 사람들을 또한 끝까지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나무에 달려 사형당한 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준 사람들, 아들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고맙게 여겨지겠는가.  바울 사도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끝까지 책임지시지 않겠는가.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