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1, 2009

영에 관하여..

* 2년 전에 썼던 글.

요즘 읽게 되는 책들이 주로 제자도에 관한 책들이다. 제자도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윌라드의 관점을 많이 수용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그의 분석이 매력 있게 다가온다. '영혼육은 하나’라는 통전적 관점은 그리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영을 의지로 본 것이 새로웠다. 나 역시 의지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이성이나 감정보다는 높이 두고 있기 때문에 윌라드의 관점이 더 와 닿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만이 순수한 영, 순수한 의지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의지)을 성경이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체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는 없고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또는 우리에게 파악된 하나님은 그 분의 형상이 아닌 역사 속에서 경험된 그 분의 뜻(의지)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영이라 부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에게도 임한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영에 먼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의지가 사람의 의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물론 이성의 작용과 독립적으로 의지가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통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잠시라도 놓치면 안 된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영을 의지와 같은 것으로 봤을 때 이 의지의 차원이 인간에게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 본능에 얽매여 있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격이 다른 위치에 올려놓을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기능을 하는 것이 인간의 의지이다. 하나님조차 터치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 부분을 강제하게 되면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체가 아니라 로봇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선택을 하게 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하와의 선택을 강제로 막지 않으셨던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 영이 있다. 이 영은 인간을 이루는 다른 부분들, 곧 이성, 감정, 신체, 사회적 관계, 혼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모든 부분들을 이끄는 역할을 담당한다.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이 떨어지는 그곳에서부터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여기서 돌이 떨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먼저 변화가 일어나야지 그 변화의 물결이 다른 부분까지 퍼져 나가기 시작할 수 있다. 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부딪혀서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첫 번째 부분이 바로 우리의 영이어야 한다. 그 영은 곧 우리의 마음 또는 의지이다.

윌라드가 사회적 관계를 우리 인간 존재의 한 부분으로 파악한 것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 역시 사회와 개인을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이 변화를 받아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기 시작했다면 그 변화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에까지 미치게 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우리 개인이 속한 사회도 변하게 마련이다. 기존 사회는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변화가 너무도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 변화는 사회가 이제까지 존재해 오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윤리, 정치, 경제적 가치들을 그 근원부터 뒤집어엎기 때문이다.

사회의 윤리와 정치와 경제에는 그 근원에 인간이 있다. 인간의 유익, 그것도 지배세력의 유익을 그 근간에 깔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변화를 받은 한 인간의 등장과 그로 인한 사회의 변화는 이제껏 사회가 이루어온 모든 가치체계를 하나님 중심의 가치체계로 재 편성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는 인간의 윤리도 경제 원칙도 정치 시스템도 모두 무의미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제껏 절대적이라고 우리가 느껴 왔던 모든 것들이 그 절대성을 상실하게 된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의 평등과 평화, 자유와 사랑등인데 이러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현재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예수의 삶의 패턴을 따라서 사는 것이고 예수의 삶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의 희생을 받아 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현한 인물이 예수이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이었고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임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으로 우리를 던지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곧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삶의 패턴을 우리도 그대로 밟아가야 하며 이러한 따름은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가 아닌 그분의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그분의 영이 다스리는 첫 번째 영역은 다름이 아닌 우리의 영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것이 선실현되어야 그 이후 우리의 행동이 변화되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 크리스천이 인간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나 창녀들과 어울릴 수 있었는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런 구조 속에서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죄가 아닌 용서와 긍휼, 감싸안음을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또한 예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지, 강제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은 예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행동을 그대로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예수의 행동이 아니고 예수의 마음을 본받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본받으려면 예수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 먼저이다. 마음은 의지와 같은 의미이기에 이러한 예수의 마음 본받기 역시 영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영적인 문제는 선택의 문제와 직결된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영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 선택을 지속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면, 영성이 있는 사람은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누구보다도 영적이었으며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제 우리는 선택 차원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선택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연결되어 있다. 심지어 감정(emotion)조차도 선택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감정은 느낌(feeling)과는 다르다. 감정은 신체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인 반면,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느낌과 달리 감정은 통제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감정도 충분히 선택적으로 통제 가능하다. 세상이 내 감정을 흐트려 놓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재구성된 감정의 패턴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해 나가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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