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를 한 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것들을 구하는 기도를 하도록 하신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세가지로 우리는 의식주를 꼽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를 꼽는다면 단연 음식이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신생아도 먹는 것은 할 줄 안다. 먹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던지 첫 사람 아담과 하와도 먹는 것을 통해 시험을 당했다. 예수님에게 임한 첫 번째 시험도 역시 먹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이 말은 먹는 문제는 우리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왕정시대 왕들의 첫 번째 임무는 국민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가족들을 굶기는 가장은 가장 무능한 가장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는 이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처럼 절박한 문제인 먹는 문제에 직면해서도 예수님은 놀랍게도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을 잃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계신다. 우리가 우리의 생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이 문제마저 하나님께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 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를 최대화 하는 것이다. 이 것은 내 생명을 내 존재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는 이 기도는 만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공급하심으로 그들을 살리신다. 마치 아기가 엄마의 젖을 통해서만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존해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성경은 몇몇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 만나 자체에 매달렸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 16:20 27). 이런 일들은 지금도 흔하게 일어난다. 하나님이 물질을 공급해 주셨는데 그 공급자이신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집중하는 사태 즉 물질이 우상이 되어버린 사태가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하다. 물질을 소유하는 데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을 둘 다 섬길 수 없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오직 하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갈등하며 맘몬이 부추기는 욕망에 쉽게 노예가 되고 만다.
양식청원은 단지 음식만을 구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결핍 상태를 해결해 달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만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왜 더 욕심을 내시지 않으셨을 까? 욕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반대되는 측면이다. 욕심이 죄가 되는 이유는 그 곳에 하나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때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십계명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명령으로 끝을 맺는다 (출애굽기 20:17). 곧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탐심이 없는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날의 자원으로 만족하며 살지 못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탐내게 되며 우리가 탐내는 그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5:5).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만을 요구했다는 이 말은 또한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초적인 생존 차원에서도 만족하며 살겠다는 말이다. 과연 우리는 생존 차원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가? 내 소유가 아닌 내 존재에 집중하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소유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가진 것에 나를 일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인 내 존재를 내가 가진 물질들과 동일시 하는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회에서는 몸 값이라는 말이 일반화 되어있다.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더 값비싼 상품들을 사려고 한다. 명품을 들면 자신이 명품이 되는 줄 안다. 이렇게 소유를 늘려가는 과정 중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한다. 우리의 소유 지향적 삶이 빚어낸 우울한 풍경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 후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인간은 항상 존재의 결핍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결핍 상태를 소유를 통해 채우려 한다. 존재의 결핍 상태를 해결할 방향을 잘 못 잡은 것이다. 전 방위적 소유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인간의 경향성이다. 아직도 내가 나를 이 결핍 상태에서 구원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이러한 소유 지향적인 삶에 근본적 저항을 가하는 기도이다. “일용할”은 필요한 만큼의 양이다. 생존차원이다. 소유 차원이 아니다. 일용할 양식 가지고 만족할 수 있는가? 이 것은 대단히 중대한 질문이다. 이 기도는 우리의 삶의 지향성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한다. 소유 차원이 아닌 존재 차원의 삶으로의 전향이 요청된다. 우리의 구하는 기도는 대부분 우리의 소유를 늘리는 쪽에 집중되어 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루 분의 식량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내었던 것처럼. ..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일용할”을 빼고 싶어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차고도 넘치도록 물질의 복을 내려주소서. 이 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기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계신다. 소유가 우리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물질들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12:15).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에 관심이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에 관심이 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자신의 소유에 관심이 있었다 (마태복음 19:22). 그러나 하나님은 그 청년의 존재에 관심이 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을 믿는 포즈를 취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 청년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재물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예수님을 떠나는 모습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소유 지향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다. 오해가 있을 수 있기에 다시 한번 용어를 정확히 한다. 소유가 아니라 “소유 지향”이다. 예수님은 현실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소유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소유가 있었다. 개중에는 부자도 있었으며 실제로 신약 교회에서 교회의 공간을 제공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지향이라는 말을 유념해야 한다. Orientation이다. 우리가 북쪽을 지향하고 있으면 우리는 북쪽으로 간다. 남쪽을 지향하면 우리는 남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소유를 지향하게 되면 우리는 소유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움직이게 되어있다. 예수님은 이 지향성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팔복의 첫 번째 복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그냥 가난한 자 정말 물질이 없어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심령의 결핍을 느끼는 자 물질의 결핍을 느끼고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고 그 영혼을 채우기를 원하는 자 이런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다. 부자이면서 심령이 가난할 수도 있다. 가난하면서 심령이 가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질 적 소유 차원의 문제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존재 차원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에 관심을 가져주길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에 관심이 없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관심 대상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면 바울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았어야 했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그들의 존재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들의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변화되어 나가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위인들에게 있어서도 우리는 성경의 눈은 줄기차게 그들의 내적인 변화 존재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의 존재의 변화보다는 그들이 얻게 된 소유에 더 집착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어하시는데 우리에게는 그들이 얻게 된 재물이 더 눈에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는 보이는 재물들이 우선이다. 소유가 오리엔테이션이기에 모든 존재가 소유 쪽으로 반응한다. 이런 사람들은 물질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소유하고 말씀도 소유하고 사랑도 소유하고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소유하려 한다. 모든 것을 대상화 하고 사물화 해서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소유 차원으로 대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하나님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분량만큼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이런 하나님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를 늘리는 신 정도로 취급하면 안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감사하게 된다 (빌립보서 4:11-13). 존재 차원의 감사를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의 욕심은 사라진다. 그래서 “나에게”가 아니고 “우리에게”이다. 이것은 존재 차원에 눈을 떴을 때 가능하다. 소유 지향적 삶에서 “우리”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 “우리”는 내 소유를 늘리는 경우에서만 “우리”이다. 그러나 존재 지향적 삶은 나를 넘어선다. 나와 네가 존재 차원에서 모두 동등하다는 사실을 안다. 나도 주체고 너도 주체이다. 서로의 있음 자체를 인정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했던 방식이다. 나는 주체이고 너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객체라는 식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존재 차원에서는 하나이고 서로 서로 하나가 되어 가는(becoming) 과정 중에 있다 (요한복음 14:20).
따라서 우리는 소유 지향적 삶에서 존재 지향적 삶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궁극적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이 방향 전환은 바로 회개이다. 삶의 오리엔테이션이 하나님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지향의 삶을 살게 된다. 이 것이 거듭남이다(요한복음 3:4-7). 죄(욕심)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사는 것이다. 이 하나님 지향의 삶에서 우리는 정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는 단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존재의 탄생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목적도 우리 존재와의 인격적 교제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될 때 우리는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실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소유의 확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확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 안에서 타도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존재의 문제 죄의 문제 악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소유를 지향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성향을 전복시키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배웠다. 먹을 것 마실 것에 대한 염려가 하나님 나라보다도 우선이 되어서는 안된다 (누가복음 12:29-31).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때 우리의 욕심은 축소되며 생명 차원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내 존재를 회복했을 때 우리는 우리 소유의 많고 적음과는 관계 없이 내가 여기에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건 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고 기도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가? 아무리 우리의 소유가 많다 하더라도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는가? 내 소유의 확대를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가?
Wednesday, March 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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