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22, 2015

나와 하나님

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다가오셨는가.
가장 먼저 하나님은 자살하려던 아버지를 살리신 분으로 내 삶에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독실한 불교도였는데 사업의 실패로 투신 자살을 하려던 찰나에
어떤 연유였는지 부처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음성을 듣지 못했기에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았다'고 했고,
그것을 통해 자살을 포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문자 그대로 구원의 하나님이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아버지 없이 자랐을 것이고
내 막내 동생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우리 삼남매는 홀어머니 밑에서 아주아주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앙이었을
아버지의 죽음을 막아주시고 우리 가정을 살려주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에게 다가오셨다.

이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에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자 가치를 셈할 수 없는 은혜이다.
따라서 나는 성경이 없었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어야 할 사람이다.

그 이후에 경험된 하나님은 부도로 인해 가난해진 우리 가족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이셨다.
광야에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셨던 하나님,
이스라엘이 고백했던 그 하나님이 어릴 적 내가 경험했던 우리 가족의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아버지를 선택하신데에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믿는다.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사람중에 유독 아버지를 택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자살을 택하는 모든 사람에게 외치셨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아버지에게 뭔가 특별한 믿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의 음성이 아버지에게 들렸다는 사실.
그래서 불교도였던 아버지가 하나님을 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만남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로 하여금 아버지의 하나님을
내 아들에게도 반드시 전해야 하는 사명감 같은 걸로 다가온다.
물론 하나님이 이 일도 주도적으로 하시겠지만
그 과정 중에 내가 해야할 일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생각이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에게는 어떠한 큰 요구도 없이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보여주셨다.
어쩌면 모리아 산 사건 이후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삭에게
하나님이 미안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의 하나님 경험은 아브라함의 그것보다는 이삭의 그것에 더 가깝기 때문에
나는 아브라함보다는 이삭에 좀더 동질감을 느낀다.

물론 내 아버지는 아브라함의 신앙처럼 광신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모리아 산 사건 이후 사라와 이삭에게 버림받았던 말년의 아브라함처럼
아버지도 나와의 관계가 소원해졌을 것이다.
다행히 하나님은 아버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아버지가 강한 영적 체험을 했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여러가지 오류에 깊이 빠지지 않도록 해주셨다.
물론 그 과정이 아버지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었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아버지는 십자가 신앙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무사히 잘 감당하셨고 이제 공은 나에게 넘어왔다.
나는 이 공을 내 아들에게 잘 넘겨야 한다.
다행히 나는 아들이 하나여서 이삭처럼 두 아들의 시기와 경쟁 때문에 괴로워할 일은 없다.
나는 신앙의 유산에만 신경을 쓰면 된다.
내가 아들에게 넘겨줄 수 있는 신앙의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버지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구체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된 구체적인 신앙의 발자국들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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