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30, 2010

김규항 강연회

강연회에서 김규항을 만났다.

사진으로 본 적이 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질문을 하나 했고 답변을 들었다.

나는 외국인 근로자 특히 미등록 근로자 자녀의 교육 소외 문제에 대해 질문했고

그는 아직은 그 문제까지 다룰 여력은 없어보였다.

그의 생활반경 안에 아직 이주아동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주변에서 이주아동, 특히 학교를 다니고 있지 않는 이주아동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 아직 그런 아이들을 직접 만나 본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아이들이 실제로 있다면,

누군가는,

아직 세상에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낼 정도의 힘도 지니고 있지 못한,

그 아이들의 입이 되어주고, 팔다리가 되어 주어야 한다.

 

정주민 아이들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이주민 아이들, 그 중에서도

더욱 소외받고 있는 미등록 이주민 아이들의 교육 역시 중요하다.

내 아이와 그 아이 모두 똑같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안된다.

밖으로 나올 힘이 없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좌파 지식인이라면 자기 밥벌이 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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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에게는 그의 삶의 자리가 있고 그 곳에서 그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나 역시 나의 삶의 자리가 있고 그 곳에서의 내 역할이 있다.

 

관건은 연대 가능성인데,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예수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로 연대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믿는다.

 

Wednesday, April 28, 2010

신앙의 확실성

"신앙의 확실성은 이론적인 확실성이 아니어서 우리가 단번에 얻을 수가 있거나 그 후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하나의 실천적 확실성이어서 한 인간의 활동적인 삶 속에서, 행위와 고난 속에서, 전체적인 체험 속에서 항상 새롭게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거 때문에 신앙의 확실성은 또한 과거 지향적인, 즉 과거에 얻은 지식에 근거를 둔 확실성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확실성이요, ‘기다림’의 확실성이다.

하나님 신앙에 확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항상 신적인 현실성의 새로운 실증을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한 번쯤은 하나님 사상 및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어서 실존적인 부담력을 경험했고,

이제는 비록 전적으로 새롭고 놀라운 형태로 될지는 몰라도 이러한 확증을 항상 새로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둘수 없다는 데에 그의 확실성이 놓여 있는 것이다" (하인리히 오트,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 나라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으로 표상되는 예수의 희망은 그 자체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은 오직 그를 따르는 이들의 실천과 연대가 맺는 구체적인 생활의 열매 속에서만, 그 ‘연대’라는 이름의 체계와의 불화를 통해서만, 영글어간다" (김영민,이해는 희망이다, 비평의숲(16), 2010).

유토피아는 없는 곳이다.  Utopia: ou (
not)+ topos (place)
현실에 없는 곳, 아직 아무것도 아닌 곳.
하나님 나라 역시
이 세상/체계/system에는 없는 곳이며,
김영민이 말하듯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실천과 연대 속에서만,
그리고
글·사유, 말·대면, 생활양식, 희망이라는
네개의 존재양식이 엮어지는 구체적인 일상의 열매 속에서만
얼핏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곳이다.
성경은 세상/체계와의 불화를 요구하는
예수님의 수많은 말과 행동들을 기록해 놓았다.
체계친화적인 이들에게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실로 체계와의 불화 없이
하나님나라를 체험할 기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Sunday, April 25, 2010

전도

갑작스럽게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상황이 왔다.

짧은 시간이었다.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었다.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는 사람들.

수많은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가서

악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선지자들을 죽였다.

 

하나님은 결국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

하나님은 아들을 죽인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대신 아들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로 작정하셨다.

 

그 징표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아들 안에 있는자, 아들과 연합한 자.

그런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생명을 주는 방편으로 삼으신 것이다.

선으로 악을 갚으시고 사랑으로 덮으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가 당신들을 돕는 이유이다.

그리고 당신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Saturday, April 24, 2010

부와 권력의 힘

요즘 고위 인사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장관, 국회의원, 대사 등등..
얼마전에는 청와대 모 수석 보좌관과 통화도 했다.
기업체 사장이나 이사급들과도 만나고
고위급 검사도 만났다.
대형교회 목사와 직접 통화도 했다.
아시아 모 국가의 대통령 비서관과 그 나라 고위 경찰 간부와
근 일주일 째 통역으로 같이 다니고도 있다.
그나라 주한 대사도 만났다.

다들 내가 평생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같이 대화하고 식사하고 통역도 해주고 하면서
역시 나는 그들과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뭔가를 가지고 있거나 가졌던 사람들, 그 뭔가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고
계속 유지하거나 확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 뭔가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나는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
그저 경험이나 쌓는 셈 치자 하며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진다.
저 멀리 변방에서 일하고자 하는 데 점점 중앙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
역시 이 나라에서, 아니 인간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힘이라는 인력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인가.....
그들의 도움이 없이 사업은 불가능한 것인가...

Saturday, April 17, 2010

갈렙

갈렙,
사십년간
광야에서, 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몸소 체험했던 그가,
나이 여든 다섯에,
길르앗 산지를 차지하러 가면서 했던 말,
"혹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

하나님의 선택권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것,
내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이 옳음을 믿는 것.
진짜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듯
하나님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있고
우리가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지듯
하나님 역시 그분의 선택에 책임을 지신다.

갈렙의 믿음은 닫힌 믿음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안에 갇힌 믿음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열린 믿음,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대화 상대가 된다.
자유로운 두 인격체가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다.
설득과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마도 이런 과정을 기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설득하고 나도 하나님을 설득하고..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설득당하는 쪽은 항상
내 쪽이 되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고 내 영혼은 더욱 섬세하게
다듬어질 것이다.

팔십오세의 갈렙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물론 그 역시 그가 속한 시대적 상황과 세계관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의 믿음은 화석화된 믿음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었다.

Sunday, April 4, 2010

부활과 갈릴리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했던 세 여인이
무덤 안에 앉아있던 한 청년을 만난 이야기를 전해준다.

흰 옷을 입고 있던 그 청년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대로
갈릴로 먼저 가셨다는 사실을 여인들에게 전한다.
이 일을 겪은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떨며 무덤에서 나와 도망하고 무서움으로 인하여 아무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마가복음은 여기에서 끝난다 (그 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첨부된 내용으로 초기 마가복음 사본에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여인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도 정신을 차린 그들이 한 일이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러 갈릴리로 달려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기록에만 의존하다면 부활한 예수님이 처음으로 한 일은 갈릴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한 말을 지키려 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마가복음 14장 28절에는 예수님이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있겠다고 말씀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나를 만나려거든 갈릴리로 오너라."
이것이 부활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한 첫번째 메시지이다.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여제자들이 무덤을 찾고 있을 때,
12명의 남자 제자들이 두려움과 실망으로 뿔뿔히 흩어져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갈릴리로 오라고 하신다.
내가 먼저 가있을테니 너희들도 오라고 하신다.
무덤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있는 곳, 기쁨과 슬픔이 있는 곳, 땀과 애환이 있는 곳, 좌절과 아픔이 있는 곳
그 곳에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마가복음 기자는
갈릴리로 가신 예수님이 거기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침묵한다.
여인들이, 제자들이, 그 후에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이 벌써 갈릴리에 가 계시고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
두려움과 좌절과 실망에 빠져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를 삶의 현장 속으로 부르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자 갈릴리로 가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무덤도 예루살렘도 아닌 갈릴리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