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20, 2022

내 신앙과 자녀의 신앙

부활주일 오전 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원래 마트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인데 일찍 끝내고 왔다. 이 나라는 아직까지도 성금요일과 부활주일, 크리스마스에 상업 활동이 제한되어 있다. 이날에 대형마트나 대형 상점들은 다 문을 닫는다. 소규모 상점이나 카페, 테이크어웨이 가게 등만 영업할 수 있도록 법제화되어 있다. 사실 부활주일은 법정공휴일은 아닌데 관습적으로 그렇게 해 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부활주일에 문을 열지 말지를 지방정부에서 정하도록 해서 어떤 지역에서는 마트도 문을 연다고 한다. 점점 이 나라에서도 기독교적인 색채가 약해지고 있음을 이런 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마트는 부활주일에 문을 닫기로 되어 있어서 오늘 일찍 올 수 있었다. 예수님 덕에 집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고 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내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도 다 예수님 덕이다. 예수님 덕에 세속적인 욕심을 다 버릴 수 있었고, 그분이 만들어 주신 길을 따라가는 바람에 새로운 가치관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길이 옳다고 믿고 있고 죽을 때까지 그 길을 따라 가려 하고 있다. 

다행히 아내도 나와 뜻이 같아서 둘이 함께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있다. 아이는 어찌 될지  모르겠는데, 아이도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게 되길 바라고 있다. 아이에게는 내가 배웠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를 알려 주고 있다. 교리적 기독교가 아닌 내가 깨달은 기독 신앙을 전해 주고 있다. 물론 내 아이도 내가 그랬듯 제 아버지의 신앙과 다른 색깔의 신앙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예수님에게 등돌린 삶을 살지는 않기를 바란다. 

최근에 아이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시간 낭비 같다는 말을 했다. 자기가 예배에 참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 말을 듣고 꽤 진지한 고민을 했다. 나는 저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만 11살의 나이에 왜 나는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 아이는 저런 생각을 하는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는 하나님을 꽤나 체험적으로 경험했었다. 강렬한 영적 체험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상상 속의 하나님이 아닌, 살아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했던 것이다. 내 아이의 나이에 방언을 받기도 했고 기도하는 아버지의 기적과 같은 수많은 간증도 직접 옆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이에게 하나님을 전해 주는 방식은 그렇게 체험적이지 않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아이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는 마음을 갖기 전에는 효과가 별로 없을 것이다. 나조차도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신학을 공부하면서부터였으니 말이다. 아이 때는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게 좋을 텐데, 그건 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신앙은 강요가 아니고, 아니어야 한다. 내 아이에게도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줄 것이다. 대신 열심히 지혜를 짜내어 아이가 예배를 드리도록 유혹할 것이다. 유혹이 실패해서 아이가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고 하면 화내지 않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요가 아니다.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아이를 키울 것이고 아이가 하나님을 믿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다.    

Wednesday, April 13, 2022

신앙의 세계

신앙은 물리의 세계가 아니라 심리의 세계에서 작동한다. 물리의 세계는 하나이지만 심리의 세계는 제각각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물리적 예수라는 인물이 심리적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과정이 있다. 신학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쉽게 이야기하면 물리적 예수는 세상의 모든 인간이 그렇듯 태어나고 죽었을 뿐이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 예수는 그냥 태어나지 않았고 죽어 없어지지도 않는다. 물리의 세계에 없는 사실이 왜 신앙의 세계에는 있는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리의 세계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강변의 아파트를 살 수 없고,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은 더욱 강화되고, 바이러스에, 전쟁에, 살기는 더욱 힘들어 지고, 아프고, 병들고, 죽고.. 비단 요즘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상 인간 사회는 늘 이러한 상황을 겪어왔고 그런 현실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다. 신앙은 이러한 현실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심리적 치료제와 같다. 

메트릭스라는 영화에 잘 묘사되어 있듯이 인간의 신체는 정신의 안정이 없이는 오래 살지 못한다. 인간을 가두고 인간의 몸에 흐르는 전기를 빼내어 쓰던 기계들이 깨달은 것은 전기 추출 주머니에 갇힌 인간의 정신에 그 몸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잘 짜여진 서사를 부여해 주면 인간이 더 오래 살더라는 것이었다. 인간이 더 오래 살아야 더 오랫동안 전기를 뽑아낼 수 있기에 기계들은 인간의 뇌에 자극을 주어 삶의 서사를 부여해 주었다. 

신앙도 인간의 정신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준다. 그 세계가 없는 인간은 없다. 그 신앙이 종교적 신앙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의 정신에 하나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물리적 세계의 실상에 100퍼센트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삶에 만족하더라도 주변 세계의 참상까지 만족할 수는 없는 법이다. 

종교적 신앙은 인간의 내면에 잘 짜여진 세계를 만들어 준다. 그 세계에서 위안을 받았던 사람들이 그 세계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약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믿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몸이 아플 때 약을 먹듯이, 아니면 몸이 아프지 않더라도 예방 차원에서 약을 먹듯이, 그냥 약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어떤 사람은 혈압약을 먹고 어떤 사람은 갑상선약을 먹고 어떤 사람은 당뇨약을 먹듯이, 어떤 사람은 불교약을 먹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약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될일이다. 

나는 기독교라는 약을 먹고 있다. 그게 나한테 맞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라는 이 약도 다 똑같지는 않다. 물리적인 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은 기독교라고 하지만 이 약도 제 각각이고 나 역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 안에서 나에게 잘 맞는 약을 찾아서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약이 나한테 잘 듣는다고 모든 사람에게 다 잘 듣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작게 보면 기독교, 크게 보면 모든 종교, 더 크게 보면 모든 신앙이 다 그렇다. 자기에게 맞는 신앙을 찾아서 잘 가꾸어 가면 된다. 약은 중요하다. 하지만 약은 약일 뿐 약이 내 삶의 전부도 아니고 이 세상의 전부도 아니다. 심리적 약과 물리적 현실을 혼동하지 않고 심리적 약으로 힘을 얻어서 물리적 세상을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종교가 아편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수가 아편을 팔지 않았고 싯달타가 아편을 판 것이 아닌데 종교가 제도화 되어 가면서 신도들에게 그 좋은 약을 아편화 시켜서 팔고 있는 것이다. 신도들이 정신을 차리면 좋겠는데 한번 중독되면 깨어나기가 여간 쉽지 않으니.. 

Friday, April 8, 2022

위계 사회

위계는 복합적이다. 단순히 나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복잡한 위계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가 한국어가 아닐까 한다. 

한국어에는 위계가 내재되어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인간관계를 위계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위계에서 벗어난 말을 하면 질타를 받게 되고 위계에 맞지 않은 말을 들었을 때는 거의 본능적으로 기분이 나빠지게 된다.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살다보면 그런 면에서 훨씬 자유로움을 느낀다. 물론 영어에도 위계를 표현하는 방식이 있지만 한국어처럼 위계가 언어에 내재되어 있지는 않다. 영어에서 I 는 I이고 You는 You다. 한국어에서 I는 '나'일 수도 있고 '저'일 수도 있다. You는 너무 복잡하다. 너, 당신, 그쪽, 아줌마, 아저씨, 선생님... 끝이 없다. You에 대응하는 호칭을 잘못 선택하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외국에서 자란 한국 아이들도 영어를 할 때와 한국어를 할 때 자세가 달라진다. 영어를 할 때는 태도가 자유롭지만 한국어를 할 때는 공손해진다. 말이 이렇게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한 언어를 인위적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엄청난 시간이 흘러 한국어에 내재되어 있는 위계가 사라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는 한 한국 사회는 여전히 위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소박한 삶

늘 소박한 삶을 꿈꿔 왔고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감사하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 왔으니, 어찌 보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평생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