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킨스를 비롯한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초자연적 인격신"에 칼을 겨누었지만, 진보적 현대신학의 신이해는 이미 그러한 신이해를 벗어나 있기에, 많은 진보 그리스도인들에게 도킨스의 칼은 예리하기는 하나 허공을 가르는 칼 밖에 되지 못한다.
나는 신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 신이 사람처럼 생겼고 직접 말을 한다는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신 이해에 온전히 매여있지는 않다. 물론 대화를 하려면 그 무엇이든 무생물이든 동물이든 인격화 할 수 밖에 없으니 그런 목적으로 인격화된 신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신이 실제로 인격이라는 믿음은 굳이 받아들여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신에게는 인격보다는 신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그 신격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관념 속에 잡아두기 위해 수없이 던져왔던 인격이라는 올가미를 유유히 빠져나가는 어떤 것일 것이다.
신의 실체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말이다. 물론 성서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이 있지만, 그 계시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에 인간 언어의 한계를 그대로 안고 있다. 누구든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교만에 빠진 사람이다. 그 계시는 시공간에 매여있는 인간이라는 조건에 의해 제한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논할 때 그 논의의 빈 공간들을 채우려 애쓰기 보다는 그저 비워두어야만 한다. 그 편이 채우려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다. 채우려면 모르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이지 신적인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실체는 모르나 그 실재는 인정하는 자세. 그 실체를 초자연적 인격신으로 고정시켜 놓기 보다는 좀더 유연하게 열어놓는 자세.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할지라도, 그냥 모르는 상태로 놓아두는 자세.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더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저 계심으로 충분한 분이시다.
Saturday, August 30, 2014
Friday, August 29, 2014
화려함과 소소함
어제 웰링턴시에서 무료로 펼치는 라이트 쇼에 다녀왔다. 먼저 다녀온 키위 친구가 하도 멋지다고 요란을 떨기에 머리속으로 레이저 쇼나 크리스마스 장식 비슷한 화려한 빛의 향연이 펼치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어제 밤에 그곳에 가보니 참 소소하기 그지없는 작품들이었다. 전시물들을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넓은 지역에 여기저기 설치해 놓아서 맵이 없으면 어디서 전시를 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작은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그 작은 전시물들을 보며 처음에는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 이런 보잘 것 없는 전시물을 보자고 이 추운 밤에 시내까지 나왔단 말인가..'
실망감으로 집에 돌아가려하는데, 가만히 다른 사람들을 보니 다들 이 전시물들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는게 아닌가.. 순간 '왜 나는 이 쇼를 즐기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나도 모르게 화려함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이나 미국에서 봤던 화려함에 물들어서 그에 못 미치는 작은 것들에는 아예 그 사이즈만 보고 실망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은 작품들이라도 즐겁게 보고 감상해준다면 이를 설치한 예술가들에게는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는가. 한국 같았으면 관객들의 실망과 욕지거리에 주눅이 들어서 이런 작은 수준의 전시물을 설치하지도 않을 것 아닌가. 행사를 주최한 실무자들도 시민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면 이런 작은 사이즈의 행사를 얼마든 부담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무명의 예술가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을 터이다.
나에게 이 행사를 소개시켜준 키위 친구는 전 세계를 여행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데도 이런 소소한 행사가 멋지다고 꼭 가보라고 추천을 해준 것이다. 행사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Awesome'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정말 별볼일 없어 보이는 작품들을 보면서도 찬찬히 작품을 관찰하고 즐기며 좋아하는 사람들. 화려함에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고, 그만큼 나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제 밤에 그곳에 가보니 참 소소하기 그지없는 작품들이었다. 전시물들을 한군데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넓은 지역에 여기저기 설치해 놓아서 맵이 없으면 어디서 전시를 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작은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그 작은 전시물들을 보며 처음에는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 이런 보잘 것 없는 전시물을 보자고 이 추운 밤에 시내까지 나왔단 말인가..'
실망감으로 집에 돌아가려하는데, 가만히 다른 사람들을 보니 다들 이 전시물들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는게 아닌가.. 순간 '왜 나는 이 쇼를 즐기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나도 모르게 화려함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이나 미국에서 봤던 화려함에 물들어서 그에 못 미치는 작은 것들에는 아예 그 사이즈만 보고 실망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은 작품들이라도 즐겁게 보고 감상해준다면 이를 설치한 예술가들에게는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는가. 한국 같았으면 관객들의 실망과 욕지거리에 주눅이 들어서 이런 작은 수준의 전시물을 설치하지도 않을 것 아닌가. 행사를 주최한 실무자들도 시민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면 이런 작은 사이즈의 행사를 얼마든 부담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이고, 무명의 예술가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을 터이다.
나에게 이 행사를 소개시켜준 키위 친구는 전 세계를 여행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데도 이런 소소한 행사가 멋지다고 꼭 가보라고 추천을 해준 것이다. 행사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Awesome'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정말 별볼일 없어 보이는 작품들을 보면서도 찬찬히 작품을 관찰하고 즐기며 좋아하는 사람들. 화려함에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고, 그만큼 나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Sunday, August 17, 2014
창세기 1장 - 다스림
창세기 1장26-28에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들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특별히 사람이라는 존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그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셨다.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점은 다스림의 대상과 그 의미이다.
다스림의 대상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이 다스려야 할 대상은 사람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만들어졌던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가리킨다. 해와 달과 별, 동식물등을 모두 포함한다. 현재 발전해 있는 각종 분과 학문들을 살펴보면 우주와 지구의 각종 생물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물론 불완전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다스려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할 점은,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도는 그 때까지 만들어진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존재로서 다같이 평등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본성이 삼위일체이듯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도 서로 같은 존재론적 위치에서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는 관계에 서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세상은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세상인 것이다. 파라오가 지배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이상향 가나안에서 만들어가고자 했던 새 세상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다. 기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출애굽의 후손들이 왕을 세우려고 할때 선지자 사무엘은 왕정으로 인해 발생하게될 지배-피지배 관계의 폐해를 우려한다. 심지어 그런 체제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체제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마저 그들의 왕을 뽑고 다른 나라들처럼 지배- 피지배의 관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다.
다스림의 의미
다스린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라다’로서 영어로는 dominion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한국어로 느낌을 표현한다면 짓밟고 깨부수는 의미까지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강한 힘으로 억누르고 컨트롤한다는 의미, 정복한다는 의미이다. 근대화 이후 산업의 발전으로 자연이 파괴되었을때 기독교적 세계관이 그러한 파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비판들이 있었는데, 창세기의 문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기자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 다스림의 대상이었지, 자연이 어머니라거나 우리가 보호해야할 대상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다스림을 수천년전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다스림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다스림
우선 자연물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떤 방식인지는 예수의 공중나는 새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며 새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천부께서 기르신다는 표현을 하신다(마6:26). 새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도저를 앞세운 자연파괴자의 모습이 아닌 새들에게 물과 모이를 주는 마음씨 착한 사람의 모습에 더 가깝다. 본문에서 기른다는 말은 헬라어 “트레포”로서 좀더 정확히는 먹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나무를 자르고 숲을 파괴하고 새들의 보금자리를 없애는 그런 인간들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 아닌가. 예수는 또한 사람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위에서 충분히 군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비 교주처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약간의 힘만 있어도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자신의 말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의 친구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였다. 모두가 평등했다. 그 평등한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전환시켜 지배-피지배 관계로 만드는 세력에 예수는 대항했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죄를 덧씌우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항했다. 예수에게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한 예수를 경험하지 않은 창세기 기자에게 자연은 정복과 다스림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자연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대개의 사람들이 자연을 신성시하고 자연물을 신격화하는 시대에 자연을 피조물로 보고 인간의 다스림의 대상으로 파악한 창세기 기자의 선견지명은 분명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 하나님은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정복자라기 보다는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는 자연보호가에 더 가까웠다. 지금은 힘과 폭력을 숭배하는 수천년전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기 보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새롭게 창세기를 읽어야 할 시대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방식은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돌봄이었으며 예수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또한 사람은 애초부터 지배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서로 협력하며 공생하는 존재였음을 확인하였다. 우리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대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는 세상, 그리고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돌봄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스림의 대상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이 다스려야 할 대상은 사람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만들어졌던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가리킨다. 해와 달과 별, 동식물등을 모두 포함한다. 현재 발전해 있는 각종 분과 학문들을 살펴보면 우주와 지구의 각종 생물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의도대로, 물론 불완전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다스려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유의해야할 점은,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도는 그 때까지 만들어진 피조세계를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존재로서 다같이 평등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본성이 삼위일체이듯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들도 서로 같은 존재론적 위치에서 서로 협력하고 의지하는 관계에 서있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세상은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세상인 것이다. 파라오가 지배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이상향 가나안에서 만들어가고자 했던 새 세상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닌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었다. 기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출애굽의 후손들이 왕을 세우려고 할때 선지자 사무엘은 왕정으로 인해 발생하게될 지배-피지배 관계의 폐해를 우려한다. 심지어 그런 체제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체제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마저 그들의 왕을 뽑고 다른 나라들처럼 지배- 피지배의 관계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만다.
다스림의 의미
다스린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라다’로서 영어로는 dominion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한국어로 느낌을 표현한다면 짓밟고 깨부수는 의미까지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강한 힘으로 억누르고 컨트롤한다는 의미, 정복한다는 의미이다. 근대화 이후 산업의 발전으로 자연이 파괴되었을때 기독교적 세계관이 그러한 파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비판들이 있었는데, 창세기의 문구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그러한 비판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기자에게 자연은 정복의 대상 다스림의 대상이었지, 자연이 어머니라거나 우리가 보호해야할 대상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다스림을 수천년전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다스림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다스림
우선 자연물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떤 방식인지는 예수의 공중나는 새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며 새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천부께서 기르신다는 표현을 하신다(마6:26). 새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도저를 앞세운 자연파괴자의 모습이 아닌 새들에게 물과 모이를 주는 마음씨 착한 사람의 모습에 더 가깝다. 본문에서 기른다는 말은 헬라어 “트레포”로서 좀더 정확히는 먹인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나무를 자르고 숲을 파괴하고 새들의 보금자리를 없애는 그런 인간들의 모습과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이 아닌가. 예수는 또한 사람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위에서 충분히 군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사이비 교주처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약간의 힘만 있어도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자신의 말에 복종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의 친구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였다. 모두가 평등했다. 그 평등한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전환시켜 지배-피지배 관계로 만드는 세력에 예수는 대항했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히려 사람들을 억압하고 죄를 덧씌우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항했다. 예수에게 사람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었다.
결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한 예수를 경험하지 않은 창세기 기자에게 자연은 정복과 다스림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자연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대개의 사람들이 자연을 신성시하고 자연물을 신격화하는 시대에 자연을 피조물로 보고 인간의 다스림의 대상으로 파악한 창세기 기자의 선견지명은 분명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 하나님은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는 정복자라기 보다는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는 자연보호가에 더 가까웠다. 지금은 힘과 폭력을 숭배하는 수천년전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기 보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새롭게 창세기를 읽어야 할 시대이다. 하나님이 자연을 다스리는 방식은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돌봄이었으며 예수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또한 사람은 애초부터 지배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서로 협력하며 공생하는 존재였음을 확인하였다. 우리는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대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는 세상, 그리고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돌봄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광풍
바람에겐 손이 있다.
파도를 잡아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모래를 움켜쥐고 사방에 뿌려대기도 한다.
우리집 낡은 문도 두드리고 창문도 흔들어댄다.
그만 좀 하라 했더니,
일어나라 한다.
정신차리라 한다.
지금이 누워있을때냐고, 제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한다.
파도를 잡아채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모래를 움켜쥐고 사방에 뿌려대기도 한다.
우리집 낡은 문도 두드리고 창문도 흔들어댄다.
그만 좀 하라 했더니,
일어나라 한다.
정신차리라 한다.
지금이 누워있을때냐고, 제 손을 잡고 일어나라고 한다.
Sunday, August 10, 2014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에 살을 입혀야 한다. 살을 입히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행동으로 옮길 수도 없다. 하나님 나라에 살을 입힌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나는 내 입을 손으로 막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겠다.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현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나로서는 그분을 가리키는 것 외에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방도가 없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구현해 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최대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면 인간계에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님은 순종을 넘어서 그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을 성육시키신 분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했으며, 이해한 그 뜻에 육신의 생각을 굴복시키고 온전히 실행으로 옮긴 분이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임을 알기에 자기를 따르라고 한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모임 또는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열린 연합체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현실이고 그 분 안에서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고 그 분을 따름으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내는 사람들의 연대가 되어야 한다.
이 모임을 이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분 외에 리더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을 현실로 인정하는 사람은 감히 교회의 리더가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목사들도 역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고, 성도들도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물론 목사의 역할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목사가 리더는 아니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는가?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이 아니고, 교회 조직이나 목사만이 현실로 보이는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며 마땅히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도 현실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세상만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지배 질서에 부합하고자 애쓰는 다른 조직들과 과연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구현해 낼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최대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된다면 인간계에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님은 순종을 넘어서 그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을 성육시키신 분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했으며, 이해한 그 뜻에 육신의 생각을 굴복시키고 온전히 실행으로 옮긴 분이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임을 알기에 자기를 따르라고 한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모임 또는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열린 연합체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현실이고 그 분 안에서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고 그 분을 따름으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내는 사람들의 연대가 되어야 한다.
이 모임을 이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 분 외에 리더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을 현실로 인정하는 사람은 감히 교회의 리더가 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목사들도 역시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고, 성도들도 예수의 뒤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 물론 목사의 역할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목사가 리더는 아니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는가? 무엇이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이 아니고, 교회 조직이나 목사만이 현실로 보이는가?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며 마땅히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이 아니라면 하나님 나라도 현실이 될 수 없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를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세상만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지배 질서에 부합하고자 애쓰는 다른 조직들과 과연 무엇이 다르겠는가.
유다의 입맞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며 입맞춤을 한다. 그 입맞춤(필레오phileo)은 신약성서에 여러번 등장하는 입맞춤인데 서로 인사하며 하는 입맞춤이다. 주로 바울서신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구절들에 나오는 그 입맞춤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누가복음에서는 좀더 절절한 입맞춤인 '카타필레오kataphileo'가 두번 더 사용되는데, 한번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그 발에 입을 맞출 때이고(눅7:38), 또 한번은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입을 맞출 때이다(눅15:20). 누가가 의도적으로 필레오라는 단어를 이 세 곳에 썼는지는 알수 없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이나 탕자의 아버지의 절절한 카타필레오와 비교해보면 유다의 필레오가 얼마나 가식적이었을지 추측할 수 있다.
주님과의 만남이 가식적인 입맞춤으로 끝나는 경우가 아직도 많이 있는 것 같다. 열렬히 주님을 따랐던 시간들, 주님과의 뜨거운 포옹이, 차가운 입맞춤으로 끝나는 비극. 주님은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 계신다. 유다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것 같고, 가끔.. 유다의 일부는 내 안에도 살고있는 듯 하다. 주님을 만날때 나는 어떤 입맞춤을 하고 있나.. 입맞춤을 하러 다가가는 내 눈을 바라보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까 두렵다. "ㅇㅇ아,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며 입맞춤을 한다. 그 입맞춤(필레오phileo)은 신약성서에 여러번 등장하는 입맞춤인데 서로 인사하며 하는 입맞춤이다. 주로 바울서신의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구절들에 나오는 그 입맞춤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누가복음에서는 좀더 절절한 입맞춤인 '카타필레오kataphileo'가 두번 더 사용되는데, 한번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그 발에 입을 맞출 때이고(눅7:38), 또 한번은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입을 맞출 때이다(눅15:20). 누가가 의도적으로 필레오라는 단어를 이 세 곳에 썼는지는 알수 없지만, 향유를 부은 여인이나 탕자의 아버지의 절절한 카타필레오와 비교해보면 유다의 필레오가 얼마나 가식적이었을지 추측할 수 있다.
주님과의 만남이 가식적인 입맞춤으로 끝나는 경우가 아직도 많이 있는 것 같다. 열렬히 주님을 따랐던 시간들, 주님과의 뜨거운 포옹이, 차가운 입맞춤으로 끝나는 비극. 주님은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 계신다. 유다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살아있는 것 같고, 가끔.. 유다의 일부는 내 안에도 살고있는 듯 하다. 주님을 만날때 나는 어떤 입맞춤을 하고 있나.. 입맞춤을 하러 다가가는 내 눈을 바라보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까 두렵다. "ㅇㅇ아,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Wednesday, August 6, 2014
효녀
오늘 만난 여든셋의 할머니에게는 5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중 넷은 바다 건너 호주에 살고 있고 막내딸만 인근 도시에 살고 있다. 막내딸의 나이는 51세. 그런데 이 막내딸이 할머니를 매주 한번씩 찾아온단다. 막내딸이 사는 도시에서 할머니 집까지 오려면 대략 자동차로 한시간가량 걸린다. 매주 한시간씩 차를 타고 어머니를 만나러 오는 중년의 딸. 그 딸에게 일주일의 하루는 엄마를 위한 Mother's day였다.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그 딸이 once a week mother's day를 16살때부터 지켜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 대단한 딸이었다. 그런 자녀를 둘 수 있다는 것은 노년에 정말 큰 복이다. 그러고보니 이상하게도 내가 만난 뉴질랜드 노인들의 자녀들은 다들 부모에게 잘한다. 자녀들이 외국에 살고 있거나 너무 먼곳에 살고 있지 않는 한, 일주일에 한번쯤은 부모를 방문하는 것 같다. 나이들어 몸도 약하고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는 부모들을 매주 찾아뵙는 자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내 아들도 나중에 늙은 나에게 저렇게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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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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