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22, 2021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창조와 새창조에 이르는 거대한 서사구조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이루어 가는 주인공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때 적합한 개념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졌던, 모든 인간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셨던, 하나님의 모습과 더 가깝다.

나는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잠시 괄호에 넣어두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셨던 하나님의 모습 또는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모습에 더 집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편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기본적으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또는 '내가 예수님의 정신을 추구하고, 그분의 정신(영)이 나에게 있다'라는 표현에 어떠한 거리낌이 없다. 그 분은 정말 내 친구처럼 스승처럼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좋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듯이 예수님도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나는 예수님에게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문제라도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그분에게 어떠한 조언을 얻을 수 있으며, 때로는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예수님이 참 인간이셨고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보여주셨으며 그분의 또다른 이름이 임마누엘(함께 하시는 하나님)임을 고려할 때,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은 하나님도 예수님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바른 길일 것이다. 즉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기 보다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이 땅에서는 인간이신 예수님과 다르지 않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시공간의 제약, 물리 법칙의 제약, 생리적 제약.. 등등에 묶이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렇게되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할 때 아빠 하나님의 모습이 이 땅에서는 예수님처럼 피곤하기도 하시고, 울기도 하시고, 먹고 마시며 웃기도 하셨던 아빠로 그려진다. 일반적인 이 땅의 아빠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자식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때로는 자식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하고 못 들어 주기도 하는... 그러면서도 끝없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런 모습이 아니라 구약에서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전지전능한 왕의 모습으로 이해한다면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지 않거나, 범죄자의 손에 잔인하게 죽어가는 무고한 피해자를 구출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이라 불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가령 사랑하는 내 아이가 죽어갈 때 '그 아이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냥 옆에서 아이가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면, 내가 정말 그 아이를 사랑하는 아빠라 말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가치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이 제한적 조건 속에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때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말한다면 이 땅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고통을 마주하면서 그걸 지켜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뭔가 이 세상의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보다는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사랑의 하나님, 인간 세상의 한계에 매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더 좋다. 그 하나님이 나의 아빠라는 믿음이 좋다. 내가 내 아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음에도 여전히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없음에도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충분하다. 그렇기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에 매여있지 않고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낙관과 비관

월요일 밤에 일을 하고 화요일 새벽에 집에 오면 오전 5시가 조금 넘는다. 씻고 침대에 누우면 5시 반이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와서 다시 자고 12시나 1시쯤 일어나 점심을 먹는다. 좀 쉬다가 3시까지 학교에 가서 아이를 픽업한다. 이게 밤일을 시작한 후 지난 일 년간 화요일의 내 패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온 후에 곧바로 잠을 자지 못하고 11시쯤에 잠을 자게 되었다. 정신없이 잠을 자다가 갑자기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3시 2분이었다!! 아이 픽업 시간을 놓친 것이다. 부랴부랴 모자를 눌러 쓰고 문을 박차고 나가서 급하게 차에 시동을 걸었다. 학교까지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약간의 트래픽이 있어서 3시 20분쯤에나 학교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아이가 친한 친구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가 3살 때부터 등하원, 등하교를 시켰으니 8년 동안 이 일을 한 셈인데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히 아이도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오면서 차 안에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친구랑 무슨 얘기를 하며 기다렸냐고 물어보았다. 

아빠가 왜 안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그런데 그 둘의 내용이 사뭇 달랐다. 내 아이는 내가 오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빠가 트래픽에 걸렸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했는데, 내 아이의 친구는 내가 다쳤거나 아니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보다 친구가 긴장을 하면서 계속 물병의 물을 홀짝거리고 있었다고 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래도 내 아이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두 아이 사이의 이러한 자연적 반응의 차이는 그때까지 이 아이들이 가졌던 모든 경험의 총합에 근거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낙관이 기본값이 될지 비관이 기본값이 될지 아직 모르겠지만 되도록 낙관을 기본으로 하고 상황에 따라 비관을 적절히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Friday, September 17, 2021

선물

핑크색 갤럭시 Z 플립 3를 아내에게 선물로 사줬다. 아마도 결혼 이후 아내에게 해준 선물 중 가장 고가의 선물이었을거다. 내 폰도 그렇지만 여태껏 아내의 셀폰도 200불대의 저가폰이었다. 우리 둘다 셀폰에 별 관심이 없기도 하거니와 내 형편상 그런 폰을 살 여건이 되지도 않았었다. 아내는 특히나 전자제품에 관심이 없었는데, 연전에 삼성에서 플립폰이 나왔을 때 아내가 처음으로 그 폰에 관심을 보였었다. 무슨 특별한 기능에 끌렸던 것이 아니라 단지 접었을 때 크기가 작아진다는 데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아내는 보통 사이즈의 휴대폰도 가지고 다니기에 너무 크다고 불만을 표하곤 했었다.

한두 달 전에 플립 3가 새로 나온다고 했을 때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아내 몰래 선주문을 해놨었다.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동안 일해서 틈틈이 모아둔 돈을 아내에게 쓰기로 했다. 20년간 목회 할 때는 제대로 된 선물 한번 못했었는데 이제 밖에서 일해서 돈을 버니 맘편하게 내가 번 돈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폰이 도착해서 함께 개봉을 해봤는데, 폰이 예쁘고 작아서 아내가 너무 좋아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너무 좋았었고.. 앞으로도 돈이 모이는대로 아내에게 선물을 더 해주고 싶다. 아들에게 선물해주는 것보다 아내에게 선물해주는 것이 더 좋으니.. 아내 사랑이 참 변함없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