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다. 자유를 주신다. 자유를 주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과정 중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다. 아니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의 조건으로 율법을 잘 지킬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갑이되고 이스라엘은 을이 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갑만이 약속 이행의 책임을 졌는데 모세와의 언약에서는 을도 약속 이행의 책임을 져야한다. 율법을 주기 이전까지의 하나님은 개인의 하나님이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다. 하지만 출애굽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하나님이 되신다. 개인의 하나님이 왜 민족의 하나님이 되셨나? 아브라함과의 언약 때문인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민족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이제 민족의 하나님이 된 것이다.
많은 수의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법이 필요하다. 이스라엘도 수가 몇명 안되었을 때는 법이 필요없었겠지만 이제 수백만(?)의 사람이 모이게 되었으니 반드시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법을 내려주신다. 이 법의 근본 정신은 십계명으로 먼저 주어졌다. 그리고 이 십계명의 정신을 구체화시킨 조항들이 율법으로 주어진다. 이 율법은 당대의 다른 국가들의 법률과 비교해봤을 때 상당히 진보적인 법률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조문들도 많이 있지만 인권 개념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탈출민들이 이 정도의 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율법에는 최소한 두가지 문제점이 있어보인다. 하나는 율법이 실생활의 모든 일에 적용가능할 만큼 세분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번 법에 의지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도 법의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법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이 없으면 새로운 법 조항을 또 만들게 되어 있고 이는 결국 법의 거대화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또 하나는 율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계층에 자연적으로 힘이 실리면서 계급의 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문제로부터 후에 토라의 부족한 부분을 구전 전승으로 보완하고자하는 랍비 유대교가 생성되게 되었고 이들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인해 율법 적용이 실생활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미치게 되면서 사람들의 삶이 율법에 의해 더욱 규제를 받게 되었다. 두 번째 문제로부터 제사장 계급이 생겨나게 되고 이들의 권력 유지 본성이 결국 신약 성경에 이르러 예수를 죽이는 사건으로 연결되게 된다.
모세를 통해서 선지자의 역할 또한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이것이 선지자의 원형이 된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럴만도 하다. 613개의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은 자녀가 어디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살았던 때가 광야 시절이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가장 반항을 많이 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율법을 항상 지킬수는 없었기에 율법을 범한 죄를 씻는 예식이 항상 필요했을 것이다. 죄를 짓고 씻고 하는 이 일이 계속 반복이 되면 죄 짓는 일에도 무덤덤해질 것 같다. 율법은 그래서 죄를 근원적으로 없애는 일을 하지는 못한다. 율법이 있는 이상 죄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들 사는 사회에 법이 없어도 안되지 않는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는 일 외에는 없다.
십계명은 율법인가 아닌가? 십계명은 언약의 책(the book of the covenant)에 수록된 법규들을 주기 이전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명령들이다. 십계명은 언약의 책과 다른 지위를 가지는가?
율법이 내려진 이후 하나님은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신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며 인간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일년에 한차례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수시로 만났다. 모세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모세는 제사장이라기 보다는 선지자라고 해야 더 맞을 것 같다. 안식일에 대한 규정도 있다. 성막이 거룩한 장소라면 안식일은 거룩한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시간 그리고 율법을 통한 거룩한 행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려면 이정도는 최소한 지켜줘야 하는 것들이었다.
광야 생활은 거룩에 대한 배움이 있었던 곳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거룩한 하나님과 가깝게 있었던 광야 시절에도 이스라엘 인들은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 벌써부터 다른 방법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음이 느껴진다. 매일 하나님의 영광과 공급하심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다면 과연 누가 거룩하게 됨에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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